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발릭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에 또 트로이로 이동
트로이
이번에는 신화에서 역사로 되살아난 트로이를 만날 차례입니다. ‘트로이의 목마’라고 들어 보았나요?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거대한 목마를 이용해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 말이에요. 그리스 신화와 호메로스의 유명한 대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 나온 트로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지만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설로만 여겨졌어요.
그런데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독일의 고고학자가 1871년 트로이의 유적지라고 추정되는 흔적을 찾아내면서 트로이는
전설이 아닌 진짜 역사로 등장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트로이의 이야기가 신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상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슐리만은 달랐어요.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고 또 읽으면서 트로이가 실제로 있었을것이라 믿었지요.
그리고 트로이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6개 외국어를 공부하고, 발굴을 하기 위해 사업을 벌여 많은
돈을 벌었지요. 결국 슐리만은 고고학자가 되어 실제로 트로이의 유적을 찾아 나섰어요.
도대체 트로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길래 슐리만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트로이는 기원전 12세기나 13세기로 추측되는 초기 그리스 시대에 터키의 소아시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도시 국가였어요.
트로이의 멸망 이야기는 트로이 왕의 아들인 파리스가 그리스의 스파르타에 외교 사절로 갔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달아나면서 시작됩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요.
“이것은 분명 그리스에 대한 정면 도전이야!”
그래서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어요. 메넬라오스는 형제인 아가멤논 왕, 전사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그리고 군사들을 모아 트로이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렸어요. 그리스 원정대는 지중해를
건너가 트로이와 전쟁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양쪽의 전력이 팽팽해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무려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어요.
트로이목마 꼬리 부분
전쟁에 먼저 지친 것은 그리스였어요. 오랫동안 집을 떠나온 군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리스 진영에서는 군대를 철수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어요. 이때 지혜로운 전사 오디세우스가 마지막
승부수를 띄었지요. 바로 목마 작전! 커다란 목마 속에 그리스 군을 숨겨 놓는 위장 전술이었어요.
목마만 놓고 철수했다가 트로이 군이 방심하는 틈을 타 불시에 공격하려는 속셈이었어요.
그리스 군은 시논이란 스파이를 시켜 거짓 소문을 트로이에 퍼트렸어요.
“목마는 아테나 여신을 위해 만든 것이랍니다. 저렇게 크게 만든 것은 트로이 군이 목마를 성 안으로
운반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언자가 말하기를 목마가 트로이 손에 들어가면 트로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파이의 말을 믿은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아무런 의심 없이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날 밤, 트로이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자 목마 안에 몰래 숨어 있던 그리스 군인들이 나와서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 군대는 쉽게 트로이 성을 공격할 수 있었지요.
이 일로 결국 트로이는 전쟁에 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현재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는 실물 크기로 복원해 놓은 목마가 서 있어요. 한편 발굴된 유적지에는
트로이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세워졌다 멸망한 8개의 도시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발굴을 할 수가 없어 트로이의 유적지 층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곱 번째 층으로
추측하고 있답니다.출처:처음만나는 세계문명에서
피터스 정원-트로이인들이 쓰던 옹기와 수도관
트로이 유적지는 1996년 터키 역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데온은 음악과 회의가 열린 원형 소극장으로 트로이 유적 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
로마시대 지은 것으로 지붕이 있었고 음향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다
출입구 근처의 성문이 있던곳 기원전188~1300년에 만들어진 성벽이 있던 곳으로
알리아드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로 보인다고
고대 히타이트의 기록에 등장하는 '윌루시야(Wilusija)' 혹은 '윌루사(Wilusa)'는 이 트로이로 비정되고 있다.
트로이가 있던 지역을 부르던 이름인 일리오스(Ilios)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이나 히타이트의 기록에 나타나는 윌루사의
위치가 실제로 트로이가 발굴된 지역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일리오스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는 있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 제목부터가 '트로이아드'가 아닌 '일리아드'라는 것에서 보듯이 상당히 많이 사용된 이름이었다.
트로이 난공불락의 성벽
성벽을 지나면 전망대가 나온다. 언덕 아래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트로이 앞은 당시에는 바다였는데, 오랜 세월동안 지형의 변화로
지금은 이렇게 평야가 되었다고 한다.
복원중인 성벽
이처럼 여러 세기에 걸쳐있는 도시들은 지진 등으로 폐허가 되고
다시 그 위에 또 다른 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1도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2도시는 기원전 2800년경부터
3도시 ~ 4도시는 기원전 2200년경부터
5도시는 기원전 1800년경부터
6도시는 기원전 1280년경부터.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시기로 추측하고,
7도시는 기원전 1200년경부터
8도시는 기원전 700년경부터.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만들
어 재건 하였으며 호메로스는 이시대의 인물이다.
9도시는 기원전 85년경부터. 로마의 식민지로 도시 재건.
목욕탕, 극장 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마지막 9기는 로마시대였던 서기 500년까지로 추정된다.
그리스군의 침략으로 성이 무너졌다고 하나 지진으로 인한 성벽 붕괴와 도시의 파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진을 관장하는 신은 포세이돈인데,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동물이 말이었기 때문에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트로이의 목마이야기가 탄생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트로이는 에게해에서 6km떨어진 곳에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 매우 적합했던 곳이다
트로이 유적을 찾던 사람들이 트로이를 바닷가로 생각하였기에 현재 바다에서 6km나 떨어진 이곳이
트로이 유적지일거라고 상상하지 못해 오랫동안 사람들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평원은 더 없이 평온해 보여 그 옛날 이곳이 아킬레스와 헥토르 왕자 등
수많은 영웅과 병사들이 피를 뿌려야 했던 트로이 전쟁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래왼쪽은 왕궁으로마차가 들어는 길리라고 함
우리팀들은 이곳을 설명해주지 않아서 아무도 들리지 않았는데 나는 주위를 살펴보니
유물들이 보여서 계속전진 외국인들과 함께 돌아보았다
차나칼레 (자유 해협)
차나칼레는 터키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차나칼레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106,116명이다.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있고 다르다넬스 해협과 접한다. 북쪽에 있는 유럽 지역을 횡단하는 페리가
운행되며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유적이 남아 있다
차나칼레는 소도시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며 에게해(Aegean sea)에서 마르마라해(Marmara sea)로
들어오는 다르다넬스 해협(St.Dardanelles)의 입구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해협의 아시아쪽과 유럽쪽까지의 해협의 넓이는 고작 1200m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작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가 갈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차나칼레시의 행정구역은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쪽과 아시아쪽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과거 헬레스폰투스(Hellespontus)라고
불리웠다. 이 그리스어의 뜻은 "그리스의 문호"라는 뜻이다.
이 해협은 그리스와 흑해연안의 식민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로 상업,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이 해협의 중요성은 근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나라들이 이 해협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였다.
그래서 이 해협은 1841년 맺은 런던조약에 의해서 모든 나라의 상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유해협이 되었다.
랍세키항구
다르다넬스 해협 (Dardanelles Str.)
트로이 유적 관광을 마치고 차나칼레 지나 랍세키항구 도착해서카페리편으로 다르다넬스 해협경유
겔리볼루 항구로 이동한다.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서다.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는 시간은 불과 30분에 불과하다.
에게해와 흑해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거나 나누고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지역은 과거에 2개의 중요한 전쟁을 치렀다.
첫번째는 호머(Homer)의 일리아드로 유명한 트로이(Troy/ 현재명:Truva ) 전쟁이다. 이 불멸의 이야기는 트로이가 발굴되면서
허구가 아닌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밝혀졌다. 두번째 전쟁은 차나칼레 전쟁(Canakkale Battle)이다.
이 전쟁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의 지휘 하에 터키군이 차나칼레를
지키기 위해서 벌였던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졌던 차나칼레의 유럽쪽 지역인 갈리폴리(Gallipoli)는 국립공원이 되었으며
이 곳 언덕에 거대한 석조기념비가 세워져 차나칼레 전투에서 전사한 50만명의 군인들을 기리고 있다.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쪽에서 아시아쪽으로 매일 수 차례 왕복하는 페리에는 언제나 승객들과 차들로 가득하다.
우리 일행은 아시아 차나칼레 에서 관광버스와 함께 에게해 바다를 건너 유럽쪽 겔리볼루 항으로 들어간다
유럽쪽 겔리볼루항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황색 지붕이 주류를 이룬다
겔리볼루(터키어: Gelibolu) 또는 갈리폴리(Gallipoli)는 터키 차나칼레 주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806km2,
인구는 36,180명(2009년 기준)이다.동트라키아와 터키의 유럽 지역에 위치하며 겔리볼루 반도 남부 연안,
다르다넬스 해협과 접한다. 도시 이름은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도시"를 뜻하는 단어인 "칼리폴리스"
(그리스어: Καλλίπολις, Kallipolis)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위키백과
우리와 같이 했던 차량들
이스탄불 남서서쪽 203㎞ 지점, 다르다넬스 해협이 마르마라 해와 연결되는 곳의 좁은 반도에 자리잡고 있다.
비잔틴의 중요한 요새였으며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손에 넣은 지역으로(1356경), 이스탄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해군기지로 쓰였다. 또한 루멜리아(발칸 제국에 있는 오스만 제국의 영지)에서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무역로의 중요한 중계지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다르다넬스 작전때 연합군과 이에 치열하게 대항한 터키군이 맞붙었던 곳으로,
이때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로마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6세기)의 창고와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의
것으로 짐작되는 14세기의 사각 성곽, 트라키아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분이 아직 남아 있다.
이즈미르항에서 바로 점심식사를 하고 이스탄불로 향한다
이스탄불 시내풍경
큰 대로를 질서가 없이 아무곳에서나 건너가고 있다
이스탄불이 차량정체가 세계에서 4번째라고한다
역시 시내 곳곳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있다 주말이라서 인지 공원벤치에도 자리가 없을 정도
버스도 스로우스로우 밖에 풍경을 담을 수가 있으니 이리찍고 저리찍고 역시 뒷좌석이 좋다
저기 보이는게 마르마라 해라고한다
아라스타 바자르 시장도 보이고
차에서내려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하는중
탁심광장
탁심광장
오늘날 신시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탁심 광장은 그 명성에 걸맞게 각 방면에서 이어진
여러 거리와 맞닿아 있는 교차로이기도 하다. 광장의 남쪽은 갈라타 탑으로 이어지는 이스티클랄 거리와
만나고, 북쪽으로 뻗어 있는 줌후리예트 거리에는 항공사나 은행, 고급 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높이 12m의 터키 공화국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28년 이탈리아의 건축가인
피에트로 카노니카가 세운 것으로, 터키의 독립 전쟁과 공화국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비잔티움 예술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니카의 반란(532)으로
불타 버린 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하였다. 성 소피아 성당은 황제의 대관식, 전승 기념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으며,
정사각형의 벽 위에 원형의 돔을 올려놓는 비잔티움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준다. 내부는 대리석 기둥과 모자이크, 금박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중앙을 차지하는 돔은 지름이 31m나 된다. 네 개의 첨탑(미나레트)과 내부의 아랍어 장식은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워진 것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종교 행위도 금지되고 있다
1453년 5월 28일,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 직전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곳도 성 소피아 성당이다.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자정에 성당에
입당해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평화의 기도는 밤새 올려졌으나, 오스만제국 군대의 함성과 포성에 놀란 시민들이 성당으로 피신해 오고, 5
월 29일 동틀 무렵에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가 함락되었다. 그 후 성 소피아 성당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미사가 봉헌되지 못했다.
서기537년에 시작하여 547년에 완공한 걸작 중의 걸작 건축물이라고 함당시 이런 대형 건축물들이 수 십년
또는 100년 이상에 걸쳐 지어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에 비하면,이 소피아 성당은 10년의 단기간에 완공하였한다
출입문
세계에서 4번째 크기를 자랑하는 성소피아성당은 비탄진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을 수도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당으로 532년에서 537년 사이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다시 크게 개축되어진 성당이다. 이렇게 건립된 이후로 무수한 역사와 함께 비잔틴 성당의 대걸작으로서
지금까지 내려져 오는 유서깊은 성당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성소피아성당은 외당, 내당, 본당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당은 육지, 내당은 바다, 본당은 우주를 의미한다.
이렇게 구성되어져 있는 성당을 들어가면 우두커니 솟아나있는 돔이 많은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 돔은 동서 77m, 남북 71.7m로 중앙에는 높이 54m에 지름이 33m나 되는 거대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돔 지붕이 지탱하는 기둥없이 벽으로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한번더 놀라게 해준다.
이 돔은 많은 이슬람 건축에 영향을 줘 수많은 모스크가 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문(제국의 문)
첫번째 출입문을 열면 위 벽화그림이 눈에 띈다...가운데 앉아계신 예수의 양쪽 옆으로 오른쪽 원에는 띠를 든
천사 가브리엘, 왼쪽 원에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예수의 오른쪽 발 아래에는 레오 6세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회개)하는 모습이다...예수의 왼손에 들린 책의 글귀는
그리스어로 "너에게 평화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복음서의 문구가 적혀있다.
바닥에서 중앙 돔 천정까지의 높이가 57m에 이르는데 중간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고 보나 도리도 물론 없다.
대단하다는 것은 크기만 크다는 것이 아니다.거대하지만 한없이 섬세한 기술이 숨어있고,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이는 대단한 예술품이다.
중앙돔
5층 건물 높이의 이 돔에 그려진 그림은 작가 들이 모두 누워서 그림을 그렸다.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도시를 바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그 왼쪽에는 교회를 바치고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이 성좌에 앉아있고 양 옆에는 조여왕과 그녀의 세번째 남편인 콘스탄틴 모노마쿠스의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에서 여왕은 11세기에 그의 첫 남편인 로마노스 3세와 함께 그려져 있었지만남편이죽고
새로 결혼을 하면서 황제의 얼굴과 황제 머리에 쒸어진 문구가 바뀌었다
지진에 견디게끔 중간에 나무판으로 완충지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혹자는 동이라는
사람도 있다 어느것이 맞는 것인지?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정복당한 이후 500여년 동안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된 소피아 성당엔 코란 글귀도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원형에 씌여진 코란문자는 "알라신만이 유일한 신이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은 오스만제국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하면서 현재 성당 내부에 소형 건축물이 추가되었는데,
성당 중앙 안쪽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성지 메카를 상징하는 ‘미흐랍’이 있다
데에시모 모자이크
동로마시대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며 16세기 오스만제국의 슐레만대제가
성상숭배라하여 회칠을하여 덮었는데 1932년 회칠을 벗겨내면서 그모습이 드러났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벽화라고 하는데, 회칠을 벗기는 과정에서 상당부분 훼손된것이라고
왼쪽은 성모마리아, 오른쪽은 세례요한! 두 사람이 예수에게 인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란다
천장 벽에는 4개의 기독교 천사들이 있는데 천사의 얼굴도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었던 동안에는 커다란 보석으로 가려 있었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안테미우스와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의 합작품이다.
성당은 중앙에 ‘영원’을 상징하는 직경 32.5m의 둥근 돔이 있고, 바닥은 ‘세상’(땅)을 상징하는
사각평면에 네 개의 기둥을 두었다. 15층 건물 높이의 성당은 커다란 돔을 무게를 받치기 위해 서쪽과
동쪽에 반원형 돔을, 북쪽과 남쪽에 육중한 버팀벽을 세웠다.
성당의 총면적은 7,570㎡이며, 중앙 돔 정점까지 높이는 바닥에서 56.6m이다.
고대 페르가뭄에서 발견된 것을 무라드 3세가 이곳으로 가져왔다한다.
예배 의식 전에 정결함을 위해 손을 씻던 것으로 사용되었다.
1층 한구석에는 엄청나게 긴 줄이 있다. 기둥 움푹페인곳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나머지 네손가락의
손끝을 기둥에서떼지않고 원을 그리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해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저마다 소원을 이루겠다고서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패스
정교하고 섬세하고 대단한 솜씨다
신부가 기도할 때에 손을씻는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 아닐까? 터키어를 모르니.....
단돌로
성 소피아 성당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역설적인 것은 이층 회랑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놓인
‘HENRICUS DANDOLO’라고 쓰여진 금속판이다. ‘단돌로’는 베네치아 총독으로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라틴 기사들을 부추겨 같은 무슬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비잔틴제국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함락시킨 장본인이다.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거둬 베네치아로 가져갔으며, 성 소피아 성당에
있던성물과 성상도 찬탈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을 꾸미는 데 썼다. 1205년에 죽어서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신이 성 소피아 성당에 묻혔다.
그러나 1261년에 비잔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해
단돌로의 석관묘를 파헤치고, 그의 유골을 거리의 개에게 던져주었다.
이스람에서 기도하기전에 발을 씻는 수도인지 화려하다
아이발릭에서 출발 트로이를거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와 이스탄불에도착 성소피아 성당을
둘러보고 저녁식사하고 시내 야간투어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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