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역사관 캐릭터를 소개합니다.
조선통신사의 이미지를 장 반영할 수 있도록 고증된 자료를 참고로 컬러와 이미지를 연출하였으며,
통신사의 역학과 활동 범위를 고려하여 인물을 시각화 하였다. 대표적인 5종의 캐릭터는 통신사의 대표적인
정사를 위시하여 글로 문화를 교류했던 제술관, 번역을 담당했던 통사, 말타기 기예를 담당했던 마상재로 분류하여 개발하였다.
- 정서방
- 정사는 통신사의 총 책임자입니다. 국서를 받들고 가는 정사는 삼사라고도 불렸습니다.
- 정사는 인품이 높고 경험이 많으며 풍채가 좋은 사람이 선발되었습니다.
- 제선비
- 제술관은 문장이 뛰어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습니다.
- 본래 제술관은 통신사의 닛코(도쿠가와 이에이스의 사당이 있음) 참배때 축문을 읽을 사람이 필요하여
-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문장을 써서 대화하는 필담과 창을 이용하여 서로 시를 교환하는
- 창화를 담당하였습니다.
- 훈동이
- "훈도"란 통역관 시험인 역과에 합격하여 정식통역관이 된 관리였습니다.
- 이들은 외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통역을 담당하였으며, 통신사의 서열에 따라 배치되어
- 사절단을 도왔습니다.
- 마재돌이
-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입니다.
- 인조때 일본의 사정로 마상재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어 시작되었고 그 이후 통신사가 일본에
- 갈때마다 마상재인 2명을 보내 마상재의 기술을 일본에 선보였습니다.
- "학산록" 이라는 일본의 기록에는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이다."
- 라고 적고 있습니다.
- 신명이
- 전악은 사절단의 행렬, 의식, 연회의 음악을 담당한 관원이었습니다.
- 각 악기의 연주자는 전악의 지휘로 연주하였습니다.
- 기돌이
- 청도기(기돌이)는 행렬 때에 앞에 서서 길을 치우며 정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12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에 대한 멀티미디어 역사교육의 현장입니다.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자성대공원 내 영가대 옆에 위치한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임진왜란 이후 12차례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에 대하여 어렵게 느껴지는 역사소재를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입니다.
최첨단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전시, 다양한 문화콘텐츠 상품, 알찬 교육프로그램 등으로 역사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열두 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길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왕실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조선시대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세종대부터이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뒤 얼마 동안은 ‘통신(通信)’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부당하다며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1607, 1617, 1624)’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이 3회의 사행에
‘쇄환(刷還)’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간 포로의 쇄환이 주요한 파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좀더 흐른 1636년(인조 14) 이후 통신사라는 명칭을 회복할 수 있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전쟁 발발 후 15년의 세월이 지난 1607년
(선조 40)의 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강화 교섭에 힘썼다.
1603년 막부를 개설했으나, 당시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다이묘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내치(內治)에 주력해야 하는 입장에서
조선과의 관계 회복은 긴급한 현안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 쇄국 체제를 택해 당시 정식 외교를 맺은 유일한 나라였던 조선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대외적으로 고립된
일본에게 매우 중요했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조선으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일도 시급했다.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란
그들에게 ‘권력의 승인’이라는 의미도 지녀 대내외적으로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7년, 조선은 그들의 강력한 요청에 응하여 사신 파견을 재개하였다.
특히나 통신사 접대 경비가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많았음을 볼 때 일본이 조선통신사에 대해 할애하는 비중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655년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100만 냥에 달하는 액수였다.
1709년 당시 에도막부 세입이 76~77만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통신사 접대 경비가 그들에게 얼마나 부담을 안겨주었던
일인지 알 수 있다. 그처럼 막대한 경비를 들이면서도 조선통신사를 정례적으로 요구했던 저간의 정황이 파악된다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한 세 차례를 포함해 통신사라는 이름을 회복한 이후 1811년(순조 11)까지
아홉 차례, 총 열두 차례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일본에 보내진
300~500명의 인원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걸리는 긴 여정에 참여했다.
한양을 출발하여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을 지나 쓰시마(對馬島), 이키(壹岐), 아이노시마(藍島), 시모노세키(下關),
가미노세키(上關), 우시마도(牛窓), 무로쓰(室津), 효고(兵庫),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히코네(彦根), 나고야(名古屋),
오카자키(岡崎), 시즈오카(靜岡), 하코네(箱根), 에도(江戶), 닛코(日光, 1636, 1643, 1655)에 이르는 긴 여정에 오르게 된다.
이 가운데 1636(인조 14), 1643(인조 21), 1655(효종 6)년의 세 차례 사행 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묻혀 있는 닛코산(日光山)을
들르는 절차가 추가되어, 조선통신사의 가장 긴 여정은 서울에서 대마도, 에도를 거쳐 닛코까지 이르는 길이 된다. 정사, 부사,
종사관의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통역을 맡은 통사(通事), 제술관, 사자관, 의원, 화원, 자제군관, 서기, 마상재, 전악(典樂),
소동(小童), 기수, 포수, 세악수, 쟁수, 취수, 숙수(熟手), 사공과 격군, 포수, 도척(刀尺), 풍악수 등이 통신사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들의 여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알려주는 역사적 현장 그 자체가 되었고,
통신사행을 다녀와 남긴 수많은 사행록(使行錄)은 조선시대 외교관계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몸속 깊이 새겨진 일본 체험
기록은 오늘날에도 흥미진진하게 읽히고 있다.
국왕의 명을 받아 왕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에도에 도착하여 이를 전달하는전명의(傳命儀)까지 행하면 통신사행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마치게 된다. 전명의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노정에 들어서게 된다.
전체 12차에 달하는 통신사 행렬의 일정과 인원 등을 살펴보자
회차 | 서기 | 조선 연대 | 일본 연대 | 정사 | 인원 | 출발 | 전명의 |
---|---|---|---|---|---|---|---|
1 | 1607 | 선조 40년 |
게이초(慶長) 12년 |
여우길 | 504명 | 1월 | 6월 6일 |
2 | 1617 | 광해군 9년 |
겐나(元和) 3년 |
오윤겸 | 428명 | 7월 | 8월 26일 |
3 | 1624 | 인조 2년 |
간에이(寬永) 원년 |
정립 | 460명 | 8월 | 12월 19일 |
4 | 1636 | 인조 14년 |
간에이 12년 |
임광 | 475명 | 8월 | 12월 14일 |
5 | 1643 | 인조 21년 |
간에이 20년 |
윤순지 | 477명 | 2월 | 7월 19일 |
6 | 1655 | 효종 6년 |
메이레키 (明曆) 원년 |
조형 | 488명 | 4월 | 10월 8일 |
7 | 1682 | 숙종 8년 |
덴나(天和) 2년 |
윤지완 | 473명 | 5월 | 9월 27일 |
8 | 1711 | 숙종 37년 |
쇼토쿠(正德) 원년 |
조태억 | 500명 | 5월 | 11월 1일 |
9 | 1719 | 숙종 45년 |
교호(享保) 4년 |
홍치중 | 479명 | 4월 | 10월 1일 |
10 | 1748 | 영조 24년 |
간엔(寬延) 원년 |
홍계희 | 475명 | 11월 | 6월 1일 |
11 | 1764 | 영조 40년 |
메이와(明和) 원년 |
조엄 | 472명 | 63년 8월 |
64년 2월 27일 |
12 | 1811 | 순조 11년 |
분카(文化) 8년 |
김이교 | 336명 | 11년 12월 |
12년
|
조선통신사행 일정과 규모
조선에서 출발하여 에도성에서 국서를 전달하는 기간은 짧게는 1개월, 길게는 7개월이란 기간이 걸렸다.
날씨가 좋고 바람을 잘 만나면 기간이 짧아지지만 운이 따르지 않으면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그 기간도 길어졌다.
300명에서 500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원이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까지 육로로, 해로로, 다시 육로로 다녀오는 과정은 온갖
사건의 연속이었다.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침몰하기도 하고, 화재를 만나 배가 전소하기도 했다. 병이 나서 객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도 있었다. 중간 중간 행하는 공식 의례(儀禮)는 양국 사이의 생생한 외교 현장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다양한 방식의 소통이 이루어졌다. 긴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우정이 싹트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의 이동은 그 자체가
총체적 문화 교류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숙소를 새로 짓고 좋아하는 음식 준비까지
조선에서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에도 막부는 영접을 위한 주요 관료들을 임명하고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들어갈 경비를 각 번에 할당시켜 조달하도록 했다.
또 통행하는 연로를 정비하고 이들이 묵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거나, 장소가 마땅치 않을 경우는 새로운 숙소를 지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원을 한 지역에 들여야 했기에 대개는 기존 건물의 규모로 수용하기 어려웠다.
특히 큰 지역이 아닌 경우는 대부분 건물을 새로 지어야 했다. 숙소를 짓는 것도 쉽지 않지만, 통신사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는
이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숙소를 애써 지었더라도 이들이 돌아간 후 건물을 다시 허물어버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편 에도성에서는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를 위한 준비도 함께 이루어졌다.
각 번이 조달해야 할 경비는 어느 지역에서든 커다란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통상 300~500명이라는 대규모의 인원이 묵을
곳과 먹을 것, 기타 생활필수품과 노동력의 조달, 물자 운반 문제, 연로 정비의 부담 등은 일본 각지의 영주가 동원되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고, 때로는 지역민 전원이 참여해야 하는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통신사가 한 차례 다녀가면 각 번의 경제력이 휘청거리곤 했다. 한편 이는 각 번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좋은
방편이 되기도 했다.
통신사행이 통과하는 연로변의 시가지 정비 움직임을 살펴보자. 1711년, 제8차 통신사행이 갈 때 발포된 도시법령의 내용을
보면 사행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도시 외관의 정비, 치안과 경비, 통행 지역민들의 행동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제 사항들이 내려졌던 것이다
보기 흉한 물건은 모두 들여놓을 것, 처마의 차양을 청소할 것, 벽이나 담이 손상된 곳은 수리하고 칠할 것, 손상된 지붕의
기와는 수리할 것, 골목 안의 상점도 깨끗이 정리할 것, 화재 예방을 위해 힘쓸 것, 조선인이 통과하는 거리는 특히 깨끗이
청소할 것, 조선인이 통과할 때 통행인들은 긴급한 용무를 제외하면 귀천을 불구하고 도로 양쪽에 멈추어 설 것, 조선인이
통과할 때 이층이나 창문에서 구경할 때에는 발을 치고 예의를 갖추어 구경할 것, 상가의 2층에서 구경할 때에는 큰 소리로
떠들거나 웃지 말고 조용히 구경할 것이며 소란스런 행동을 일체 하지 말 것, 화려한 빛깔의 비단 천막이나 금은 병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써도 됨. 조선인이 통과하는 연로변의 다리에서 보이는 건너편 강가에 땔감·나무 등을 쌓아둘
경우 가지런히 정리해둘 것, 처마 밑에는 물통 등을 늘어놓지 말 것, 연변 강가의 선박들은 질서정연하게 정비해놓고 흉한
선박은 뒤로 치울 것.
이러한 도시법령은 조선통신사들이 지나가는 길 대부분에 내려졌다. 그래서인지 사행록의 내용을 보면 깨끗한 시가지와
화려한 도시 풍경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을 갔을 때 마주치는 청결한 인상을 조선시대인들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조선의 사신을 맞기 위한 준비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음식이다. 통신사 행렬이 조선 땅을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하는
대마도(對馬島). 대마도는 부산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가까운 거리여서 조선과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음식부터 크게 달랐다. 이에 대마도 사람들은 조선 사신들이 오기 전에 이미 조선인들이 선호하는 음식의 목록을
만들어 준비해놓고 있었다.
대마도인이 파악한 조선인 선호 음식 목록
① 육류, 어패류 등
소, 멧돼지, 돼지, 사슴, 닭, 오리, 꿩, 계란, 도미, 전복, 대구, 청어, 방어, 삼치, 문어, 새우, 게, 대합, 새 종류의 고기.
대체로 생선류를 좋아함. 소금에 절인 물고기나 민물고기는 먹기는 해도 좋아하지는 않음.
② 야채, 해조류, 건어물 등
무, 파, 미나리, 우엉, 표고버섯, 참마, 순무, 가지, 기타 채소와 야채, 튀김류, 청각채, 미역, 기타 해조류, 건어물.
③ 과일류
수박, 감, 배, 귤, 향귤, 유자, 포도, 오이, 수분이 많은 과일류.
④ 면, 간식류 등
국수, 메밀국수, 만두, 떡, 양갱, 막대사탕, 용안육, 빙과, 사탕류, 카스테라, 사탕절임, 꿀절임, 기타 과자류.
⑤ 주류
오래된 술, 소주 등. 대체로 술 종류는 모두 좋아함.
위의 목록을 보면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차려졌음을 알 수 있다. 육류, 어류, 야채류, 과일류, 간식류, 주류에 이르기까지
대마도인들이 사신 맞이를 위해 미리 파악한 조선인 선호 음식은 문서로 작성되어 각 아문(衙門)에 돌려지고 그에 따라 음식을
준비했다. 목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대체로 술 종류는 모두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술을 좋아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사신들이 묵는 곳에 나오는 음식도 이들이 파악한 조선인 선호 목록을 참조하여 준비되었다.
1763~1764년의 계미사행(癸未使行)에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元重擧)가 대마도에 묵을 때 지급된 음식들을 보면,
정사와 부사의 방에는 매일 좋은 백미 7홉과 감장(甘醬), 간장(艮醬), 식초, 소금, 참기름, 사슴다리, 방어, 산 닭, 달걀,
견절(가쓰오부시), 강고도리, 무, 생전복, 표고버섯, 마, 겨자, 산초, 꿀, 고비 등이었다. 이러한 식재료는 사행의 일원으로
참여한 요리사(숙수, 熟手)의 손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조리되어 나와 먹기도 했다.
공식 의례와 필담으로 쌓은 정
통신사들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의 국서를 안전하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중요한 장소를 지날 때에는 일본이
베푸는 공식 의례에 참여했다. 사행이 부산을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면 배에서 내리는 의례가 있었고, 대마도에서 통신사의
도착을 환영하는 연향인 하선연(下船宴), 관백(關白)이 보낸 사자가 문안하는 중로문안의(中路問安儀), 에도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연향인 하마연(下馬宴),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 국서에 대한 회답서를 받는 의례인 수회답의(受回答儀),
에도를 떠날 때 전별하는 의미로 베푸는 연향인 상마연(上馬宴), 다시 대마도로 돌아와 조선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 전의
상선연(上船宴) 등이 이어졌다. 그 밖에 1636년(인조 14), 1643년(인조 21), 1655년(효종 6)의 세 차례 사행 때 행해진
닛코에서의 분향과 치제(致祭)를 비롯하여 양측의 상견례 등도 공식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공식 의례들 외에 일본인들의 요청에 응해 글을 지어주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의 글을 받는
것을 매우 영예롭게 여겼다.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글을 받아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소위 문사(文士)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어지럽게 와서 수창(酬唱)을 하느라 번거로웠노라는 기록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심지어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 몰려들어 종이와 붓을 내밀며 글을 써달라고 요청하는 모습도 발견된다.
원중거의 『승사록』에는 그곳 사람들과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해놓은 기록이 있다. 그들은 필담으로
묻고 답한 모든 기록을 거두어 품안에 집어넣고, 혹여 남은 자료가 있으면 두 손을 모으면서 간절하게 달라고 청하여
모조리 가져가기도 했다. 그 지역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소매에 작은 종이 네 조각을 넣어왔는데, 부친의 60세 수연(壽宴)을
위한 시문(詩文)을 청하는 글이었다. 이들에게 시를 써주고 차운(次韻)을 하면서 날이 샐 때까지 긴 시간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처럼 통신사들의 글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왜인들로 인해 밤을 지새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배 위에서 펼쳐지는 즉석 음악회
왕명을 받고 사행길에 오른 후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에도까지 가서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와야 하는 먼 길은 통신사들의
몸을 고단하게 했다. 때로는 폭풍을 만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도 이르고, 때로는 신선이 머무는 장소인 듯 아름다운 풍경과
선한 사람을 만나는 등 온갖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이 길이었다. 그나마 이들에게 포근한 안식을 주는 것은 함께
수행한 음악인들이 연주하는 조선의 음악이었다.
1763년(영조 39) 조엄(趙曮, 1719∼1777)을 정사로 하여 떠난 제11차 통신사행에 서기(書記)로 참여하여 작성한 원중거의
『승사록(乘槎錄)』에는 긴 여정 중간 중간 펼쳐진 즉석 음악회의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10월 7일, 일행이 대마도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매일 제공되는 음식(日供) 지급이 잘 되지 않고 날씨도 으슬으슬 추운 어느 날이었다.
원중거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등이 머무는 방을 가보니 바닥의 깔개가 몹시 차가워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특히 온돌에
익숙해 있는 조선인들에게 차가운 바닥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고국이 더 그리워지는 때이다. 바로 이런 때에도 사람들은 마음을 달래며 음악을 연주하고
들었다. 배 위에서 연주를 시작하니 선장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멋진 즉석 음악회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배 수십 척이 동서로 다가와 에워싸며 구경을 하였다. 그중에는 여인이 부리는 배도 있었다.
머리를 정수리에 묶고 앞부분에는 나무로 된 빗을 꽂은 여인이었다. 여성 뱃사공도 구경하고 음악감상도 함께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대가 되고 객석이 되었던 즉석 음악회 장면이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11월 17일, 이들 일행이 풍본포(風本浦)에 정박해서 다음 일정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하늘이 잔뜩 찌푸리며 비를 뿌리다가 멈추고 또다시 비가 쏟아지는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식사를 마친 이들 가운데 몇몇이
어울려 악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산기슭에 오르니 일본 사람들이 이들을 위해 자리를 깔고 사방에 대나무를 꽂아 네모난 울타리를
만들어놓았다. 자그마한 무대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사람들이 빙 둘러앉자 악대가 각자 담당한 악기 하나씩을 꺼내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음악에 맞추어 사령(使令) 두 사람이 마주 대하고 춤을 추었다. 음악이 울려 퍼지자 일본의 남녀노소가 모여들어 구경을 했다.
자연스레 무대와 객석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금도(禁徒) 들이 막대기를 휘휘 저어 이들을 쫓아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비실비실 물러나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이에 원중거는 통사(通事)를 시켜 사람들이 그냥 구경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고 명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죽 늘어앉아 구경을 했다. 이러한 정경은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자주 목격되는 것이었다.
괴이하고 신기한 풍속을 숭상하는 사람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조선통신사들이 접한 이들 가운데에는 전복을 먹지 않는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원중거가 날씨 때문에 발이 묶여 어느 곳에 머물고 있던 때였다. 그 지역 태수가 ‘관포(串鮑)’라고 하는, 꼬치에 꿴 마른 전복 한 궤씩을
선물로 보내왔다. 생전복을 잘라서 대나무 꼬치에 꿰어 말린 것인데, 이를 받아 수고한 왜인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왜인 가운데 평여민(平如敏)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복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전복이 선조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선조가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바위에 부딪혀 그만 구멍이 뚫렸는데, 그 구멍으로 물이 들어와 배가 침몰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구멍이 서서히 막히더니 점점 작아져 결국 침몰하지 않고 안전하게 배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구멍이 난 곳을
살펴봤더니 커다란 전복이 그 구멍에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 선조는 자손들에게 전복을 먹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후손들은 그것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당시 포구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전복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원중거는 “풍속이 신기하고 괴이한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공식 행사가 없을 때면 자칫 지루한 나날을 보내야 하는 사행원들에게 그 지역 태수가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다.
원중거는 태수가 보내온 찬합에 대한 이야기도 사행록에 세밀하게 기록해놓았다. 칠을 한 삼중 찬합의 위층에는 밥을 담았는데,
흰쌀을 찧고 검은 깨를 더해 정성스럽게 만든 밥이었다. 또 가운데층에는 익힌 전복과 도미, 가물치 같은 생선 종류를 담았고
아래층에는 갖은 야채를 담았는데, 모두 깨끗하고 가지런했지만 물건을 풍부하게 담지는 않았다고 했다.
원중거는 이에 대해 “오직 정결한 것을 높인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공식 의례로 주요 인물들이 모두 의례에 참여할 때면 숙소에는 사람들 일부가 남아 이를 지키기도 했다. 일행이 환영의례인
하선연에 참여했을 때 원중거는 숙소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었다. 그때 왜인 금도(禁徒)가 10세 되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아이는 예쁘게 절을 하고 꿇어앉았는데, 단아하고 모습이 예뻤다.
이에 떡을 내 먹도록 하니, 머리를 숙여 절을 한 후 일어나서 공손히 받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절반만 맛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어 나머지 절반을 쌌다.
갈 때에도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며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니 금도가 문밖에 서서 예절바른 아이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다.
원중거는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부모의 사랑이 깊어 어려서부터 예절교육을 잘 받은 것”이라 칭찬하는 한편, “일본의 풍속을
어찌 교화하지 못하겠는가”라며 몹시 애석해했다.
통신사들의 시선에 비친 괴이한 풍속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남창(男娼)의 풍속이었다.
통신사들이 남창에 대해 묘사한 바에 의하면 “요망스럽고 아리따운 것이 여자보다도 훨씬 더 곱다”고 했다.
남창들의 나이는 대략 열서너 살부터 스물여덟 살에 이른다고 했다. 여자보다도 예쁜 남자들의 모습은 어떨까. 머리에는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게 하여 마치 옻칠을 한 듯 곱게 빗었다. 또한 눈썹을 예쁘게 그리고, 얼굴에는
분을 하얗게 발랐다. 거기에 화려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려넣은 옷차림을 하고 부채를 들고 요염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아름다운 꽃과 같이 보인다고 묘사했다.
당시 귀족이나 부자들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그들을 기르고 밤낮으로 출입하여 모시고 따르도록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일반 백성들까지 남창을 사서 데리고 있었는데, 간혹 이들 사이에 질투로 사람을 죽이는 사건도 벌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통신사들의 시선에 괴이하게 비쳤을 터이고 그리하여 그 내용이 사행록에도 기록된 것이다.
통신사들은 여정이 길 때면 일본에서 새해를 맞이하기도 했다. 사행록에는 일본의 새해 풍경도 묘사되어 있다.
특히 집집마다 대문 왼쪽에 새끼로 초목의 푸른 가지를 꿰어서 문에 이어놓는 모습이 이색적으로 보였는데,
이는 새해에 화를 막는 방법이라고 했다. 또 12월 30일 밤이면 곳곳에서 북을 두드리고 굿을 하면서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것을 떠들썩하게 축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등불과 촛불은 거리에 가득하고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며 세배를 하고 축하하는 것이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다고 묘사했다.
또 새해의 음식인 떡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원중거가 대마도에 머물고 있을 때 왜(倭)의 통사가 그 지역 태수가 보낸
‘생면병(生糆餠)’이라는 떡을 새해 선물로 가져왔는데, 그 모양이 마치 둥근 종과 같았다.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새해이지만 한 해의 시름을 모두 덜어놓고 열린 마음으로 선물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하는 정경만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통신사 행렬의 흔적들
현재 전하는 일본 인형 중에 ‘쓰네이시 하리코 인형’이란 것이 있다. 인형 제작자가 쓰네이시(沼隈常石)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목형(木型)에 종이를 발라 말린 후 목형은 빼내고 그 위에 조개껍데기를 갈아 만든 흰빛의 안료를
칠한 위에 다시 채색하여 만든 자그마한 인형이다. 수염이 있는 남성의 모습이며 붉은색, 푸른색, 검정색 옷을 입고 손에는
누런빛의 관악기 하나씩을 들고 있는데 악기가 길어서 오른발 끝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자그마한 크기의
이 ‘나팔 부는 남자’ 인형 제작은 메이지시대 이후 현재까지 3대째 가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제작자는 이 인형이 무엇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악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인형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조선통신사 연구의 초기 인물인 신기수(辛基秀) 선생에 의해 이 인형이 조선통신사를 수행한
악사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악기 모양으로 본다면 관악기인 ‘나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나발이라 하면
한 음만 소리낼 수 있고 신호용으로 곧잘 부는 군대용 악기로서 행진 음악인 취타(吹打)를 연주할 때 많이 쓰였다.
300~500명에 달하는 통신사 행렬은 일본 땅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곳 분위기를 압도했다. 거대한 규모의 인원이 전혀 보지
못했던 낯선 옷을 입고 악대가 연주하는 힘찬 음악에 맞추어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어느 누구라도 그 행렬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긴 나발을 앞으로 죽 내밀어 ‘뚜-뚜’ 불며 호방한 모습으로 행진하며 연주하는 악인(樂人)의 모습은
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이처럼 인형으로 재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형은 지금도 여전히 제작되어 사람들 곁에 남아 있다.
통신사 행렬에 대한 관심은 과거 통신사가 통과했던 몇몇 지역에서 지금도 행해지는 마쯔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통신사 행렬 자체를 재현하는 마쯔리에서는 통신사가 지나갈 때 들고 다니던 깃발과 복장 등을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의 당인(唐人) 행렬과 당자(唐子)춤이 곧 조선통신사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의 한 예이다.
한때 ‘당인’ 혹은 ‘당자’라는 이름에 ‘당(唐)’ 자를 쓴다는 이유로 중국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일본에서 사용되는
‘당’은 ‘외국’의 개념으로도 쓰인다. 당인을 ‘조선인’이라는 의미로도 쓰고 있으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조선통신사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당인춤은 1636년에 츠하치만궁(津八幡宮)의 제례의 일부로 시행되어 지금까지 전하는데,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선통신사의 행렬에서 모방한 것이다. 현재 연행되고 있는 당인춤의 행렬은 초인차(町印車)를 선두로 하여 대기(大旗)와
청도기(淸道旗), 나발 2, 춤, 그리고 피리 2, 징 2, 큰북, 작은북 2, 영기(令旗) 등 스물세 명이 행렬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가면을 쓰고 참가하는데, 매년 10월에 행해지는 이 축제에서는 아악(雅樂)의 하나인
월천악(越天樂)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미치바야시’라는 음악에 맞추어 행진하며, 이틀에 걸쳐 300호 이상의 집을
방문하면서 춤추는 방식으로 연행된다. 지난 1991년에는 미이켄 무형 민속문화재로 지정받기도 했다.
당인춤은 엄숙한 신사의 의례적인 요소가 강한 신악(神樂)과는 달리 축제의 분위기를 북돋우는 예능이 되었다.
당인을 맡아 춤추는 역할은 젊은 사람이 담당하며, 오곡의 풍요를 빌면서 춤을 추는 것으로 보아 농경사회의 특유한 의미도
담고 있다. 당인춤 계열은 메이지 초기까지 히로시마현을 위시한 각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통신사가 여러 차례 왕래한
도카이도(東海道)의 미에현(三重縣), 기후현(岐爭縣), 아이치현(愛知縣) 등에서 특히 성행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통신사 행렬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오카야마현(剛山縣)의 우시마도(牛窓)에는 통신사 행렬 가운데 소동(小童) 2인이 대무(對舞)하는 것을 보고 만든 춤으로
알려진 ‘당자용(唐子踊)’, 즉 당자춤(가라코 춤)이 전하고 있다. 현재 그 지역에는 조선통신사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 관련
자료를 접할 수 있다. 당자춤의 끝부분이 세 박자로 마무리되는 점, 춤추는 소년의 의상, 2인이 대무하는 전통 등이
조선통신사의 소동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용두산 공원에서 마지막 행렬을 보내고 이곳 광복동거리 가두행진을 보러왔다
일본에 대한 찬탄과 경계의 교차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문화적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로 일본에 갔던 통신사 가운데는
일본 문화를 접하고 충격을 받아 돌아오는 이도 많았다. 특히 18세기 일본의 번성한 출판문화는 그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중국의 책과 조선의 책을 취급하는 서점의 규모는 조선에 비할 바가 안 될 만큼 월등한 규모였다.
게다가 사행 기간 동안 자신들이 써준 글이 돌아오는 길에 이미 출판·유통되는 빠른 출판 속도는 조선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조선통신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이미 통신사와 관련된 그림이 판화로 제작되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시문화의 화려한 면모도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거리를 메운 남녀노소의 사치스러운 복색과 치장은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만들었고 주위의 화려한 건축물과 휘황찬란한 야경은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들을 태워가기 위해 나온
선박들은 엄청나게 화려해 보였다. 이러한 모든 정경은 조선의 문화적 우월감을 지그시 누르는 압력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본에 대한 경계의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 예로 거리를 지나면서 우연히 마주친 일본인들의
노동 현장을 묘사한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비해 체격이 작은 편이었으므로, 작은 체구지만 힘을 한데로
모아 노동하는 장면이 이들에게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사람이 연약하기에 큰일을 맡아 할 때는 힘을 나누어 쓴다.” “무거운 돌이나 큰 나무를 들어올릴 때, 선소리로
‘예사(曳沙)’라고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수십 명이라도 한목소리로 ‘예사’ 하고 받아 소리한다.” “빨리 할 때는
손을 휘둘러 몸을 흔들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데 응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한다.” “소리가 높고 낮고, 느리고 빠름에
따라 물건이 움직이는 것, 몸을 구부렸다 펴는 동작이 하나같이 한 사람이 하나의 힘으로 하는 듯하여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 “혹시 일을 나누어 맡아 하게 되는 경우 자신이 맡은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고 일이 험하든 쉽든 피하지 않는다.”
이러한 묘사 끝에는 반드시 촌평을 곁들였다. “대개 저들이 지난날 우리 땅에서 날뛰었던 것은 이와 같았기 때문인 듯하다
”라고 하여 그들의 단결된 노동력, 하나로 힘을 모으는 집중성에 대해 임진왜란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11차 사행에 다녀온 원중거가 통신사행에 다섯 가지 이익과 세 가지 폐단이 있다고 지적한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외교적 수행을 잘하면 변경이 편안해진다는 점, 일본의 지세와 백성의 풍속을 살피면 그들을 인도하거나 제압할 수 있다는 점,
일본 조정과 왕래하여 대마도의 폐해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 일본을 예속의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점 등이 이익이라 했다.
폐단이라고 한다면 사행 인원이 너무 많고, 역관의 권한이 너무 중하여 통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 교역하는 물품이 너무 번잡하고 많다는 점을 들었다. 결국 조선통신사라는 대규모 행렬은 1811년,
제12차 사행 때 대마도까지 가는 행렬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통신사의 일본여행기를 살펴보았다 .출처:조선사람의 세계여행에서
일본 참가팀들은 정말 진지하게 자기들의 동작을 선보인다
광복로에서 열린 조선통신사에서 일본참가자들은 전통의상을 입고 화려한 율동을 보이고 있다.
용두산공원의 급경사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외발 자전거를 잘 탄다
구경하는 시민들과 손도 잡아주고 일본에서 보았던 친절 그대로이다
후미에있는 여성은 계속 사진을 촬영하는 여유도 부린다
복장은 옛날 그대로인데 신발은 아니다 헤이세이 즉위식 때 가두행렬을 볼때는
이런 신발이 아니었는데
행렬대원 1,500여 명은 용두산공원에 집결 출발하여 광복동거리를 지나 항만공사까지 누빈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에 조선 국왕이 일본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 외교사절단이다.
통신사의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를 통해 교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의 케릭터
조선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조선 국왕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을 가리키며, 파견의 중요한
목적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조선 통신사는 일본으로 가서
조선 국왕의 국서와 예물을 교환하는 외교 사절의 임무 외에 시화, 춤, 의학 등 각종 문물을 활발하게 교류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오늘날 조선 통신사 축제는 당시 조선 통신사의 문화 교류 사절의 면모를 되살려 한국·일본 간의 교류를
심화하고 확대하며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기획된 사업이다.
오늘날 조선 통신사 축제는 1980년 쓰시마 섬[對馬島]의 아리랑 축제에서부터 시작된 조선 통신사 행렬 재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쓰시마 섬에서 행렬 재현을 담당하였던 아리랑 축제 팀이 2001년 부산 바다 축제 해변 퍼레이드에 참가하여
조선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것이 조선 통신사 축제의 시초이다
이듬해 2002년 한국·일본 두 나라가 월드컵 축구 경기 대회를 공동 개최한 때에 맞추어 조선통신사행렬재현위원회가
발족하여 다시 행렬 재현 행사가 열린 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최되어 지금까지 매년 한국과 일본의 주요 도시와
연계하여 수개월간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부산은 조선 통신사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이자 한일 문화 교류의
창구라는 역사적·지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축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 통신사 축제는 크게 행렬 재현, 한국·일본 문화 교류 이벤트, 학술 심포지엄으로 구성되며 크고 작은 행사들이 한국과
일본의 각 지역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다. 서울에서는 삼사(三使) 임명식이 창경궁에서 거행되며, 그 외 조선 통신사의
주요 노정이었던 충주, 안동, 경주, 밀양, 부산 등에서는 조선 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가 열린다. 조선 통신사가 거쳐 갔던
일본의 쓰시마 섬, 우시마 섬[牛島], 시모노세키[下關] 등지에서도 행렬 재현 행사를 비롯한 각종 문화 교류 행사가 개최된다.
부산에서의 조선 통신사 축제는 대체로 5월에 개최되며 조선 통신사 행렬 재현 외에도 영가대 해신제, 조선 통신사의 밤,
전별연[餞別宴], 조선 통신사 한·일 학술 심포지엄 등 다채로운 학술 문화 행사가 진행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옛 연안부두에가면 이런 배를 직접 타볼 수도 있는데 예약제 이기에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영도다리를 거처 자갈치 시장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위해 부두길을 걸어본다
6.25 피난시절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서로 해어지면 찾을 수가 없어
무조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사전 약조를 했다고 한다
매일 오후 2시가되면 저 다리가 45도로 들어 올려저 옛모습을 재현한다
2017년 10월에 본 모습
영도 수리 조선소가 있는 깡깡이마을
광어와 도다리회로 저녁식사를 하고 내일의 거제도 여행을 위해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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