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흑해 어귀에 있는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에 걸쳐 있어서 유럽·아시아 양 대륙에 속한다.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을 세운 곳으로, 324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로 채택했고,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개칭되었다.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터키의 역사·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유명한 곳으로는 예레브스탄 궁전·콘스탄티누스 궁전·
하기아 소피아 등이 있다.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 현수교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마지막 묵은 파크인 호텔 첫날묵었던 호텔과 다르다
비잔티움은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한 곳으로서 BC 512년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갔고,
그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치하에서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간(69~79)
동안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수도로 채택되면서 '신로마'(New Rome)로 개칭되었다.
330년에는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포고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6~13세기에는 페르시아인·아랍인·불가리아인·
러시아인들에게 자주 포위당했다.
1203년 제4차 십자군에게 점령당해 이들에게 약탈당하고, 로마 가톨릭 지배하로 들어갔다. 1261년 다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에게 또다시 넘어갔다. 메메드 2세 치하에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뒤 1922년까지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콘스탄티노플은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유럽 지구에 전체주민의 3/4 이상이 거주하며, 주요 상사·호텔·사무실 등이 집결되어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도시(Stamboul)
안에는 비탈이 가파르고 꼭대기가 평평한 7개의 구릉이 있는데, 이곳은 가장 중세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좁은 해협인 골든혼(Golden Horn) 건너편에 자리잡은 베욜루는 이스탄불 시의 현대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구역으로,
극장과 수많은 터키 정부청사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터키의 문화 중심지였다. 새로 생긴 문화시설에는 1969년 예술 센터로 개관된 아타튀르크 문화궁전이 있으며,
여러 학술단체와 연구소·박물관·도서관 등도 있다. 터키 최대·최고(最古)의 고등교육기관인 이스탄불대학교가 있으며, 그밖에
이스탄불공과대학교·마르마라대학교·보스포루스대학교·미마르시난대학교·일디즈대학교 등이 있다.
철도를 통해 동서 유럽 및 중동의 시리아·이라크와 연결된다. 이스탄불 시의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길이 1,073m)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 현수교들 중의 하나이다. 서쪽으로 27㎞ 지점에는 예실쾨이 국제공항이 있다.
이스탄불의 항구는 터키의 수출입품목의 대부분을 취급한다. 다음백과에서
이스탄불의 기후는 아열대 및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평균기온은 14℃, 연강수량은 760~900㎜이다.
터키의 제조업 공장들 가운데 약 1/3을 수용하며, 주요공업으로 섬유·시멘트·유리·가죽제품 제조업과 담배 가공업,
자동차 및 트럭 조립업, 인쇄업, 조선 및 선박수리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대규모의 터키은행과
외국 보험회사들이 시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관광업이 중요한 수입원이다.
우리 여행팀에서 막내이고 어찌나 싹싹하고 일처리를 깔끔하게 잘하는지
우리팀의 귀염둥이 김여사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좁은 바닷길이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좁은 바다이기도 하고...마르마라해에서 에게해와 지중해로 연결되는 바다이기도 하다.
유럽/아시아지구의 아름다운 유적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선상투어가 멋지게 자리하는 곳이기도...
저쪽 뒤에는 갈라타 타워가 보인다
갈라타 탑은 528년 비잔틴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처음 세워졌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348년에 재건되었다. 당시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1960년대 내부를 수리하면서 현재까지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약 67m로 비교적 높은 편은 아니지만, 신시가지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갈라타 탑에 오르면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아타 튀르크 다리
갈라타 타워와 아래 갈라타 다리가 보인다 다리아래에는 식당과 술집들이 즐비하다
전날 저녁에 야간 투어에서 들어가 맥주 한잔한곳이다
다리위에 흐미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우측에 이스탄불 역사
아시아쪽 구시가지
신시가지
신시가지
돌마흐체 자미
보스포러스 다리 유럽쪽과 아시아쪽을 연결하고 있다
오전에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 투어를 마치고 점심식사를하러 들어간다
성류즙 터키에는 성류즙과 터키차는 어느곳에서나 판매를 한다
화려한 다(茶)기들
점심식사를 마치고 톱카프 궁전으로 향한다
세계최 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첬든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톱카프 궁전
제국의문
오른쪽 정문 앞에는 이렇게 특이한 건물이 있는데, 오래된 샘이 있는정자라고 .
예전에 왕궁을 방문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손 씻고 몸단장 하고 출입허가를
기다렸다고함
제국의문에서 예의의 문까지 걸어들어가는 것도 한참이 걸립다
톱카프 궁전은 6세기 이상 3개 대륙에 걸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오스만 제국의 궁전이다.
터키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방문지가 이곳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역사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1470년에 처음 지어진 이 궁전은 하나의 궁전 건물이라기보다
요새(성채) 안에 다수의 건물들, 정원들이 모여있는 작은 도시와 같은 곳이다.
첫 번째 정원 (붉은 벽돌의 성 이레인 교회)
이 궁전의 구조는 네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네 공간을 보통 첫 번째 정원, 두 번째 정원, 세 번째 정원,
네 번째 정원이라고 부른다. 제국의 문을 들어서는 첫 공간이 첫 번째 정원이다. 이곳을 들어서면 대 제국의
왕궁이라기 보다는 소박한 성주의 정원처럼 느껴진다. 울창한 나무들로 쌓인 이곳은 지금도 이스탄불
시민들의 안락한 공원으로 개방되고 있다. 왼쪽에는 붉은 벽돌의 성 이레인 교회가 보인다.
비잔틴 제국의 슬픈 역사를 묵묵히 증거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정원의 오른쪽에는 부대막사, 주차장, 궁전
하인들의 집들, 궁전병원 및 빵집 등이 마르마라 바다를 등지고 서있다.
예의(?)의 문 또는 인사의 문이라고 불리는 두번째 문
술탄 이외의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곳에서부터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고
톱카프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 골든 혼, 마르마라 해가 만나는 곳에 있는 궁전으로, 1467년 메흐메트 2세 때
완공되었다. ‘톱카프’라는 말은 터키어로 ‘대포의 문’이라는 뜻인데, 당시에는 보스포루스 해협 쪽에 대포가
놓여져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453년에 이스탄불을 함락한 메흐메트 2세는 이곳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여러 술탄들이
당시 건축양식에 따라 증축을 해서 70만 제곱미터의 부지에 가득한 건물들을 가지고 있다.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요새로서 만들어진 성채,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토가 이렇게 세 개의 대륙에 걸쳐 있었다니 새삼 놀랍다...
오랜 옛날 우리의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돌궐(투르크)족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곳까지 이동을 해서 이렇게 광활한 제국을 형성하고 통치했다는 것은 대단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제국의 6대에서 31대까지술탄이 거주했고 돌마 바흐채 궁전은 31대부터
마지막 36대술탄 때까지 거주하였다
톱카프 궁전은 우리나라의 창경궁과 운명이 비슷하고 돌마바흐체 궁전은 말년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무리하게 복원 시켰지만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정궁으로 남은 경복궁과 비슷하다고함
행복의문
도자기 전시관
도자기 전시실
도자기 전시실에는 1만 2천 점에 달하는 동양권 도자기들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 등에서
들어온 것들로 알려졌다. 중국 도자기는 송, 원, 명 시대를 중심으로 볼 수 있으며, 일본의 이미라 자기나
유럽에서 온 각종 도자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스람권 국가들은 도자기가 대체로 화려하다
보물관 맞은편에 있는 종교관으로 요셉의 손인가 요한의 손인가하는 성인의 손도 있고 모세의 지팡이로
추정되는 물건이 유리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시계 방향으로
보석으로 장식된 톱카프 단검
오토만 술탄 마흐무트 1세가 페르시아 술탄 나디르에게 선물로 만들어 보낸 것인데 페르시아로
운반해 가는 도중에 술탄 나디르가 사망했기 때문에 다시 톱카프궁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다
화려한 응접실 .금으로된의자.세계에서 가장큰 86케럿짜리 다이아몬드
사진 촬영금지인 줄도 모르고 내가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관리인한테 걸려서 모두 지웠다
이사진들은 빌려온 사진임
각종 주방 용품들
화려한 실내외 장식들
행복의 문 안쪽에서 만난 왕의 접견실로서 외국사신이나 국무총리,고위관료들이 왕을 접견하던 곳이다.
한때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만큼 황금과 녹색,청색무늬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오른쪽 입구 벽면 아래에 있는 도청방지용 수도시설이 눈길을 끈다. 왕이 중요한 국사를 논의할때 분수의
물을 틀어서 밀담을 엿듣지 못하게 하였단다.
이 정원에서 중요한 행사도 개최하고 외국의 사신도 맞이하고 했다는데...
지금은 그저 잘 가꾸어진 안마당과 같은 곳이었다.
아시아쪽 구도심을 배경으로 인증도 하고
톱카프 궁전의 성벽 길이는 총 5㎞에 달한다. 높은 성벽 안에는 술탄의 침소와 집무실, 술탄의 여자들이
거주하던 하렘, 사원과 도서관, 정원과 정자 등이 조성돼 있다. 월트 디즈니가 영감을 얻었다는 정문을
지나 들어서면 넓은 정원이 나타난다. 정원은 1만 명이 행사를 치를 정도로 넓은데, 오른쪽이 부엌이고
왼쪽이 마구간이다. 약 1천 명의 요리부대가 음식을 만들던 부엌은 현재 도자기 전시실로 이용된다.
궁전 내 소장된 1만2천여 점의 도자기 중 일부를 볼 수 있는데 중국에서 건너온 청자와 백자가
눈길을 끈다. 부엌과 일직선상에는 술탄의 의상 전시실, 보석관이 자리해 있다.
해시계 같은데 큰 대리석에 새겨저있다
여기까지는 천방지축 구경하며 좋았는데 만나기로한 약속장소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예의문 밖까지 나와버렸는데 생각해보니 안쪽인 것 같다 다시 들어가기도 그렇고 일행들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안에서는 나를 찾는다고 오래 기다리다 가이드와 다른팀은 나오고 우리팀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사람에게 민폐를 끼친것 같아서 미안했다
다음은 블루모스크로 이동을한다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지시 아래 건축가 시잔의 제자인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가 1609년 착공을 시작해 1616년 완공했다.
아야소피아 성당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사원에는 4개의 미나레가 있지만, 블루 모스크는 6개의 미나레를 가지고 있다.
아흐메트 1세가 ‘황금(알툰)’으로 만들라고 했는데, 건축가가 ‘6개(알트)’로 잘못 알아들어서 6개의 첨탑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 미나레의 높이와 개수는 술탄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에 정말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당시 이슬람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메카의 미나레도 6개였기 때문에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사람들이 꾸며 낸 이야기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내부의 벽과 돔은 21,043장의 푸른색과 흰색의 이즈니크 타일로 꾸며져 있고, 250개가 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햇빛이
들어와 화려하게 빛난다. 화려한 푸른색 타일 덕분에 ‘블루 모스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고, 현재는 원래 명칭인
‘술탄 아흐메트 1세 사원’이라는 말보다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슬람 신자들은 일생에 한 번쯤은 메카에 대한 성지 순례를 해야 하는데, 블루 모스크는 성지 순례의 출발지가 될 정도로
중요한 사원이다. 술탄들은 중요한 종교적 선언 시에 이 사원을 이용하기도 했다.
종교적 규율에 따라 내부에 들어갈려면손과 발을 씻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관광객에게는 비닐 봉지를 주어 신발을 담아들고 가게 한다.
첫번째 문을 통과하게 되면 만나는 블루모스크의 모습입니다.
위에 사진들에서 보았겠지만 블루모스크 외벽은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어 하얀색이며
건물이 꽤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이 블루모스크는 어찌보면 성 소피아 성당과도 많이 닮은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방문객들도 세계10위권 안에 드나보다 우리말로 입구라는 표시를 보니 반갑다
사진 찍는다고 불쑥 기도처 안으로 들어가다 제지를 받고 쏘리만 연발 황망히 뛰처나온 해프닝도....
기도하는 모습
모스크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장식에 놀라게된다
이슬람 문양이 그렇듯 대칭적이고 정교한 문양들이 모스크 내부를 꽉 채우고 있다
대리석으로 된 일부를 제위하곤 거의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1609년 술탄 아흐멧 1세는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사원을 짓고 싶어했다.
그의 바람은 당시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제자인 '메흐멧 아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8년의 시간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사원이 완성된 것이다.
화려한 사원의 모습은 오스만 투르크의 영광을 재현해 놓은 듯 하다.
직경 23.5m, 높이 43m의 거대한 중앙 돔을 4개의 반돔이 에워싸고 있고, 모두 6개의 첨탑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있다.
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첨탑의 수가 '6'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설이 전해진다.
술탄 아흐멧 1세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에 건축가 '메흐멧 아가'에게 황금으로 된 첨탑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재정 형편상 황금으로 첨탑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궁리 끝에 유레카를 외쳤다.
황금(ALTIN) 첨탑을 세우는 대신 여섯(ALTI)개의 첨탑을 세우는 것이다.
터키어로 황금은 'ALTIN' 이고 '6'은 'ALTI'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은 원래 일곱 개의 기둥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성지에 있는 사원과 같을 수 없다는 주장 때문에
하나 둘 줄여 전부 6개의 첨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 후 이곳은 제국의 술탄들이 종교적인 선언을 하는 곳이자 메카로 향하는 성지순례의
출발지가 되었다고 한다.
블루모스크의 세련된 모습은 빛바랜 성 소피아 성당과는 대조적이다.
훨씬 앞서 지어졌던 건축물을 모방하여 그것을 능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인가.
모스크에는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중 안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3개인데
남쪽 문을 통해 들어서면 '블루모스크'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아낼 수 있다.
약 2만2000여장의 푸른빛을 띠는 이즈닉 타일들이 사원 내부를 온통 치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장과 내벽을 가득 메워 청록빛을 띠는 것이 마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듯하다.
이는 사원 안 260개의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의해 더욱 더 환상적인 빛의 향연을 벌인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어두운 사원 안을 화려하게 수놓는 것이 또 있으니 바로 천장에 매달린
수백개의 오일램프다.
일정한 간격으로 원을 그리며 켜져 있는 램프 속 불빛들은 실제로 움직이는 듯하다.
길이와 폭이 각각 50m가 넘는 바닥을 꽉 채운 카펫은 어떠한가.
이는 에디오피아에서 가져온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것으로 맨발에 닿는 촉감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과 연꽃 모양의 둥근 돔, 벽을 장식한 독특한 모양의 이즈닉 타일과 은은한 오일램프.
이 모든 것이 넓은 사원 안에서 한데 어울려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송파님 글에서
이슬람 신전에 부설된 연필을 깎아 놓은 듯한 높은 뾰족탑은 "미나렛"이라 부르며 아랍어로 ‘등대’라는 뜻으로
무아딘(muaddin)이라는 기도 시보원(祈禱時報員)이 하루에 다섯번씩 이 탑에 올라가 외침으로써
회교 신자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려주었다.
지금은 사람이 아닌 기계인 기도시보계(祈禱時報係, muezzin)가 미나렛 위에 돌출된 발코니에 설치되어 있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살았던 당시에는 이슬람 사원 근처에서 가장 높은 지붕에 올라가 기도시간을 알렸다.
멀리서도 눈에 쉽게 띄는 미나렛은 이슬람교의 표지물로서 회교 사원에 부속되어 있는데,
한 사원에는 1~6개의 미나렛이 있다.
블루 모스크는 터키에서 6개의 첨탑 (미나렛)이 있는 유일한 사원이다.
블루모스크를 나와 히포드럼 광장으로 간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로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투트모시스 3세(기원전 1479-1425년 재위)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룩소르 카르나크 신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기원전 390년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에서 가져와 이곳에 세웠다.
연핑크색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무게는 약 300톤에 이르며,
본 길이는 32.5미터였는데 수송 과정에서 밑부분이 깨져 현재의 높이는 20미터이다.
기둥 사면에는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시스의 용맹성을 찬양하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대리석 받침대 사면에는 히포드롬에서 행해진 행사들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4면의 각기다른 조각들
오벨리스크 받침대 4면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후 무희들의 춤추는 모습,
전차 경기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 부터 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등이 행해진 일들이 부조되어 있다.
송파님글에서
이제 마지막 관광지 우리일행들 기념사진도 담고
그리스 아폴로신전에서 가져온 세펜타인 기둥 (청동뱀탑) 이 탑은 그리스가 전쟁인가에서 승리하고 노획한
무기를 녹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탑은 뱀 세마리가 서로 꼬고 서있는 모습으로 맨 위에는
뱀대가리 3개가 있었으나 취객에 의해 머리가 부러지고 그 뱀대가리 한개는 터키 박물관에
한 개는
영국 대영박물관에 나머지 한 개는 행방불명이란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당시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베를린과 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독일 제국을 건설하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던 그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와 친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895년 이스탄불 방문 시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었던
압둘 하미드 2세에게 우정의 증표로 이 우물을 선물했다.
그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우물’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히포드롬 광장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돔의 안쪽에 모자이크로 처리된
빌헬름 2세와 압둘 하미드 2세의 직인이 찍혀 있어 당시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짐작케 한다.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진 이 기둥은 황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실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히포드럼 광장의 중심부에 세워 놓은 것으로, 10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의 높이는
32미터이며 외부는 청동이 입혀져 있었는데
13세기 초 라틴군이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청동을 떼어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하였다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콘스탄틴 대제 광장에 남아 있는 유일한 유물로 "불에탄 기둥"으로
알려진 쳄베를리타쉬는콘스탄틴 대제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높이 50미터인
이 기둥의 꼭대기에는 1105년 까지 청동으로 된 동상이 있었는데
몇번의 지진과 화재로 인해 파괴 되었으며 현재의 높이는 37미터이다.
송파님 글에서
히포드럼 광장[Hippodrome Square]
이스탄불을 정복한 203년 로마의 세비루스황제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으로 330년 비잔틴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해 말의 광장,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U자형으로
길이 480m, 넓이 117.5m의 10만 명을 수용하며 왕위 계승으로 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유적이 파괴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이집션 오벨리스크 기둥, 뱀 기둥, 콘스탄틴 기둥 등 3개의 기념비가 보존되어 있다
히포트럼 광장을 마지막으로 모든일정을 끝내고 이른 저녁을 공갈빵과 치킨 케밥으로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간다 정신 없이 지나간 7박9일이다 10시간을 달려 인천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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