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공동묘지의 시작은 초량왜관 시절부터였다.
왜관에서 사망한 일인들은 시신을 고향인 대마도로 옮겨가거나 신분이 낮은 왜인들은
왜관 북쪽 소나무 숲에 공동묘지를 마련하여 매장했다.
개항 후 부산으로 모여드는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도 복병산록 등에 산재해 있었던 것을,
'풍치와 위생' 이라는 이유를 들어 1905년 아미동 산록에 공동묘지 부지를 확보하고
1906년 토목공사를 시작하여 1907년 준공한다.(묘역면적 24,090평, 분묘수 약 9천 여 기).
1909년 6월 대신동에 있던 화장장(지금의 천주교아파트 자리)도 아미동(당시 곡정)으로 옮겨온다.
이 묘지는 산상교회로부터 언덕바지 산 19번지(16, 17, 18통) 일대에 조성되었다.
공동묘지와 화장장에는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자주 열렸고, 그럴 때마다 묘지 앞에 진설해 둔
재물은 까치들의 먹이였다. 먹이가 풍부한 이곳으로 모여드는 까치떼들로 주민들은
몸살을 앓았고 이렇게 까치가 많이 날아드는 고개라고 까치고개라는 이름도 생겼다.
1957년 연일 장례행렬이 끊이지 않고 곡성과 악취를 풍기는 화장장을 당감동으로 옮긴다.
2018년3월1일
그리고 화장터는 천주교에서 구입하여 천주교아파트를 지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아미동의 산동네는 6.25동란으로 피란온 사람들이 난립하여 지은 판자촌 골목이
외양만 바꾼채 그대로 남아 있었고 빼곡히 들어앉은 집들로 초만원이였다.
더러는 반듯한 집모습을 지니고 있는 집들도 있지만 주택 사이에 삭은 이 보듯 그 모습을
드러내는 판잣집들이 60년 전 당시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한 것 같이 않게 남아 있다.
특히 좁은 계단을 따라 17통, 19통을 오르내리면 연방 쓰러질 듯한 판잣집들을 쉬
발견할 수 있는 데 묘지 위에 집을 지었기에 납골당 크기(3~7평)에 맞춤한 집들인 것이다.
일인들이 사용한 공동묘지는 오늘날도 개인에게 불하되지 않고 시유지로 존속하고 있어
일제시대 이런 시설이 지금도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근래 서구청은 묘지마을을 '비석마을'이라 이름하였다.
민병종님 글에서
부산 감천문화마을을 가파르게 오르는곳 왼쪽에 비석문화마을이란 동네가 있습니다.
감천을 몇번을 가면서도 이곳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밝고 점 점 화려해지는 산동네 감천문화마을에 비해. 덜 알려져있어 찾는이는 많치 않지만
이곳은 근대사의 큰 아픔을 격고 죽음. 슬픔의 장소로 남았던곳으로
이제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변화 하려는 곳 아미동 산19번지입니다.
'비석마을 '이라 불리는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화장터가있고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근처에 일본식 가옥도 남아있고요.
광복 당시 서둘러 돌아간 일본인들이 묘지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떠났던것이. 육이오 전쟁통에 살곳
없던 피난민들이 모이고 움막이 지어지면서 피난온 사람들로 마을이 꾸며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지을 터도. 쌓아올릴 자재도 없었기에 무덤위에 집을 짓기시작했고..
비석마을이라는 이름이 붙는것이 어찌보면 당연할 지도모릅니다
구름도 쉬어가는곳.
이곳 전망대에서는 부산항대교.부산타워.국제시장.자갈치시장.영도다리등 부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부산의 한 산동네에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을입니다.
나란히 계단식으로 비좁은 사람이 겨우 비켜 갈만한 골목에 마주한 집들이
이제는 부산의 문화 관광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석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밝은 마을로 바뀌어가고있는 아미동.
골목길에 담벼락에 축대도 되어주고 계단도 되어주고 물통 받침대도 되어주고 방바닥도 되어준.
비석과 상석들로 이곳이 공동묘지였던 사실을 알수있습니다.
물통받침대도 비석입니다
계단도 비석과 상석으로 만들어 저있습니다
마을 공동우물로 사용했던 우물이 지금은 화초에 물도주는 다른용도로 사용되고 있나봅니다
무덤에나 있어야 할 상석과 비석들이 주춧돌이 되어 작은 집이 지어져있습니다..
아미동 비석마을 동영상▶ 10:02
집집마다 비석이 없는집이 없다 묘지 하나에 집한칸 이었으니까
이렇게 페인트로 비석을 숨기기도 했다고합니다
비석 문화마을은 말 그대로 비석이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비석이 많다는 것은 공동묘지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같지 않고, 누구나 죽음을 삶의 경계선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서 기를 쓴다. 그런데 죽음을 깔고 살아가다니. 죽음이라는 음울하고도 두려운 기운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청하다니.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삶이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전쟁을 부산만큼 온몸으로 받아낸 도시는 많지 않다. 남으로, 남으로,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에게 부산은 마지막 비상구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버텨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리라.
최초의 피란민 열차는 6월 28일 500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대전에서 출발했다.
그들을 수용할 곳이 없어 처음엔 소(牛) 막사를 이용했다고 한다. 1·4후퇴 이후는 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부산 인구의 두 배가 넘는 84만 명에 이르렀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부산역 광장을 가득 메웠다.
궁여지책으로 공무원들이
나서서 주소가 적힌 천막을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 천막마저 펼칠 장소가 없어
높은 곳으로 오르다보니 소위 말하는 달동네가 만들어졌던 것이다.그렇게 생겨난 마을이
동광동, 보수동, 수정동, 문현동, 그리고 이곳, 아미동이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으랴.
부산항 개항이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사람들은 남부민동과 아미동 등의 고지대에, 일본사람들은 자갈치 시장 인근 평지에서 생활하였다. 일본인들은 아미동의 산 정상에 공동묘지를 조성하고 화장장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 이곳은 화장골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나자, 무덤이 있던 자리에 또 다른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뒤늦게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미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입에 풀칠하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마냥 한뎃잠을 잘 수 없었던 그들은 공동묘지를 터전 삼아 눌러 앉게 되었단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들은 일본인의 가족납골묘를 이용해 집을 지었다.
마땅히 집을 지을 재료를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벽은
그대로 집벽으로 활용하고, 비석과 상석으로 축대를 쌓고 계단을 만들었다. 생존이라는 급박한
상황 앞에서 무덤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납골함 위 커다란 돌덩이에 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천막을 쳤다. 그나마 평평한 바위라도 있으면 운이 좋은 편이였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으니 누추한 임시방편의 움막집도 참을 만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후의 사정이 여의치 앉자, 그곳이 평생의 터전이 되어버렸다. 묘지를 집 삼았으니, 묘지와 묘지사이의 좁은 길은 골목이 되었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겨울이면 한데나 다름이 없는 집이었다. 오죽했으면 한번만이라도 따뜻한 방에서 잠들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때의 한기가 떠오르는지, 할머니는 진저리를 쳤다.
눈만 뜨면 부둣가로, 시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헤맸지만 굶는 날이 태반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막일이라도 일거리를 얻기 위해 부두와 자갈치로 매일 오르내리며
악착같이 일을 했다. 달 보며 나가고, 달 보며 들어오던 곳.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아이들은 깨어진 비석 돌로 사방치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던, 그 모진 시간들도 세월처럼 흘러가고 집도 조금씩 변화되었다.
자갈치 시장의 생선 상자로 지어졌던 판잣집이 슬레이트나 콘크리트로 바뀌었고, 먹고 사는
일도 조금은 나아지기 시작했단다. 당시의 피란민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도 마을을 내려갔단다. 지금은 60년대에 마을로 들어온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만
150여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비석 문화마을은 아직도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고 있다. 수리를 하려고 땅을 파면
납골 항아리가 나오는 등, 근대사의 슬픔을 간직한 마을이다. 사는 일이 어려워도 무덤의
주인을 위해 아침에 밥 한 그릇을 더 떠 놓거나, 저녁에 물 한 잔 떠놓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죽은 자의 터를 빌려 사는 산 자의 도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영봉님의 글에서
때로는 이렇게 깨스통의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묘지위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비석들을모아 축대를 쌓고 집을지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듯 비석들이 삶의 현장에 자연스레 녹아있다. 가스통 받침대, 벽면, 집의 기둥, 계단 사이 사이까지, 지나가다 조금 반듯한 돌이다 싶으면 거의 다 비석이다. 가문과 가족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묘지의 주춧돌, 또 무덤 앞에 제물을 놓기 위한 넓적한 상석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시절의 표정을 이렇게 벽화로 그려놨지요
벽화를 그리고 새로 단장을 하였지만 역부족입니다 젊은사람들은 다들 떠나고
나이든분들만 간간히 살며 반 이상이 빈집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과 마을버스를이용하는 게 일반적이다.먼저 부산 지하철 1호선의 토성역에내려 6번 출구온다. 출구 방향으로 쭉 걷다가 마을 버스정류소의 부산대학교병원역에서 승차하여 산상교회역에 하차하면 된다. 산상교회 맞은편 계단에서부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시작된다. 그 계단 바로 위에는 묘지석 바로 위에 지어진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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