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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조선통신사 행렬1

토요일(5/4) 딸내외와 우리 내외 조선통신사 거리 행렬을 보기위해 용두산 공원으로 향한다

2시부터 출발 한다니 아직도 3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꽃피는 시기가 금년에 조금 빠르다고 하지만 거리에 이팝나무는 벌써 꽃이 피기 시작했다

용두산 공원의 꽃시계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고

시민의 종앞에 행사 집행부가 자리하고 시장을 비롯 많은 시관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파레이드 준비 하며 대기상태에 들어가 있고

내빈석에는 시장을 비롯해 시관계자들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부산 시민의 종

조선통신사는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한 국가 사절단한양에서 쓰시마까지의 행렬에 일본과 조선은

 '통신(通信)' 이란 말처럼 신의를 나누었다.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을 조선통신사라고 한다.

'통신(通信)'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부산타워

케릭터들이 앞장을 서고 가두행렬이 출발을한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은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이 전쟁은 조선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조선으로 출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사명대사 유정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였다.

이후, 도쿠가와(德川)바쿠후(幕府)는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을 '쇼군(將軍) 일대의 의식'으로 매우 중요시하였다

전통 취주 악단이 뒤를 따른다

1607년부터 1811년 까지의 약200여년 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도쿠가와 바쿠후의 경사나 쇼군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제2회 방문은 교토(京都)의 후시미(伏見)에서, 제12회 방문은 쓰시마(対馬)까지 였으나, 그 외에는

 모두 에도까지 왕복하였고 제4회 부터 제6회까지는 닛코(日光)에도 방문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이하,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이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戸)까지는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3,000㎞의 여행이었다.

긴 여로의 곳곳에서 통신사는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조선통신사의 선단(船團)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일본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정사관이 먼저 등장한다

유학자 들의 모습 같기도하고

청색 일산을 받쳐든 종사관 일행의 등장입니다. 종사관이 여성이네


쓰시마

쓰시마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예부터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 조선통신사의 안내하는 등

 조선과 일본의 교류 재기에 힘썼다. 근세에 쓰시마와 한국과의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기도 있었으나,

 쓰시마에 있어 한국은 지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과거의 긴 우호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다.

 한때 중단되었던 교류도 지금은 쓰시마와 부산의 정기항로 개설로 인해 문화, 경제, 교육 분야에 걸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고 있다.

통신사 깃발을든 기수들이 통과하고



청소년들로 구성한 취주악단


파견된 사람들


심사에서 하관까지 8단계

400~500명이라는 대규모의 통신사 일행에는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담당한 임무와 역할에 따라 삼사에서 하관까지 8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선 통신사 탐방지역


연대정사부사종사관
 서기조선 일본간지
1607선조40정미여우길경섬정호관
1617광해군9정사오윤겸박재이경직
1624인조2갑자정립강홍중신계영
1636인조14병자임광김세렴황호
1643인조21계미윤순지조경신유
1655효종6을미조형유창남용익
1682숙종8임술윤지완이언강박경후
1711숙종37신묘조태억임수간이방언
1719숙종45기해홍치중황선이명언
1748영조24무진홍계희남태기조명채
1764영조40갑신조엄이인배김상익
1811순조11신미김이교이면구폐지

 


통신사를 인솔한 삼사

먼저 통신사를 이끄는 삼사에 관해 알아보자. 일본에 통신사로 가는 것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한 후에는 정사·부사 등의 관료들에게는 역할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졌다.
또한 정사·부사 이하의 수행원들에게도 그 역할에 따라 상이 주어졌다. 통신사의 총책임자이며, 국서를 받들고 가는

 정사는 삼사라고도 불렸다. 정사는 인품이 높고 경험이 많으며 풍채가 좋은 사람이 선발되었다. 부사는 정사를 옆에서

보좌하였으며, 종사관은 문관 가운데서 글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였다. 종사관의 임무는 매일의 일을 기록한 뒤,

귀국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과 일행을 감찰하고 바다를 건널 때는 사람과 말의 대열을 점검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처럼 삼사는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일본 각지에서 시와 글을 받기를 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통신사가

묵었던 일본의 곳곳에는 그들의 시와 글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막부의 요청을 받은 의원/ 화원 / 마상재인

일본이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원 / 화원 / 마상재인으로 지금의 의사, 화가, 서커스의

 기예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측에서는 "의술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해주십시오"라든가, "그 수를 늘려주십시오"라며

 계속하여 의원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의원의 파견에 대해 일본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원은 예조의 도화서에 소속된 화가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처음 파견되었다. 이들은 통신사가 가는 곳의

정경이나 의례 장면을 그렸다. 일본인들은 이들에게 그림을 많이 요청하였는데, 이는 조선과 일본의 미술 교류에 크게

기여하였다.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김명국은 그림을 요청하는 일본인의 수가 너무 많아 팔이 아파 울려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이다. 인조 때 일본의 사절로부터

   마상재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어 시작되었고, 그 이후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마다 마상재인 2명을 보내 마상재의

기술을 일본에 선보였다.
『학산록』이라는 일본의 기록에는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이다"라고 적고 있다.


글로 문화 교류를 담당한 사람들

'서도'로 문화교류를 하였던 사람들로 제술관·사자관·서기 등이 있다.
제술관은 문장이 뛰어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본래 제술관은 통신사의 닛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음) 참배 때

 축문을 읽을 사람이 필요하여 선발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문장을 써서 대화하는 필담과 창을 이용하여 서로 시를 교환하는

 창화를 담당하였다. 사자관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문서를 옮겨 적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서기는 삼사의 옆에서

통신사 일행이 행하는 여러 일들을 기록하였다. 이들은 사절단에 선발되어 임무 수행 뒤 귀국하면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이번 행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래부하여 좋은 축제를 보여주었다

전통 복장을 한 일본인들 출연진

통역을 담당했던 통사와 훈도

'통사'란 통역관 시험인 역과에 합격하여 정식통역관이 된 관리였다. 이들은 외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통역을

담당하였으며, 통신사의 서열에 따라 배치되어 사절단을 도왔다.


통역관으로는 당상역관·상통사·차상통사·압물통사·소통사·훈도 등이 있었다. 압물통사는 일본과 교역할 때 통역을

 담당하였고 소통사는 훈도에게 일본어를 배우면서 상거래의 통역, 문서와 장부의 정리, 통신사 수행원들과 일본인의

 왕래 감시. 회계 등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훈도는 비록 지위는 낮았지만 일본 사정에 밝은 통역관으로당시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일행보다 뛰어났다


잔통 복장을한 일본인들의 춤솜씨도 대단했어요

음악과 행렬을 담당한 사람들

통신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도 파견되었다. 장악원에 소속된 전악은 사절단의 행렬·의식·연회의 음악을 담당한

 관원이었다. 각 악기의 연주자는 전악의 지휘로 연주하였다.


고수는 큰북을, 동고수는 꽹과리를, 세악수는 장구·큰북·피리·해금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풍악수라는 악대도 있었는데

 그들은 연주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의 악대에 선발되었다.

통신사 행렬에는 청도·형명·순시·영이라고 적힌 깃발을 든 많은 기수가 있었다.


기는 종류에 따라 그 나름의 역할이 있고 의미와 이름도 달랐다.

기수 외에도 통신사 행렬에는 무기나 모형무기 등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도 있어 통신사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외발자전거를타고 언덕을 내려가는데 그냥 두발로 걷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통신사를 호위하는 군관

군관은 통신사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군관에는 특별히 우수한 궁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제군관은 정사, 부사의

아들이나 친척으로 정사와 부사의 호위를 맡았고, 별파진은 화포를 담당하며 군관 중에서도 상관이었다.


그리고 삼혈총을 든 중무장한 군관도 있었는데 특히 포를 취급하는 군관들에게는 일본에서 이동하는 동안 포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는 포의 제조기술이 일본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하급병사인 사령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국왕은 조선이 시에 뛰어나가는 이야기를 듣고,

  통신사의 군관으로 임명하라고 명령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통신사의 군관들이 통신사의 호위뿐만 아니라

 문화교류도 담당했다는 것과, 글에 뛰어난 사람이 선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팀과 한국팀의 세대결이라도 하듯 모두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재능이 풍부한 소동

통신사 행렬도를 자세히 보면, 머리를 땋지 않은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통신사 일행이 데리고 간 아이들로

소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일행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춤이나 노래 등으로 일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일본의 우시마도에는 당시 소동들이 추었다고 여겨지는 '가라코 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그들이

춤에도 능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가 일본의 거리인지 한국의 거리인지 착각을 할만큼 많은 일본인들이

참여를 해서 더욱 빛나는 행사가 아닌가 싶다




각 고을에서 많은 농악대들이 참여를 했는데 팀마다 다들 특색이 있다




사진을 줄이기도 그렇고 다음장으로 연결을하여 2부에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