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7시30분에 5호선 송정역 앞에서 강화행 3000번 뻐스를 타고 강화로 출발 강화터미날에서 아침을 먹고
701-1버스를 갈아타고 마니산 입구에 내리니 11시입니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 빨리 움직이는데 친구는 세월아 내월하 하세월입니다
토요일이라서 인지 등산객들이 많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계단로와 단군로가 있는데 계단로는 2.2km 단군로는2.9km 우리는 계단로를 선택합니다
앗 초입에서부터 급경사 계단 오를때 무릎이 아픈 나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아직도 한번도 못가 본 첨성단 꼭 가고 싶은데 난간을 잡고 오르는데 심히 아프지는 않아서
쉬엄쉬엄 오르는데 친구는 참으로 잘도 올라갑니다
올라가며 강화평야도 담아보고 스모크로 보이지는 않지만 석모도 쪽도 바라봅니다
90분 걸린다는데 우리는 딱 60분에 올랐습니다 사진으로만 봤던 첨성단을 이제야 접수합니다
올라가지 말라니까 더이상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떰으로 옷이 젖기는 했지만 그리 쌀쌀한 날씨는 아니라서 바람막이는 필요치가 않네요
여기까지 왔으니 인증은 해야지요 겨우 사람들을 피해서 한장을 남겨봅니다
마니산은 우리민족의 단군성지 이기도 하며 마니산 첨성단은 매년 개천절과 전국체전이 열리는 때면 정상에서 채화된
성화로 우린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하늘에 고하고 땅에 알리는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마니산 정상에 서 사진 찍는 것도 줄을 서서 기두려야 되기에 그냥 표지목만 잠시 교대하는 사이에
한장 찍어봅니다
저앞에 보이는 섬이 석모도 해명산과 낙가산이 있고 보문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니산 정상에서 첨성단을 담아봅니다 소사나무가 우람하게보입니다
내려오는 길은 단군로를 택했는데 한시간이 걸리며 중턱까지는 길도 험합니다
계단로로 오르고 내리는게 빠르고 안전 합니다 그래도 3시간 반이 걸린다는데
우리는 2시간만에 내려왔습니다
일주일에 4일을 산행을 했더니 그나마 운동화 신고 다리가 아픕니다
그냥가자니 다음에 오기 어렵다고 전등사에 들리자는 친구 말대로
전등사로 출발 합니다
전등사로 가는길에 길가에 어린이들의 바람개비 조형물이 있는데 우리도 저런때가 있었지만
참귀여운 모습입니다
서울에살던 40여년전부터 와보고 싶었든 전등사 이제야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역사문화 축제가 열린다니 때를 잘 맞추어 왔다는 생각이듭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라고 했으나 1282년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불렀다고 한다.
1605, 1614년에 일어난 화재로 건물들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재건하기 시작해 1621년 2월 완성되었다. 1707년
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인 취향당을 지었으며,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BR>경내에는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다.
[Daum백과] 전등사 –
전등사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시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시인 고은도 전등사의 괴상을 보고 '전등사'란 시를 하나 지었는데
전등사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예산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은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 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도편수가 여인에게 가졌던 증오와 원한 보다는 무거운 대웅전의 들보 받치고 있어야 하는 억겁의 고통을 통해
매일 대웅전 바깥에서 염불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라는
도편수의 변함없는 사랑의 징표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분홍아줌마 글에서
강화국악 한마당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등사 향로전
향로전은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다.
전등사는 사찬왕상이 없고 이대조루를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법당으로 통한다
전등사 대조루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사용되고 있다.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다.
전등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좌상(傳登寺 大雄殿 木造三尊佛坐像)
현재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삼존불좌상은 중앙에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결한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한 삼세불(三世佛)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본존 좌측 약사불의 경우 현재 손에 약합(藥盒)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양손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어 주목되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수인(手印)을 좌우대칭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치구도인 것이다.
이 목조삼존불좌상은 대정5년(1916)에 제작된 후불탱화와 양식적 특징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19세기말~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대웅보전의 탱화
도편수의 전설이 얽힌 여인의 형상을 좌우에 배치했네요 그위에 국화화분까지
사물놀이패의 마지막공연으로 국악 한마당은 끝을 맺습니다
조금 일찍 왔으면 공연을 더 봉 수 있었는데 ~~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도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공교롭게도 여기서 부산 한동네 사는 분을 만났네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종해루
강화도 버스터미날 부근 시장에서 밴댕이 3종셋트로 소주한잔 하고 서울로와 저녁8시30분 차로 부산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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