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에서 내려와 청마 문학관으로 향한다
청마문학관 은 통영 출신이면서 한국 시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청마 유치환(1908~1967)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학관과 생가를 복원해 망일봉 기슭에 개관하였다. 전시관 내부는 청마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 청마의 작품세계 청마가 사용하던 유품들과 쳥마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마의 유품 100여점과 각종 문헌자료 350여점이 전시돼 있다.
첨마는 거제에서낳아 두살까지 살았고 통영은 그가 자란곳이다
파도/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 .
이영도라는 통영여중의 가사선생을 향한 겉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로
써내려간 많은 시중에 하나
연인(戀人) - 이 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유치환과 이영도가 처음 만날 당시 유치환은 38세의 기혼자로 통영여중 국어교사였고,
이영도는 30세로 같은 학교의 가사교사였다. 이영도는 21세에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되어
딸 하나를 키우며 오직 시를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영도는 시인이자 미인이어서 많은 남성들의 선망을 받고 있었다.이영도는 당시 통영으로
시집 온, 그녀의 언니집에 머물고 있었다. 문학적 재능과 미모를 갖춘 그녀는 처음에는
수예점을 운영하다 광복되던 해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유치환은 만주로 떠돌다 광복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되었다.
유치환은 이영도보다 여덟살이 많은 38세의 유부남이었다. 이영도는 워낙 재색이 뛰어나고
행실이 조신했기에 누구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통영여중 교사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에게 유치환은 1946년 어느 날부터 거의 매일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을 움직여 이들의 사랑은 시작됐다.
하지만 유치환은 처자식이 있는 몸이어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이들의 20여 년에 걸친 사랑은 당대 젊은이들에게 전설 같이 다가갔다.
유치환은 1967년 2월 13일 교통사고로 급작스럽게 사망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편지를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유치환은 매일 새벽에 일기를 적듯 이영도를
향한 마음을 편지로 썼다. 그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운명할때까지 20여년동안
5000여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운! 어찌하여 내가 운을 이렇게까지 그리워하는지를 알고 싶습니까? 말하리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을 당신에게서 보아낸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당신도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죄다 느끼는 때문입니다.
일호의 무리도 있을 수 없는 지순한 공명(共鳴)입니다.
나의 귀한 운! 죽어도 운 곁에 묻히고 싶다고 어느 날인가 내가 하소연했습니다.
내가 만약 정신-영혼-의 귀의를 운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들 어찌 현실의 생명을 떠난
후에까지도 이런 소망을 가지리까
ㅡ 깃발 ㅡ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標)ㅅ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 유치환 선생이 외가인 거제에서 출생 2살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문학관에서 오른쪽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초가집으로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원래 청마 생가는 통영시 태평동 이지만 생가 부지에 복원의 어려움이 있어 지금의 위치에
생가 및 문학관을 개관했다고 한다. 생가가 본래의 자리에 복원되지 못했음은 아쉬움이다.
아버지께서 약방을하며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나보다
생가는 약방 안방 부엌 마루 등을 갖춘 본채와 사랑방 광 측간으로 이루어진 아래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치환은 1908년 한의(韓醫)였던 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별/유치환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에
너도 말없고 나도 말없고
마지막 이별을 견디던 그날 밤
옆 개울물에 무심히 빛나던 별 하나!
그 별 하나이
젊음도 가고 정열도 다 간 이제
뜻않이도 또렷이
또렷이 살아나
세월은 흘러가도
머리칼은 희어가도
말끄러미 말끄러미
무덤가까지 따라올 그 별 하나!
청마유치환이 정운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시가되었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 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다 할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옆에는 드넓은 쉼터도 마련돼있다
쉼터에서 바라본 통연앞바다
유치환 생가를 돌아보고 "구름에 그린다"선생의 시집을 한권 사고
가까이 있는 이순신공원에 잠시들렸다
경남 통영시 멘데해안길 205
2008 .2. 1일부터 한산대첩기념공원이 이순신공원으로 공원명이 변경되었습니다.
망일봉 자락에 조성된 이순신공원은 아름다운 통영 바다가 펼쳐진 풍광이 아름다운
공원내에는 통영예능전수관, 정자(학익정), 잔디광장, 주차장 등이 있다.
이순신 동상 앞으로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어서 푸른 통영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을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공원에서 바라본 미륵산
저기 보이는게 통영 국제 음악당 과 금호리조트 마리나
이순신공원은 산책하기에 좋은곳이다
이순신공원과 접한 바다는 한산도 앞바다와 연결된다. 방아섬, 화도, 한산도, 오곡도,
미륵도가 감싸 안은 이 바다는 역사의 현장이고 구국의 현장이다.
이 바다는 420년 전인 1592년 음력 7월 8일 견내량에 주둔해 있던 일본 함대를 유인해
학익진을 펼치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본 주력함대를 격파한, 세계 4대 해전사에 으뜸 가는
대첩을 거둔 한산대첩의 현장이다.
잔디밭위에 아담한정자
통영 예능 전수 교육관을 끝으로 동피랑 마을로향한다
통영에는 가끔 왔지만 동피랑 마을은 처음으로 접하는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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