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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격포 젓갈시장과 내소사

성묘와 드라이브 그리고 또하나의 목적은 김장용 젓갈을 사는것이다 처음 생각은 곰소항으로 가기로 했으나

여기에 잣갈 할인점이 있으니 들어가 보잔다

 

 

액젓도 건어물도 가득 그리고 젓갈 맛보고 막걸리도 한잔씩 마시라고 써비스가 대단하다

보기만해도 유혹하는 젓갈들 하나하나 맛을보는데 정말 맛있다  물을 얼마나 마셔야 될지

다음은 생각도 아니한다

1등품은 kg당 2만 오천원 저기 큰통에 12만 오천원 작년에 비해 엄청 올랐네 옆지기는 열심히 흥정을하고

 나는 구경만한다 어차피 내가  돈낼것도 아닌데 옆에서 잔소리 해봐야 싸움만 될테니까

뚝딱  2십 오만원 내가 쓰는 경비하고 얼추 맞아 떨어지겠네 ㅎㅎㅎ

오늘은 빠트리고 가는 것 없나 확인해본다 어제 예초기 사고 계산하고는 그냥출발

한참 달리다 아차 생각해보니 그냥왔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산소에도착 생각했으면

어쩔 뻔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내소사에 도착하니 많은 차와 인파가 몰려 교통정리 한다고 수고들이 많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무왕 34)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靑旻)이 대웅보전을 지어 중건하였고,

                   1604년(인조 18)청영(淸映)이 설선당과 요사를 지었다.

                   1902년관해(觀海)가 수축한 뒤 1983년 일주문을 세우고 198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으며, 1986년

                   천왕문을 짓고 설선당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1987년 봉래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8년 요사인

                   진화사(眞華舍)를 건립하였다. 1995년 수각(水閣)과 종각을 짓고 범종을 조성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하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현존하는 당우 및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괘불 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요사채, 설선당(說禪堂)·보종각(寶鐘閣)·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 1)에 완공되었는데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 중기의

                   대표작이다.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법당 내부의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등의 그림도 일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 하고,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그때의 일화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동종은

                   1222년(고종 9)변산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든 종인데, 1850년 땅속에서 발굴된 뒤 이 절로 옮겨졌다.

                   그리고 법화경절본사경은 조선 초기에 이씨 부인이 망부(亡夫)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한 글자를 쓰고

                   한 번 절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필사한 것이다.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설선당은 인조 때 승려의

                   수학 장소로 건축되었고, 봉래루는 1414년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하였으며, 현재 산문(山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입구의 지장암(地藏庵)과 절 후방 1.5㎞ 지점에 청련암(靑蓮庵)이 있다. 절 일원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도에는 하얀 상사화가 한창이라 던데 여기는 노란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는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인증도 해보고

항상 올때마다 생각하는게 언젠가 오후에 늦게 옆지기와 이길을 걸을때 송진냄새가 은은하게

참으로 감미로웠는데 그다음부터는 한번도 그내음을 맏은적이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하늘로 곧게 치솟은 전나무들이 길을 연다. 누구나 쉬이 들어설 수 있는 평평한 길이고,

 쭉 뻗은 듯하면서 시나브로 슬쩍 굽이지는 길이다. 숲 그늘은 적당히 맑고 길에는 군데군데

빛이 웅덩이져 있다. 전나무 숲이 형성된 시기와 이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아마 400여 년 전 내소사를 중건할 때 이 숲도 함께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길은 약 600m 이어진다

상사화군락지가 조성되고 있으니 머잔아 온통 노란 상사화가 용천사나 선운사의

꽃무릇 처럼 유명세를 탈 날도 머잖아겠지

 

 

 

대장금을 촬영했다는 연못에는 딱 세송이의 노란 수련이 피어있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니 이번에는 단풍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내소사의 유래

내소사(來蘇寺)는 진서면 석포리 능가산(관음봉, 424m) 가선봉 기슭에 기대 있다.

 내소사를 ‘능가산 내소사’라고 부르는 까닭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변산을 일러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고 한 기록 탓이다.

내소사(來蘇寺)는 1363년 전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다 했으나 지금은 소소래사인

 내소사만 남아 있다. 내소사가 과거에 ‘소래사(蘇來寺)’였다는 증거는 성종 17년(1486)에

 간행된동국여지승람과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의 기록, 고려 인종 때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실린 정지상(鄭知常)의 시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다만 언제부터 소래사를 내소사로 불렀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작년에 들렸을때 찍었든 사천왕상 푸라스틱이라고 목조로 다시 만든다는데

 재료가 뭐가 그리 중요한지 많은 돈을 또 투자 하려는지?

사천왕상을 지금은 가림막으로 가려놨다

 

보호수 느티나무

약천년의 수령을 가지고 있다 높이 20m 둘레 7.5m

 

 

 

봉래루

내소사 봉래루는 1414년(태종 14년)에 건립되어 올해로 정확히 601살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불교의 탄압기라고 배웠죠. 이 누각도 양반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보전까지

진입하여 예불을 올리는 행위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웅보전 앞마당 면과 거의 일치하게 설계가 된 것이래요.

                                          원래는 누각을 통과할 때는 어른의 키가 닿을 정도의 높이였는데요. 몇 년 전에 1층

                                                      기둥을 높이는 공사를 해서 지금의 높이가 됐다는군요. ^^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은 1987년 우암혜산 스님이 복원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2층 누각 맞배지붕으로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여 원주를

세우고 그 위에 널마루를 깔아서 누각을 올린 형태입니다.

 

지금은 봉래루를 개방해 일반인들의 휴식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823년에는 만세루라는 이름으로 중건된 되었다가 이후에 봉래루라는 별칭으로

 부르다가 1926년 완전히 정착된 듯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님들과 신도들의 수행공간 설선당

내소사 중정에 있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1640년(인조 18)에

청민대사(靑旻大師)가 승려와 일반신도들의 수학정진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배치는 전면 중앙의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둔

회자형(回字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전면에서 보면 설선당이 좌측 건물 옆에 이어 지은 듯하고,

 우측은 요사와 연결된 건물이 설선당과 마치 합각을 이룬 모습이다. 안마당에는 우물이 설치되어 있다.

 설선당은 112㎡(34평) 규모로 중앙에 우물천장을 배치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건물 동쪽의 측면 한 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 거대한 아궁이가 시설되어 있다. 주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설치하였다.

내소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조선 인조11년(1633)에 청민(淸旻)선사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지으면서 중건하고, 그 후 고종 2년(1865)에 관해선사(觀海禪師)가 중수, 만허선사(萬虛禪師)가 보수했다.

그 뒤 숨가쁘게 1983년 혜산우암선사(慧山愚岩禪師)가 중창하여 현재의 구성과 규모를 가지게 됐다.

 내소사에 딸린 암자에는 청련암(淸蓮庵), 지장암(地藏庵)이 산의 가파른 면에 마치 불상처럼 자리잡고 있다.

 

대웅보전 안엔 석가불좌상을 가운데로 모시고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돼 있다.

 여기엔 불화가 3점 있는데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그리고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석가불좌상 뒤 벽에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다.

 이 벽화는 황금빛 날개를 가진 관음조가 그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대웅보전에는 못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고풍스럽게 보이지만 단청을 안하면

수명이 어찌 될지 걱정도 된다


대웅보전에는 관음조가 단청을 그렸다는 전설과 함께 또다른 승전설화가 있다.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재건코자 목수를 불렀다. 3년동안 말한마디 없이 나무만 깍는

 이 목수를 탐탁찮게 여긴 사미승이 목수의 나무토막을 하나 숨켰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목수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니 절을 지을 수 없다 했지만 청민선사의 간곡한 사정에

못이겨 부정 탄 사미승의 나무토막은 뺀 채 건물을 지었다. 지금도 법당 오른쪽 윗부분

목침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빈 채로 있다. 아깝게도 나는 못보았다

 

 

내소사하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떠 올리는 것은 대웅보전의 문살이다. 문살을 깍은 목공의 솜씨나

시간이 씻어낸 나무결의 흔적이 걸작이다. 대웅보전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돼 있는데

각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의 꽃무늬 문살이 있다. 당연하게도 각 창호마다

그 모양이 다른데 그 하나하나 아름다움의 우열을 가리고자 한다면 백겁의 시간도 모자랄 판이다.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지워진 채색, 그리고 드러난 나무결. 이 모든 것이 전설속 목공의 철저한

 계획이고 설계이려니 싶을 만큼 대웅보전의 낡음, 그 시간의 흔적은 아름다웠다.

부안 독립신문에서

 

 

 

조사전은 큰스님들의 영정을 모신곳

 

 

 

 

 

지장전(殿),명부전(殿),시왕전(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열 분의 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시왕중 제1 진광 대왕, 제2 초강 대왕, 제3 송제 대왕, 제4 오관 대왕, 제5 염라 대왕,

 제6 변성 대왕, 제7 태산 대왕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각 7대왕이

심판을 맡으며 그 뒤 백일에는 제8 평등 대왕, 소상 때는 제9 도시 대왕, 대상 때는 제10 오도전륜

 대왕이 차례로 생전에 지은 선업과 악업 등 잘잘못을 심판한다고 한다. 명부 시왕을

모신 주좌()에 지장 보살을 모시는 일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지장전이라는 이름 대신 명부전,

시왕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예가 많다. 명부전(殿)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殿)이라고 하며,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기 때문에 시왕전(殿)이라고도 한다

 

큰스님의 처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소사 진화사(眞華舍) -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寮舍)로 쓰는 건물로 1988년에 지었습니다

 

 삼성각은 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칠성각(七星閣)이 있으며, 대개 삼성각에 삼신을 같이 모신다.

독성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독각(獨覺)을 모신 곳이다. 독각은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자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교학에서 독각은 타인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좋은 의미의 독각이다. 산신각은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산신을 모신 곳이다.

 칠성각은 북두칠성에 축원하는 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여 북두칠성을 불교의 여래로 조화하여 모신 곳이다.

따라서 삼성각은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 또는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빚어진 변용이다.

이런 식의 변용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흔히 목격되는데, 이질적인 신앙을 불교로 포용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유도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으나, 자칫 기복 위주의 주술적 신앙으로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우려와 폐단도 있다. 실제 그러한 폐단이 있었음은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시론)에서 무속적인 산신과 칠성을

 제거하고 석가모니불만을 봉안할 것을 주장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옆지기도 한번 담아본다 천방지축 혼자 날뛰는 나에비해 관절이 안좋아 따라다니기 힘들어 오늘도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미안해 자기야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면서 숙소가 아닐까?

 

내소사(來蘇寺): 설선당(說禪堂)요사

 

내소사 중정에 있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1640년(인조 18)에 청민대사(靑旻大師)가

승려와 일반신도들의 수학정진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배치는 전면 중앙의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둔 회자형(回字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전면에서 보면 설선당이 좌측 건물 옆에 이어 지은 듯하고, 우측은 요사와 연결된 건물이 설선당과

마치 합각을 이룬 모습이다. 안마당에는 우물이 설치되어 있다.

템플스테이

내소사 벽안당(碧眼堂) - 아마 벽을 보고 참선한다는 의미로 지은 건물이 아닌가 합니다

               벽안당에서 참선하는스님들의 숙소가 아닐까?

정말 오래된 단풍나무이다

내소사 보리수나무

관음봉 오래전에 직소폭포에서 저봉우리를 거처 내소사로 내려온 일이있다

벽오동 나무 같아요

 

 

내소사 부도전

대장금 촬영지

많은 인파들이 찾아온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게 실감난다

내소사 입구의 당산나무들

 

 

둘이서 간단히 산채 비빔밥으로 점심도 때우고 이제 장인어른 산소로 이동을 할것이

이런 수련도 보고

바늘꽃도 접하고

산소에 다녀오며 강천사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거리의 메타스쿼이아 숲길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