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수목원을 둘러보고 여기 공재 윤두서 고택으로 왔다(6/12)

사랑채
이 고택은 해남읍에서 약 20㎞ 거리의 백포 해변가에 있으며 인근 마을에는 해남윤 씨(海南尹氏) 가문 10여 세대가
살고 있고 전통 한옥들이 옛 마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동쪽으로 지은 문간채로 들어가 우측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 48칸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본채 13칸, 곡간채 3칸 및 사당과 헛간 등이 남아 있다. 건물의 배치는 뒤로는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고 앞으로는 남쪽이 바다로 훤히 트이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하여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당

사당에 그려진 그림


우물

안채
안채의 평면은 ㄷ자형으로 건평은 55.9평이고, 용마루까지의 높이가 약 6m로 지붕이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는데 이는 해변가의 해풍의 영향을 막고자 한 의도라고 생각된다.
ㄷ'자형 구조를 띠고 있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처리되었다

옆집인데 이 집도 범상치 않은 집인데 현재 주거공간이라 담 너머로 쳐다만 본다

장독대는 형식만 갖춘 모습이다

안채의 내림새 기와에 「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집을 크게 고친 지 약 60년
후인 신미년(1871년) 9월에 지붕을 다시 고쳤다고 나온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집은 건립 당시 48칸의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의 동쪽에 문간채가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선 우측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졌다.
그리고 대문은 2층으로 대문 앞쪽에 인공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안채 13칸과
곡간채 3칸, 그리고 사당, 헛간등이 남아있다.
한편 해남 출신의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크라운제과의 회장인 윤태현 씨가 이 마을 출신으로 윤태현 씨는 이 마을의
터를 잡은 윤덕훈의 둘째 아들 집안으로 현재 고가(집)가 마을에 있고 윤명현 씨 집안에서 당시 가장 화려하게
지었다는 사랑채를 구입하기도 해 재력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대단한 맷돌이다
맷돌만 보아도 이 집 살림규모를 알 것 같다
위짝(암돌)과 아래짝(수돌): 두 개의 커다란 둥근돌이 겹쳐져 있습니다.
원래는 가운데에 중심을 잡아주는 '맷동(중심축)'이 있고, 위짝을 회전시켜서
그 사이에 넣은 곡물을 으깨거나 가루로 만들게 된다.
구멍(맷눈): 위짝 맨 위에 보이는 구멍은 곡식(콩, 팥, 쌀 등)을 흘려 넣는 곳이다.
용도: 이 정도로 크고 묵직한 맷돌은 일반 가정집보다는 사찰(절)이나 마을 공동체,
혹은 규모가 큰 종갓집 등에서 많은 양의 곡물을 한 번에 갈 때 주로 사용되었다.

경능(徑能)(거꾸로 통능이라 읽는 사람도 있다)
능히 다스리고 경영하다. 경전을 능히 통달하다. 국가나 가정을 능히 다스리다
학문을 능히 통달 하거나 세상과 스스로를 바르게 다스리는 능력을 갖추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격조 높은 문구다

사랑채 대청마루
해남윤 씨 집안에서 공재 윤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우리에게 '자화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처음 선보였고,
사실주의 화풍을 개척했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흰 말이 노니는 '유하백마도', 봄날 산골에서 두 아낙네가
나물을 캐는 '채애도'가 익숙하다.
윤두서는 박학다식했다. 그림뿐 아니라 문학과 천문·지리·의학에도 해박한 식견을 갖췄다.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보다 150년 앞서 우리나라 지도(동국여지도, 보물 제481-3호)를 그린 이가 그였다.
집안의 노비도 해방시켰다. 윤두서는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다산의 목민철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유우청
빗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그윽하고 고요해진다

오랜만에 보는 제비집

곳간

창고(헛간)

곳간의 뒤편
윤두서의 애민정신
서민에 대한 윤두서의 애정은 지금도 녹우당에 남아 있다. 녹우당 뒤뜰에는 쌀뒤주가 서너 개 있다.
그가 살던 300년 전에도 있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서민에 대한 애정은 그들이 겪는 현실의 고통까지 직시하도록 이끌었다. 배고픈 이들을 위한 그 뒤주는
늘 열려 있었으며 춘궁기엔 항시 곡식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이 찾아와 그것을 서로 나눠 먹으며 연명했다고 전해진다.
해남의 백포만 일대에는 당시 윤두서가 개간한 넓은 간척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심한 기근이 든 1713년
기아에 허덕이는 농부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척지를 만들어 정착하게 만든 것이다.
양반들이 노비를 재물로 취급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걱정한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노비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하도록 철저히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노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스스로
실천해 나간다. 당쟁의 광풍으로 전국이 어수선한 시절에는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서민들의 채권문서를
모두 태워버리기도 했다. 빛은 잊고 생업에 집중해 달라는 격려의 뜻이었고 살길을 찾아주려는 통 큰 배려였다.
이처럼 가진 자로서.. 배운자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무언지 그는 이미 확고히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가 아닌 마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각자이자 참 지식인 같은 모습이다.
그에게 민생을 돌보는 것은 선비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그래서 실천했고 그 길을 걸은 것이다.

오래된 향나무

윤두서의 그림
시계방향으로
1. 말을 타고 가면서 봄풍경을 감상하는 순간을 그린 '주마상춘도'
바람에 날리는 잔가지를 늘어트려 속도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2. 밭 가는 풍경
전에 없던 생동감 있는 서민들의 삶을 그린 그의 그림은 금세 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3. 짚신 짜는 노인
4. 목기 깎기 (선차도)
두 농부가 회전축을 돌리면서 칼을 사용하여 함지박을 깎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배경을 생략하고
새로운 문물인 회전식 목물 깎기 기계를 부각하는 풍속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는 양반 사대부의 사회였다.
당연히 사대부 위주로 사회가 운영이 되었고
하층민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올 수 없는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막힌 사회.. 닫힌 사회였다.
그러나 공재는 과감하게 하층민들의 삶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또 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근대 미술사뿐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도 대단히 혁명적인 전환점을 만들게 된다.

윤두서의 그림
1. 유하백마도
버드나무 가지 아래 서 있는 백마의 늠름한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봄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의
흐드러진 가지 아래 백마가 한쪽 발굽을 살짝 드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 그린 그림이다.
자신이 직접 키우던 말을 버드나무에 묶어놓고 마치 사진을 찍듯 직접 대상을 보며 그린 것이다.
2. 松下讀書圖 (송하독서도)
3. 돌 깨는 석공
4. 나물 캐기(채애도)
따뜻한 봄날, 경사진 들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망태기와 칼을 들고 나물을 캐는 여인과 고개를 돌려 뒤태를 보여주는 여인이 머릿수건과 무릎까지 걷어올린
치마를 입고 있다. 양반인 저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시골 아낙네의 소박한 노동 장면을 담았다는 점에서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18세기 후반 김홍도 등에 의해 유행한 풍속화를 예시하고 있으며 윤두서의
실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돌 깨는 석공과 두 여인이 나물을 캐는 모습..... 바로 이 그림이 조선시대 회화사에 최초로 등장한 풍속화다.
이처럼 새로운 자각을 경험한 윤두서 그림의 주인공은 양반이 아니었다.
실제 현장에서 생업을 가지고 활동하는 살아 있는 인물들의 삶과 행동을 풍속화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땀 흘리며 일하는 서민을 주인공으로 부상시킨 윤두서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삶에 주목한 투철한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국보 240호 윤두서 초상화
그는 과학, 철학 등 다방면에 빼어난 업적을 남긴 팔방미인이다. 한국의 윤두서(1668~1715)가 그렇다.
그 역시 인문학, 지리학, 기하학, 의학, 천문학, 병법 등에 두루 능했다.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면서도 그림을 잘 그린 데다, ‘윤두서 자화상’이 국보
(제240호)가 되고 영화 ‘관상’의 메인타이틀이 되면서 공재 일가의 화가 이미지가 강한 듯하다.

공재고택 뒤에는 공재 9대손 크라운제과 창업자 윤태현 생가가 있다

윤태현 생가

하늘에서 본 윤철하 고택

윤철하고택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

사랑채 뒤편

별채

안채
안채 상량문에 ‘광무 10년 병오 11월 27일 경신수주 동 12월 초3일을 축신사시 상량 축 좌
(光武十年丙午 十一月二十七日 庚申竪柱 同十二月初三日乙丑辛巳時 上樑丑坐)’라 되어 있다.
광무 10년은 1906년이다. 이때 안채와 함께 사랑채 · 별당채도 다 준성 되었다고 한다

별채

뒤뜰 정원

뒤뜰에는 넓은 정원이 있다

고택은 지금 수리 중이라 어수선하고 집 앞 설명문 외에는 이렇다 할 자료나 내부를 볼 수가 없다

안채로 들어오는 별도의 문은 정면이 아니고 돌아서 들어오게 되어 있다
Here Is Your Paradise/chris de bur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