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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지

거제도포로수용소(Koje POW Camp)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1년 2월에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1953년 7월까지 운영된 포로수용소이다.

거제도는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 수월하면서도, 당시에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어서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시설과 규모

1950년 11월 27일부터 유엔군에 의해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 장평동,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총면적

 12 km2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개시되었다.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 7, 8, 9 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수용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부상병 포로의 교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포로 교환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31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쌍방 간에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670명이었다.[

포로들의 석방과 송환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19일 이곳을 제외한 여덟 곳의 포로수용소에서 35,000명 가량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이곳에 있던 친공포로들은 북으로 송환되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 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하여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수용소 미군 헌병의 모습

포로수용소 전경

포로들이 무기를 들고 대항하는 모습














대동강 철교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되자 피난민들은 폭파된 평양의 철교를 타고

자유를 향해 처절하고 험난한 피난길에 올랐다














그시절 미군들이 타고 다닌 짚차


폭동사건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1 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 포로수용소에서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이 일어났다. 보트너 준장은 6월 10일에 도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포로를 분산 수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











포로들이 만든 무기류















어떤 엄마가 이렇게 깜찍한 아이에게 포로복을 입혀 옆에 앉혀놨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포로수용소 막사 내부

포로막사

포로를 수용하던 초기(1951년 1~3월)에는 천막막사로 포로들을 수용 하고 내부는 가마니등을 깔아

추위를 막았다 포로의 수가 급증하자 포로 자체 인력으로 아래쪽에 있는 흙벽돌 막사를 건립 했으며

이곳은 포로막사의 변천과정을 재현하였다

당시의 화장실


취사장

본 취사장은 당시 17만3천여 명의 포로들의 취사를 담당했던 곳으로 포로들 중에서 취사병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특히 취사장에서는 친공 반공 포로들이 각각 비밀 연락을 주고 받는

장소로 사용 하기도 하였다




경비대 본부 건물

M40 중급전차

6.25당시  사용하던 M463-7를 비롯하여 헬기, 8인치곡사포, 지휘용 장갑차, 함포등이 당시 경비본부와 탄약고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연상케하는 기존 유적지의 잔해들이 연계되어 볼 수 있다

미군 P.X 및 무도장 건물

경비대 막사

이곳은 당시 포로들의 경비를 담당했던 사병들의 막사로써 여기서 아래 쪽에 보이는

고현중학교에도 비슷한 막사가 5동 있으며 지금은 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미해군 군의관 순직 기념비

한국전쟁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의 한미 경비병과 포로 의무관리를 위하여

설치된 604 야전병원에 근무하던 미군 해군 소속의 군의관인 제네랄 마틴

대위가 1951년 9월27일에 순직함에 따라 그 뜻을 기리고자 당시 근무하던

미군들이 세운 순직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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