카르나크 신전을 돌아보고 룩소르 신전으로 가는데 룩소르 신전은 야간이 더 좋다고 하며
조금 이른 시간이라 마차를 타고 룩소르 시내 일부를 돌아보고 룩소르 신전으로 간다
마차관광은 어느팀이나 다 하는 것 같다
마차를 타고 시장골목을 한 바퀴 돌고 룩소르 신전이 있는 로터리에 내려주는데 1불을 줬더니 더 달라고 한다
마차회사에다 돈을 지불했을텐데 내릴 때 또 돈을 달라는 것은 마차주인에게 아주 적은 돈을 주는 것 같다
가이드가 시키는대로 1 불울도 얹어 주었다
마차가 시내 좁은길로 이리저리 비켜가는데 탄사람이 더 미안하다
시장골목은 도로도 비좁은데 마차 자동차 사람 뒤주박 죽이다
룩소르의 주거시설
이 건물은 룩소르 기차역이라 한다
이 스핑크스 참배 길은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 때, 카르나크 대신 전의 주신(主神)인 아멘(Amun) 신과
그의 부인 무트(Mut) 여신, 아들 콘수(Khonsu) 신이 황금으로 만든 배 모양의 신여(神輿)에 실려 카르나크
대신 전에서 스핑크스 참배길을 따라 룩소르 신전으로 오던 길이다.
신전의 사제들이 이 신들을 태운 가마를 메고 스핑크스 참배길을 행진할 때,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행렬을
보기 위해 스핑크스 참배길로 몰려들었고, 꽃을 바치고 향수와 제물을 바치며 신의 축복과 은총을
빌었다고 한다. 룩소르 신전의 대중정 벽에는 신여를 태운 배가 나일강을 따라 룩소르 신전으로 오는
장면을 새긴 벽화가 일부 남아있다.
신여를 태운 배가 하안 선착장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다시 신전의 지성소로 옮겼을 거라는 얘기도 있다.
오페트 축제는 대 종교 축제인 셈이다. 나일강의 범람 시기에 맞추어 10일 이상 축제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나일강의 범람을 축하하기 위한 왕국 최대의 행사였다. 나일강의 범람은 곧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풍요이고 축복이었기 때문이다.
오페트 축제 행렬의 모습
황금색으로 된 신여(캡처한 사진)
룩소르 신전은 1년에 한 번 오페트 축제 때 아멘 신이 머무는 신성한 장소로 건설되었는데, 오페트 축제의
기원은 하트셉수트 여왕(기원전 1470년 경)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건축물로서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사나 투트모스 3세(기원전 1450년 경)의 이름이 있는 테베 3주의 사당(제1 안마당에 있다)이 가장
오래된 것이나, 현재 룩소르 신전의 주요 부분은 주로 신왕국 18 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
(기원전 1370년 경)가 건설했는데, 그 후 19 왕조의 람세스 2세가 대대적으로 개축하면서 제1 탑문,
안마당, 대열주실 앞 탑문을 세웠다.
그 밖에도 투탕카멘이나 람세스 4세, 알렉산더 대왕 등이 부조를 새기거나 사당 등을 건축했다고 한다.
청랑 만 리 님 글에서
룩소르 신전은 카르나크 대신 전의 부속 건물로 카르나크 신전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나일강 강
가에 있다. 원래는 카르나크 신전에서 룩소르 신전까지 스핑크스 참배길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가진 '안드로 스핑크스(남성 머리 스핑크스)'가 두 신전 사이의 양쪽에
600여 개 도열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중 일부만이 룩소르 신전 입구 앞쪽에 남아있다.
이 스핑크스 길은 말기 왕조의 넥타네보 1세(기원전 380년 경)가 세운 것이데 스핑크스의 얼굴이
'넥타네보 1세'라는 이야기도 있다.
제1 탑문과 람세스 2세 석상, 오벨리스크
스핑크스 참배길을 뒤로하고 이제 룩소르 신전 제1 탑문 앞에 섰다.
좌우 대칭으로 높게 쌓은 탑문 앞에 람세스 2세 오벨리스크가 홀로 서 있다.
원래는 오른쪽에 하나 더 있었는데 지금은 프랑스 콩코드 광장에 세워져 있다.
1831년 이집트의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에게 선사했다고 한다.
탑문 앞 람세스 2세 석상 역시 좌상 한 쌍, 입상 4개도 모두 짝을 이루어 대칭으로 서 있다.
머리에는 상·하이집트의 파라오임을 상징하는 이중관을 쓰고 있다.
4개의 입상은 왼쪽 발을 앞으로 한발 내딛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살아있는 파라오임을 나타내고 있다.
람세스 2세의 얼굴은 아주 앳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90세를 넘기면서까지 만 66년을 통치한 왕이지만 그래도 자기 모습을 늘 이팔청춘으로 보이고
싶었나 보다. 그 모습은 이집트 어딜 가나 다르지 않다.
람세스 2세의 좌상들
제1 탑문 왼쪽 벽면에 새긴 부조(카데시 전투 장면)
람세스 2세가 세운 높이 25m의 오벨리스크 뒤에는 너비 65m, 높이 25m의 제1 탑문이 있는데, 탑 문의 왼편
벽에는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전투 장면이 새겨져 있다.
벽돌로 이어 쌓은 면에 새겨져 있어 그림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윤곽이 드러난다.
2륜 전차를 타고 활을 당기며 돌격하는 람세스 2세는 당연히 크고 생동감 있게 그렸고, 일반 기마병들은
아주 작게 그려 놓았다. 겁에 질려 도망가는 히타이트 군대의 말과 병사, 말과 전차, 병사가 뒤엉켜
아수라장인 된 전투 장면이 보인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도 위대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지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부조와
석상, 건축물들을 여기저기에 남겨 놓았다. 이집트 왕국과 히타이트 왕국 간에 벌여졌던 '카데시 전투(
기원전 1275년)' 역시 피아 간에 공방을 계속하다 지쳐 결국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끝난 전투이지만,
람세스 2세는 크게 승리한 것으로 자랑하고 있다. 왕의 권위를 높여 파라오로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상이집트의 상징인 연꽃과 하이집트의 상징인 파피루스를 한데 묶는 의식 즉 상하이집트의 통일을 의미
룩소르 신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지 않지만 대략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 기인 기원전 1400년쯤에
지어진 걸로 추정된다. 그 이래로 카르나크 신전과 함께 테베를 상징하는 신전으로 자리매김했는데,
당시에는 '남쪽 성소'라는 뜻의 '이페트 레시트'라고 불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신에 대한 숭배가 중심인
카르나크 신전과 달리 룩소르 신전은 파라오의 왕권 강화적인 목적이 더 강했다는 것. 일부 학자들은
파라오들이 룩소르 신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가 처음 지을 때 지성소와 내부 광장, 다연주홀이 만들어졌고 후대에 건축광 람세스 2세가
추가로 탑문과 입구 쪽 광장을 덧붙였다. 다만 람세스 2세 외에도 수많은 파라오들이 공사를 진행했는데,
일례로 그 유명한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도 룩소르 신전에 조금씩 조금씩 건물들을 덧붙였다.
람세스 2세의 안마당에 자리 잡은 모스크
제1 탑문을 지나면 람세스 2세의 안마당이다. 안마당의 벽을 따라 74개의 파피루스 기둥들이 늘어서 있다.
안마당의 왼편에는 조그만 모스크가 있다. 6세기 경 콥트 교회가 있었던 자리에 모스크를 세웠다고 한다.
열주 너머로 모스크의 첨탑이 보인다. 람세스 석상 뒤로는 대열주실의 파피루스 기둥이 늘어서 있다.
안마당의 람세스 2세 석상, 그 뒤쪽이 대열주실
람세스 2세의 안뜰은 파피루스 모양을 한 기둥 74개가 람세스석상과 함께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카르나크 신전의 기둥이 웅장 하다면 룩소르신전의 기둥은 아름답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곳은 원래 천정이 있는 실내공간이었으나 기둥과 일부벽면만 남아 있다
열주공간은 신전의 가장 성스러운 공간에 이르기 위해 고대 이집트 인들이 공들여 조성한 곳으로
경건함이 느껴진다
축제당시 성스러운 태양의 배를 들고 행진했던 많은 악단과 무희 그리고 사제와 군인들이 이곳에 도착
룩소르의 여사제에게 꽃과 현물을 받은 후 돌아갔다고 한다
람세스 2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가이드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이다.
인생무상을 상징하는 시로 유명한 오지만디아스가 바로 이 사람. 소설《람세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흔히 알려진 람세스는 그리스식 명칭이고, 이집트 상형문자의 특성상 모음을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이집트인들이 불렀던 정확한 고전 이집트어 발음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후계 언어인 콥트어와 당시 쓰였던 다른 언어들 간의 연결 고리를 통해 라이마세서 [ɾiːʕamaˈseːsə]가
가장 가깝다고 추정할 뿐이다. 최근에는 프티모세, 투트모세, 아흐모세처럼 라-모세가 본래 이집트식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성서의 모세도 그렇고 이 모세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름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매우 흔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20대에 [5] 왕위를 물려받았고, 그 후 60년 이상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러니까, 대략 90살에 죽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신도시이자 새로운 수도 피람세스(Per-Ramesesu) 아부심벨
대신 전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을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이집트 제19왕조의 황금기뿐 아니라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
시대의 왕들의 부조
대열 주실을 지나면 아멘호테프 3세가 만든 대중정에 이른다. 이곳은 아멘호테프 3세의 안마당이다.
파피루스 기둥이 마치 숲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도열해 있다. 그런데 조금 전 대열주실에서 보았던
기둥머리하고는 모양이 좀 다르다.
아래 사진처럼 마치 꽃봉오리처럼 만든 것은 아멘호테프 3세 때 유행한 양식인데, 파피루스의 봉오리,
또는 파피루스를 다발로 묶어놓은 형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조각했다고 한다.
반면에 위 대열주실의 기둥머리처럼, 원형으로 둥그렇게 장식한 것은 람세스 2세 때 유행한 양식으로
파피루스 꽃이 활짝 핀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열주 사이에 놓인 석상(투탕카멘과 왕비 네페르티)
축제의 장면들이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대중정 열주(파피루스 다발 묶음 형태)
대열주실을 지나면 아멘호테프 3세가 만든 대중정에 이른다.
이곳은 아멘호테프 3세의 안마당이다. 파피루스 기둥이 마치 숲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도열해 있다.
그런데 조금 전 대열주실에서 보았던 기둥머리하고는 모양이 좀 다르다.
아래 사진처럼 마치 꽃봉오리처럼 만든 것은 아멘호테프 3세 때 유행한 양식인데, 파피루스의 봉오리,
또는 파피루스를 다발로 묶어놓은 형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조각했다고 한다.
반면에 위 대열주실의 기둥머리처럼, 원형으로 둥그렇게 장식한 것은 람세스 2세 때 유행한 양식으로
파피루스 꽃이 활짝 핀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대중정에서 또 다른 열주실을 지나면 신상이 안치되었던 지성소에 이른다.
이곳엔 전실을 포함해서 4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데, 안쪽에 아멘호테프 3세 지성소와 알렉산더 대왕의
성소도 있다.
성소의 벽에는 파라오와 아멘 신 등이 돋을새김 되어있고 알렉산더 대왕이나 아멘호테프 3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좀 특별한 것은 이곳에 아멘호테프 3세의 탄생의 방이 있다는 점이다. 아멘 신에 의해 잉태되고 탄생한
신성한 곳이라 하는데, 이래서 룩소르 신전을 파라오들을 신격화하고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했다고 하는가 보다.
앙크를 주는 알렉산더 대왕
룩소르 신전 벽화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 왕의 손을 잡고 신처럼 앙크를 건네준다.
인간창조를 뜻하는 부조
수태를 상징하는 벽화
아문신이 왕비에게 이슬을 내려 아멘호텝 3세를 수태시킨다.
이렇게 태어난 아멘호텝 3세는 스스로 아문 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투탕카멘시대에 세긴 오페트축제의 모습
이중관을 쓴 파라오와 아문신의 부조 뜻은 모르겠다
이 구역에는 로마 룩소르 신전(Roman Luxor Temple)도 있었다.
이집트는 기원전 29년부터 서기 641년까지, 아랍의 정복이 있기 전에는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룩소르 신전은 서기 300년 경에 로마 기념물로 개조되면서 아멘 신 숭배와 함께 로마 황제도 숭배하게 되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장식이 있던 곳에 석고를 덧칠하여 황제 숭배에 맞게 바꾸고, 벽에는 궁정 예술가들이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이집트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아직 복원이 덜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래 사진에서 보듯 화강암으로 만든 두 개의
기둥과 기둥머리 장식, 그리고 아치형 구조를 보면, 이것이 로마 스타일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사람들을 그린 프레스코화는 아래 사진의 왼쪽 벽 위쪽에 있는데, 이 사람들이 누군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만 표지판에는 "No smoking"이라고 쓰여있다.
로마 룩소르신전의 일부
지성소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없고 알렉산더 대왕이 예배를 보던 장소라고 한다
신이 파라오에게 앙크를 걸어주며 건강과 행복의 축복을 내려주는 장면 같은데
부조가 파괴되어 상상으로만 예측을 해본다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부조가 아닐까 상상을 해본다
이곳은 신왕국 18 왕조부터 시작하여 말기 왕조, 마케도니아 시대(기원전 332~30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들이 신전을 건축하고 개축하면서 자신들의 사당과 성소를 지었다.
프톨레미 왕조 시대 이후로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면서 신전의 일부를 콥트 교회로 사용하였고,
그 후로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 모스크도 자리하게 되었다.
이집트 왕국 시대가 끝나면서 신전에 관한 관심도 멀어져 그 찬란했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람세스 2세
석상의 가슴 높이까지 모래에 덮인 채 신전은 방치되었었다.
그러던 것이 188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고 보존, 복원 작업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좌로부터 투탕카멘. 아멘호프 3세. 하트셉수트
좌로부터 넥타네보1세. 빈집 1세. 람세스 2세
제30 왕조의 넥타네보1세 [재위 서기전 360년-342년]
제21왕조 피네젬 1세 신관이자 파라오(제위 BC1070~1032)
람세스 2세는 여러 번 열거했기에 생략한다
크루즈호텔 숙소에 돌아오니 매일 다른 모습의 조형물을 만들어 놓는다
오늘은 악어모양이다 팀에 대한 보답인 듯
You Are So Beautiful / Joe Co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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