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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고성 상족암과 학동마을 돌담길(2/4)

일명 '쌍발이'라고도 불리는데, 수만 권의 책을 켜켜이 쌓은 듯한 수성암 절벽이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변산 반도의 채석강을 옮겨 놓은 것처럼 기묘하고도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 부근의 6km쯤에

이르는 바닷가에는 중생대 백악기(1억 4,000만∼6,500만 년 전) 무렵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과 새의

 발자국이 3,000여 개나 남아 있다. 또한 상족암 부근의 동굴 바닥에도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남아 있는데,

 마치 공룡이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형태를 보여 준다. 이 발자국 화석은 지난 1982년 경북 대학교

 양승영 교수 팀에 의해 처음 발견됐고, 그 뒤로 학계의 집중적인 연구에 힘입어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의 산지로 공인받았다.

[Daum백과] 상족암

날씨가 꽤나춥다 전에 와봤기 때문에 바로 통영에서 집으로 가려다

 이왕에 나온 거 끝까지 봉사하자 생각으로 여기까지왔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길이 데크로 참편하게 걷도록 만들어저있다

무릎이 안 좋은 옆지기에게는 딱 맞는 길이다 

청소년 수련원도 지나고

공룡박물관도 바라보며 여유롭게 전진한다

 

 

사실 공룡발자국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상족암의 층암단애입니다.

약 1억년 전에 형성된 중생대 백악기 지층은 해안을 따라 거대하게 솟았습니다.

암벽은 시루떡처럼 겹겹이 층을 이뤘습니다. 그 모습이 밥상다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족(床足)이라 불립니다

.주상절리(柱狀節理)

절리는 거의 모든 암석에 존재 하며 일반적으로 수직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용융암체가 관입되어  생성된 암맥과 암상에서는 낸각과정 중에 생성된 주상절리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표면과 수직을 이루는 절리의 세면은 서로 120도 정도의 작용을

 이루며 교차하고 지름이 약 7~8cm 에서 6m 에이르는 다각형의 주상 암체를 형성 한다 

 그 크기는 관입암체의  냉각 속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냉각 속도가 빠를 수록  주의 크기는 크다

책을 쌓아놓은듯 시루떡을 포개놓은듯 기기묘묘한 바위들

이 암벽 깊숙이 굴이 뚫려 있습니다. 굴 안은 파도에 깎여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입니다.

낙석 위험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산책을 나온 이들은 거대한 풍광에 매료돼 암벽과 굴에 다가서게 됩니다.

코끼리바위 같은 모습으로도보이고

여기저기 뚫린 굴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준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모습 제주 용머리해안을 연상하며 열심히 샷다를 눌러본다

돌들이 많은 전설을 담고 있다 태고에 선녀들이 내려와 석직기를 차려 놓고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의를

 짜던 곳이 상족굴이며 선녀들이 목욕하던 곳이 선녀탕이라 전해 오고 있으며 지금도 돌 베틀 모양의

물형과 욕탕 모양의 웅덩이가 굴안에 존재 하고 있다 그 주위에 는 촛대 바위와 병풍 바위가 있어

  절경을 더하고 있으며 관광 유람선이 통영시 사랑도 사이로 물 보라를 남해안을 가르며 지나 다니고

 눈앞에 펼쳐 지는 한려수도의 전망이 아름다워 사계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옆지기 카메라를 어찌했기에 이렇게 바위의 부속품처럼 담았을까 ㅎㅎㅎ

부안 채석강을 몇번 가보았지만 여기 상족암도 채석강 못지않은 빼어난 경치를 보여준다

 

 

 

몇번을 다녀온 사량도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섬이다

저멀리 병풍바위도 담아보고

 

유타랍토르 공룡 모형도 담으며 전망대 카페로 이동을한다

전망대 카페에서 바라본 안장도와 사량도. 부근에서는 사량도가 큰섬으로 다가온다

상섬과 옥녀봉 그리고 하섬도 진즉 다녀왔는데 이제는 옥녀봉에 구름다리도 하섬으로

연결된 다리가 생겨 지금은 하루에 상섬 하섬을 같이 등산 할 수가 있다

카페에서 간단히 토스트와 커피로 요기도하며 따뜻한 실내에서 주위를 살펴본다

어느팀인가 양지바른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도 담으며 다시 주차장으로

 

상족암 일대에는 공룡 발자국의 화석이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불려 일으킨다

 1982년 1월-2월 경북대 양송령 교수와 부산대 김 항묵 교수 등이 우리 나라 화석 분포를

연구 하기 위해 전남 광양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조사 하다 처음 발견 하였다

이곳은 미국 콜로라도 브라질 캔아다 지역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 유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상족암 일대의 공룡 발자국은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의 신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므로

 천연 기념물 제411호로 지정 보호 하고 있다  족흔수=2000여족(세계 최다)

     족흔 분포현황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일 원 지금까지 알려진 화석중 세계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산출 되고 있어 지질 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99년9월14알 공룡발자국 천년가념물411호로 지정 됨

 

상족암을 뒤로하고 우리는 고성 학동마을로 이동을한다

하천을 따라 내려오니 차와 숙박을 제공하는 학동갤러리가 나타난다.

대문을 들어서면 자동으로 음악소리가 울리고 주인이 나타난다.

 이곳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정원과 풍경들이 펼쳐진다

몇년전에 방문했을때는 댓돌위에 흰고무신만 있고 빈집 같았는데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동돌담길 11-5

고성의 학동마을은 서기 1670년경 전주최씨 선조의 꿈 속에 학(鶴)이 마을에 내려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자, 날이 밝아 그 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산수가 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므로, 명당이라 믿고 입촌, 학동이라 명명하면서 형성된 유서깊은 마을로 전해진다

현재 마을 뒤에는 수태산 줄기가, 마을 앞에는 좌이산이 솟아 있는 소위 ‘좌청룡우백호’의 지세이며

 마을 옆으로는 학림천이 흐르고 있어 전통마을의 배산임수형 입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가옥은 상당부분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기와로 개량되었으나 문화재자료 제208호 '육영재',
'최씨고가' 등 일부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어 전통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학동마을의 담장은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 두께 2~5㎝)과 황토를 결합하여

 바른층으로 쌓은 것으로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이 있으며 건물의 기단,

 후원의 돈대 등에도 담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석축을 쌓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주변 대숲과 잘 어우러져 수백년을 거슬러 고성(古城)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마을 안길의 긴 돌담길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황토빛
돌담길을 따라 걷노라면 아련한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Daum백과] 고성 학동마을 옛 담장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학동마을의 담장은 마을 뒷산인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 두께 3~7㎝)과 황토를 결합하여

바른층으로 쌓고 맨 위에는 기와나 짚 대신 구들장 판석을 얹었는데 그 모양이 갓 쓴 양반처럼 품격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마을 고유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긴 돌담은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놓은 듯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토빛 돌담길을 따라 걷노라면 아련한

 고향의 정취와 더불어 어린 시절 추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듯한 정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학림리 전주최씨 종가에 들려봅니다 전에는 박종례 할머니께서 혼자 계셨는데~~

창고 같은 이건물은 닭장으로 사용했다고합니다

 

 

 

330년 종사를 받드는 최씨 종가

마을에서 백미는 역시 대대손손 마을을 지키고 있는 후손들의 전통가옥이다.

최씨 종가는 2011년 7월 14일 경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종가에는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토담으로 쌓은 창고가 남아있다.

 수많은 제사를 지휘하던 팔순 종부 박종례 할머니는 안보이고 종손이라는 남자분이

예고 없이 들어서는 객을 거부감 없이 맞이해 주신다 할머니 안부를 물을수가 없다

객지에서 사시다가 들어오신지 얼마 안된다고 하십니다 혼자서 쓸쓸히 종가를

지키고 계십니다

330년 종사를 받드는 종가는 축대위에 높이 앉아 위용을 드러낸다.

 납작돌로 축대를 높이 쌓은 후 그 위에 집을 지은 모습이 한결같은 이 마을 특징이다.

 안채 축담 위에 신기하게도 같은 돌담으로 나지막하게 에워싼 닭장은 닭을 족제비 등

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커다란 돌로 덮어 놓았다. 안채 뒤 장독대는 계단식 돈대로

 돌을 차곡차곡 쌓았는데 꽤 널찍한 것을 보니 종가에 쓸 음식은 모두 이곳에서 나왔으리라.

 제일 높은 돈대 위에는 뒷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당이 조상들의 신성한 위엄을 내뿜는다.

 

고성 학림 최영덕씨고가

(매사고택 梅史古宅)

입향조 형태공의 5세손 성화(聖和) 최필간(必侃)공이

큰댁에서 분가하니 이분이 최씨고가의 중시조이다.

손자인 매사(梅史) 최태순(泰淳)공이 현재 규모의 주택으로 확장 개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최씨고가는 전형적인 남부지역 사대부 가옥의 형식으로,

모든 건물은 일자형 평면이며, 안채, 서익랑채, 곳간채, 사랑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우진각 지붕)외 모두 팔작지붕건물이며,

사랑채 4귀에는 넓은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대문채는 맞배지붕의 솟을지붕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중문 앞에 내외차단벽이 이채로우며,

사랑채-학림헌(鶴林軒)-은 당시 지방 수령-통영 통제사-이 있는 관아와 너무 멀어

 민초들이 관청에 드나들기 힘든 시절 지방의 유력자인 최영덕(泳德)씨의 선조들에게

 행정권을 위임해준 향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때문에 학림헌의 천정은 당시 관청의 그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지대(축담)에는 손 씻는 돌세면대. 소피를 보는 돌거북 등이 있다.

후원 텃밭에 있는 자 모양의 화강석 우물 뚜껑에 난 3개의 구멍은

천지인을 뜻하며 당시 석공의 솜씨를 자랑한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자연석(개석)으로 쌓여져 있는 담장은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전체의 돌담길-학동마을 옛담장-

등록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최씨 집안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육영재(育英齋,경남문화재 제208)를 만들어

일제때 신 교육기관이 생길 때가지 운영하여 많은 한학자를 배출하여

집안에 약 20여권의 문집(文集)이 나왔으며,

1910년 국권침탈때 순국 자결한 우국지사 서비 최우순(西扉 崔宇淳)

필간공의 종손자이며, 3대 국회의원 최갑환(甲煥), 최재구(載九,4선의원) 부자 등도

 직계 증.고손이다.(글출처 : 한국관광공사)

 

 

 

 

 

차종가인 참봉댁이라 부르는 최영덕(泳德) 매사고택은 일찍 문화재로 지정되어 비교적 잘 보존된

모습으로 종가와 돌담장 하나로 이웃하고 있다. 전통 목조건물인 사랑채를 포함한 모든 건물이

 시원스런 일자형 평면구조다. 선조들의 교지는 경상대학교에 기증하고 모본만 있었는데

자랑스러운 선조의 위세가 당당하다. 사랑채에 멋진 글씨체로 적힌 학림헌(鶴林軒)이라는 편액은

통영 통제사 관할구역인 이곳이 관청과 멀었던 사정에 따라 임시 동헌으로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

 

솟을대문과 사랑채, 안채, 음식창고, 고방, 샛문 밖의 텃밭, 우물과 정원 등이 ㅁ자 구조로 이루어진

 매사고택에선 옛선비의 품격과 질서가 잘 배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멀리 서울에서 또는 가까운

 곳에서 전통한옥체험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옛 담장의 비밀, 노블리스 오블리제

돌담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속살을 엿보면 탐방객의 생각을 뛰어넘는 위대한 정신이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대체로 돌담은 아래쪽에 개구멍이 있는 것으로 끝나는데, 매사고택의 대문 양쪽 담에 어른 키 높이쯤

주먹 두 개가 들어갈만한 구멍이 뚫려있다. 담장 밖에 사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주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곡식을 갖다 놓았던 구멍이라 하는데 바깥사람들이 집안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배고픔을

 달래라는 배려의 구멍이다. 이 구멍 속에 담긴 정신은 그야말로 노블리즈 오블리제의 표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을 아닐 것이다. 부자 마을은 많지만 하나의 단위 마을에서 이처럼 고결한 정신이 담겨있는

 곳을 찾기한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계산해서 쌓은 담장

 이 마을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돌담장 때문입니다.

투박한 듯 보이지만, 섬세한 손길이 가득 담긴 학동마을의 돌담장. 돌 하나, 흙 한 줌 켜켜이 쌓이 올린 품새가 반듯하고 정갈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모양새가 다릅니다. 또 뜬금없이 구멍이 뚫려 있지요.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일까요.

 담장을 쌓는데 사용된 돌은 모두 자연석. 오래 전 논밭을 개간하면서 나온 납작돌이 재료가 되었습니다.

지형적으로 퇴적층이 발달한 고성.

 

떡시루처럼 쌓인 돌의 흔적은 지금도 마을 뒷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담장 아랫부분의 50cm는 순수하게 큰 납작돌만 쌓고, 그 위로 작은 납작돌과 황토를 차례로 쌓아 올린 방식.

바로 한여름 장마철 홍수를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답니다.

 

바닥에 흐르는 물과 황토가 만나면 담장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계산은 담장 위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기와 대신 커다란 개석을 얹어 모자를 씌운 담장.

쏟아지는 빗줄기로부터 담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죠. 선조들의 한 뼘 지혜가 담긴 담장입니다.

 

 최우순선생 순의비

순의

선비가 의義 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을 순의라고 합니다.

선생깨선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제국주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 나라가 망하자

       (청사-晴沙) 란 본래의 호를 왜놈 꼴보기 싫다시고 (서비-西扉) - 서쪽 사립문 으로

       고치시고 당신의 대문도 서쪽으로 내셨습니다.

 

그런 선생을 일제는 그냥 두지 않고 끈임없이 식민정책에 협조를 요구하며 회유했습니다.

        여러번 회유에 번번히 뿌리친 선생을 강제로 소환해 가려고 일경들이 들이 닥쳤을 때

        선생은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가겠노라시고, 그밤에 음독으로 자진 하시니

        선생의 향년이 80세 였습니다.올해로 선생의 순의 101년이 됩니다.

        100년 전의 80 연세면 지금의 수명으로 치면 100세는 족히 될텐데

        그 연세에 친일을 한다고 치더라도 무슨 친일을 얼마나 할수 있었겠습니까.?

        일경이 오라고해서 가면 일왕이 주는 은사금이란 돈 얼마와 허울뿐인 그런 벼슬 하나 받고

        오는 것이 전부인데, 선생께선 그 것이 선비의 명예에 누가 된다시며 순의하셨습니다.

지금도 100세의 노인이라면 자기 정신 온전히 간수하기도 버거운 일이거니, 그 연수에 절의를

        위하여 초야에 묻혀 사는 시골 선비가 목숨을 버리시니............

그시절 초야에 묻혀사는 선비가 순의한 경우는 전국으로도 손에 곱을만큼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은 화이트데이 옆지기에게 점수 좀 땄습니다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 Meav


                                                                       나는 대리석궁전에 사는 꿈을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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