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성의 입구인 슈레이몬입니다. 일본의 전통 의상들을 입고 입구에서 사진 찍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곳이다. 행정공간과 제사공간, 국왕과 가족이 지낸 거주공간으로 구분된다. 관광객들에 공개된 행정
공간에는 우나라고 불리는 광장을 중심으로 정전과 남전, 번소, 북전, 쇼인이 위치한다. 선명한 주홍색
바탕에 곳곳에 금박 장식을 덧댄 정전의 단파풍 장식이 매우 화려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장식과 기둥,
처마를 휘감는 33마리의 황금용과 사자 문양은 찬란했던 류큐 왕국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낸다.
슈레이(守禮)는 예절을 지킨다는 의미로 문에 걸려있는 편각에는류큐는 예절을 중요시하는 나라이다
의미의 글이 적혀있다 16세기 중순에 건립되어 193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지만 오키나와 전쟁때
소실되어 1985년 복원되었다
한편 오키나와는 아시아나항공, 피치항공, 티웨이항공, 진에어, 제주항공 등 다양한 항공사들이
직항 노선을 운항하고 있어 쉽게 떠날 수 있다. 땡처리닷컴을 이용하면 다양한 오키나와의
인기 호텔과 항공권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예약 가능하다.
슈리 성은 류큐 왕국의 성으로,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이다.
슈리 성을 둘러싼 성벽은 중국과 일본의 축성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우아한 곡선 형태를 띄고 있다.
성벽 안쪽에는 많은 건축물이 세워져 있고 정원석의 배치 기술은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성은 13세기 말부터 14세기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철거지는 류큐 대학의 캠퍼스로 이용되었으며 1980년부터 시작된 복원 계획에 의해
과거의 위용을 다시 찾았다.
2000년 12월에는 구스쿠 유적 및 류큐국 유적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복원된 건물이 아닌 건물이 세워져 있던 슈리 성터가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선명한 주홍색을 띈 성의 모습은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전하고 있으며,
오키나와의 심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원주민 중에는 아직 류큐왕국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이들이 많다. 슈리성은 국왕의 거성으로,
류큐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곳이다. 오키나와 전쟁 때 소실됐다가 1992년 ‘오키나와 본토 복귀
20주년’을 기념해 복원됐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힌 슈리성의 외관은 일본보다는 중국의 건축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슈리성 주변에는
슈레이문, 소노한우타키이시문, 왕능(타마우도운), 류탄(인공연못), 베아이텐도우와 엔간치 등 문화재들이
많아 산책코스로 애용되고있다
류큐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석문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노한우다카이 시몬의
석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는채로 왼쪽에 자리잡고있다
슈리성은 류큐왕좌의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지로 적군들을 막는 목적이기 보다는 정치와 의식을
목적으로 완성된 성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슈리성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공원을 조성함으로
이제는 오키나와 방문시 꼭 한번 들려봐야 하는 관광지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환회문은 슈리성 정문 중국황제의 세자 책봉사등 방문하는사람에게환영의 뜻을 담아 이름이 붙여젔습니다
성문을 들어서니 문지기가 연신 손을 흔들며 웃음가득 반가이 맞이해준다
슈리성은 기존의 일본 건축양식이 아닌 중국의 남방 문화권 건축양식이 적용이 되었기
때문에 오사카를 대표하는 오사카성, 마쓰에의 마쓰에성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서천문은 훌륭한 경사스런 샘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의 앞에있는 용수 유히에 연유하여 이름이 붙여젔다
류히 서천문 바로 앞에있는 용수 국왕 일족의 중요한 식수로 책봉사가 방문 했을 때에는
숙소인 천사관까지배달되었답니다
누각문 성루안의 물시계로 시각을 잰것으로 이름이 붙여진문 아래설명참조
아래설명참조
환회문 서천문 누각문 광복문 봉신문을 거처야 비로소 슈리성 정전에 도달하게된다
슈리성 왕의 집무실 정전은 수리중이라서 먼발치로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와는 치미의 형태가 다른 용의 형상을하고 있다
류큐왕조의 마지막왕인 쇼타이 왕이 앉은의자
쇼타이왕의 왕관 (의자와 관은 재현한 모조품임)
류쿠왕국의 황실 행사 재현모습(위사진들은 들어갈 수가 없어 빌려온사진임)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300천명의 조총병으로 류큐왕조를 침략하여슈리성을 점령하고 도쿠가와 막부의
실질적인 통치를 받고류큐왕조의 마지막왕인 쇼타이 왕을 몰아내고 오키나와 현을 수립하므로
류큐왕조는 멸망하고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로 영속되었다
서쪽 아자나
성곽의 서쪽에 만들어진 전망대 여기에서는 나하항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수리성내를 비롯해
나하 시가지나 케리마 제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서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나하시풍경들
오키나와를 찾는 목적이 ‘역사’ 때문이라면 슈리성을 찾아야 한다. 오키나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류큐’라는
별개의 왕국이었다. 한국에는 경복궁, 중국에는 자금성이 있듯이 류큐 왕국에는 슈리성이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19세기 말 류큐 왕국은 고유 언어마저 말살당한 채 제국주의를 표방한 일본에 굴복하고 만다. 특히 일본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를 방패막이로 삼았으며 3개월간 무차별 폭격을 방치했다
. 그때 슈리성 대부분이 파괴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종전 후 오키나와는 미군 통치령으로
전환되었으며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가 1972년 다시 일본에 반환되었다.
이 때문인지 본섬에서는 반일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사드 배치 등 아베 정부의 군사기지화 방침을
적극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끔찍했던 전쟁의 상흔이 아직 오키나와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빠나나꽃도 피어있습니다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것은 1945년 4월1일이다.
미군은 파죽지세였고
오키나와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들은
“미군에게 큰 고통을 받다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강간을 당할 것이다
차라리
“천황의 명을 따라 깨끗이 최후를 마쳐라”고
자살을 종용했고
수류탄도 쥐어주었다
석달간의 처절한 전쟁 중에
요미탄촌 주민들은 산속 깊은 동굴에서 서로를 죽여대고 있었다
이미 아비규환으로 변한 뒤였다.
1살짜리 갓난아이도
청소년들도
아내도
모두 가장이 죽이고
서로 죽이는 피의 살생이었다고
이러한 역사적 비극을 몸으로 체험한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 전쟁’으로 숨진 오키나와인은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은
군대가 주민들을 버렸고, 투항도 허락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대안이 없었고 그렇기에 죽음으로 내몰렸다.
“일본과 천황은 오키나와를 버렸기 때문에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반대하고
히노마루를 태우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일본인의 잔악상이 어떻했는지 짐작이간다
Es war doch alles nur ein Traum - Monika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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