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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해남 달마산 미황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

·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성간(省侃)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이 중 미황사 응진당(美黃寺應眞堂)이 보물 제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598년 만선(萬善)이 신축하였으며, 1971년 주지 이하덕(李河德)이 일부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 등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되었으며, 1982년의 수리 때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

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이 밖에 절 뒷산 사자봉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달마상









                                          남쪽이라서인지 매화도 활짝 피어있다






                                                                         부도전에 있는 스님의 비문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미황사(美黃寺)의 내력을 기록한 비문이다. 미황사가 725년에 한 배가 산 밑의 포구에 닿아 살펴보니 그 안에 화엄경 등의 경전과 불화가 들어 있었는데 이를 발견한 의조화상의 꿈에 소가 경전을 싣고 가다 누웠던 두 곳에 각각 통교사와 미황사를 세웠고, 미황사의 이름도 거기에서 연유하였음을 밝혔다. 이어 중국에 불교를 처음 전한 가섭마 등과 축법란의 사유와 송대 문인의 불교와의 관계를 간단히 서술하였다. 숙종 18년(1692년)에 민암(閔黯)이 짓고 낭선군(朗善君)이 썼다. 비의 상태가 마모가 심해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후면은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전면의 탁본이 한국금석문대계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국 전라도 영암군(靈巖郡)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 시적비명(事迹碑銘)과 서(序)

 

 

숭정대부(崇政大夫)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겸 지경연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知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민암(閔黯)

장유(長孺) 지음

현록대부(顯祿大夫)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관부도총관(五衛都摠官府都摠管) 이우(李俁)

쓰고 아울러 전액을 씀

 

내가 불교의 책을 읽다가 『화엄경(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감탄하기를 “아아. 우리 동방의 정토(淨土)의 사업이 대개 그윽히 합치되는 것이 있었던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화엄경에서 금강산에 상주한다고 하는 보살, 곧 법기(法起)보살)이 1만 2천 반야에 자리한 몸이 이와 같고, 달에 강물에 비치고 53개 철종(鐵鐘)의 자취가 또한 이와 같다. 금강산이 산이 이루어진 것이 장엄겁(莊嚴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과거) 성수겁(星宿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미래) 사이였으니 인간과 새와 더불어 수미산(須彌山,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앙에 높이 솟은 산으로 그 둘레에 4대주가 있는데 인간은 그중 남방 염부제(남섬부주)에 산다고 함)과 같아서 무상의 깨달음의 경지가 된 것이 그 영험을 나타낸 것이다. 마땅히 그 밝은 옥이 크게 빛나도다.”라고 하였다.

호남의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의 창건 사적은 어찌 그리 기이한가. 당(唐)나라 개원(開元) 13년 을축년(신라 성덕왕 22, 725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8년(749년) 8월 12일에 갑자기 한 석선(石船)이 산 밑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와서 닿았는데 하늘과 같은 범패소리가 뱃속에서 나기 시작하여 어부들이 정박시키려고 살펴 보았더니 배가 갑자기 멀어져버렸다. 의조(義照) 화상(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과 장선(張善) 두 사미(沙彌)와 함께 촌주(村主, 지방을 다스리는 책임자) 우감(于甘)에게 이르러 향도(香徒, 향을 매개로 이루어진 불교의 신앙 공동체.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재물을 내서 불상을 만들거나 향을 묻거나 하는 등의 불사를 함) 1백인과 같이 가서 목욕 재계하고 경건하게 빌었더니 석선이 다시 해안에 이르렀다. 주조한 금인(金人, 금으로 만든 불상) 한 구(軀)가 노를 잡고 서 있고 수놓은 돛이 날리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가운데에 금으로 만든 함(函)이 있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옥축(玉軸)의 금으로 쓴 『화엄경』(華嚴經, 불법의 이치를 방대한 구성으로 설하여 보살도의 수행을 역설한 경전) 80권과 『법화경』(法華經, 대승의 신앙과 공덕을 설한 경전) 7권과 비로자나(毘盧遮那) 문수(文殊) 보현(普賢) 40성중(聖衆) 53선지식(善知識) 16나한(羅漢) 등의 탱화가 있고 또 금고리와 검은 돌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향도 등이 경을 가지고 해안에 내려와 봉안할 곳을 의논하였더니 검은돌이 갈라지며 검푸른 암소 한 마리가 생겨나더니 얼마 안 있어 장대해졌다. 이날 저녁 금인이 화상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于闐國, 중앙아시아 호탄)의 왕입니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경전과 불상을 안치할 곳을 찾았는데 산 꼭대기를 보니 1만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있어 이런 까닭에 여기에 왔습니다. 경전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 경전을 봉안할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에 경전을 소에 싣고 가는데 처음에 한곳의 땅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크게 소리쳐 “좋도다” 하고는 넘어져 죽어버렸다. 처음 누웠던 땅에 한 절을 세우니 지금의 통교사(通敎寺)가 이것이요, 뒤에 누웠던 골짜기에 한 절을 세워 경전과 불화를 봉안하고 이름하여 미황사라 하니 ‘미(美)’자는 소의 소리에서 따온 것이요 ‘황(黃)’자는 금인(金人)의 빛깔에서 따온 것이다.

아아 기이하도다. 세상에서 신산(神山)이라 것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달마산(達摩山)은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지맥으로 본래 좋은 경치가 많고 신성한 행적과 신령한 자취의 내응이 많다. 그때의 돌소[石牛]와 금사람[金人]의 일은 황홀하고 아득하여 세상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연대를 고증하는데 여덟 글자로 타개해야만 하겠는가. 또한 경전과 금불상 불화 등의 물건은 예부터 그대로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제불(諸佛)이 세상에 나오심은 모두 하나의 큰 일[一大事]이라 하는데 일대사라는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에 집착하는 것이 어찌 스스로 공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며 도중에 와서 뿔이 된 것이 어찌 설산의 회상에서 온 것이겠는가. 이는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과 함께 후한 명제 때인 서기 67년에 중국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는 사람)과 축법란(竺法蘭)이 말에 실어온 고사를 본딴 것일 뿐이다. 금신(金神)이 꿈에 감응한 것은 또한 아난(阿難, 석가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석가를 항상 시종했던 수제자)이 가르침의 바다를 널리 편 유의(遺意)가 있다. 지원(至元) 연간(1264~1293년)에 이르러 만송[南宋]의 현달한 관리와 군자(君子)들이 멀리 바라보며 생각을 치달려 그림으로 그려내게 하니 이를 없앤다면 총림에서 기를 토하게 할만한 것이다. 이를 모두 비석에 새겨 영원히 나타낼 만하다. 나는 장천각(張天覺, 송의 문인 장상영(張商英))의 도리와 백향산(白香山,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호가 향산)의 문필을 모두 업신여기나 상인께서 멀리서 온 뜻을 중히 여겨 그가 말한 바에 따라 말을 잇고 또한 사물에 따르고 사물을 빈 데서 감응을 얻은 뜻을 말할 뿐이다. 명에 이른다.

 

돌이냐 소냐 불가사의하도다

금이냐 사람이냐 알 수 없도다

정신은 모나지 않고 교화는 무궁하도다. 아아.

 

숭정기원후 65년 임신(숙종 18, 1692년) 9월 일 비를 세움.

두인(杜忍)

 

靈巖 美黃寺事蹟碑

 

美黃寺碑碑(篆 題) 

有明朝鮮國全羅道靈巖郡達摩山美黃寺事迹碑銘幷 序

      崇政大夫行兵曹判書兼知  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

      子左賓客閔黯長孺撰

      顯祿大夫朗善君兼五衞都摠官府都摠管俁書幷篆

 

余讀西方書至華嚴經諸菩薩住處品未甞不掩卷而嘆曰异哉我東方淨土之業盖亦有冥契者存曇無竭之據一萬二千般若」

之軀者如此月氏之印五十三鐵鐘之迹者又如此夫金剛之爲山也見在於莊嚴星宿之間與人鳥須彌同爲無上菩提之境則」

其表靈也宜其炳琅而光大也乃者湖南達摩山美黃寺之剏跡抑何奇之甚也有唐開元十三年乙丑新羅景德王八年八月十」

二日忽有一石舡來泊于山底獅子浦口天樣梵唄之聲迭發於船中漁人欲迫而察之則舡輒遠義照和尙聞之與張雲張善二」

沙彌曁村主于甘香徒一百人同往齋 沐虔禱石船乃至岸鑄成金人一軀執櫓而立張以繡帆就而觀之其中有金凾具鎻鑰盛」

以玉軸金字華 嚴經八十縛法華經七縛毘盧遮那文殊普賢四十聖衆五十三善知議十六羅漢等畵幀又有金環黑石各一枚」

香徒等齋經下岸方議奉安之地黑石卽拆而生靑黑挬牛一頭倐忽長大是夕金人入和尙夢曰我本于闐國王也遍歷諸國求」

安經像望見山頂有一萬佛現相茲故來此爾宜駄經以牛牛臥不起處能卽安經之所也和尙乃以經載牛而行初臥一壤而復起」

至山峽而復臥大吼曰美因而斃焉初臥之壤剏一蘭若今通敎寺是也後臥之峽營一刹以安聖經及神幀顔之曰美黃美取牛」

之聲也黃取人之色也奇乎异哉世稱神山輒歸之三韓達摩以方丈之枝素饒眞境故有此聖迹靈踪之來應焉當時石牛金人」

事悅惚窅茫非世耳之所可剽者而年代考證下啻八字打開且貝葉金軀幀像等物故宛然也窃念諸佛出興皆爲一大事所謂」

一大事不外乎方便今茲塊然者豈自生公點頭中來而角者豈從雪山會上仍倣騰蘭駄來故事也耶金神之夢感者亦有阿難」

流通敎海之遺意焉至於至元間南宋之達官君子望風馳想致令圖寫而去則亦足爲叢林吐氣此俱可以書諸貞珉標之永永」

者也余於張天覺之理白香山之筆皆蔑蔑如而重上人遠來之意因其所述而詮次之又有感於循物假物之義云爾銘曰石耶牛耶不可思  金耶人耶不可知  神無方而化無涯嘻噫

崇禎紀元後六十五年壬申九月 日立碑杜忍

                                                     부도전이 꽤나 크다

                                              이렇데 여기저기 흩어진 부도들


                                      땔감을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참 잘도 쌓아놨다


                             여기저기 동백림이 많다 강진 백련사에도 이렇게 큰 동백나무가 많던데

                                               목령도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것 같다


                                           미황사에서 바라본 달마산

                                      만세루 같기도하고 저렇게 써놓으면 우리같은 무식쟁이는 알길이 없다

                                                    일주문에서 바라본 달마산의 모습

                                                    달마산 일주문 옆의 동백나무 숲


                           사천왕문에 왜 사천왕이 없나 했더니 아래와 같은 문구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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