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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추원재 예림서원 혜산서원

 

위양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여기 김종직 선생 생가로왔다(5/18)

 

 

밀양을 대표하는 강은 밀양강이다. 밀양을 관통해 낙동강과 합류한다.
감내는 그 밀양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인데,감내란 이름엔 전해오는 내력이 있다. 
 선생이 태어나자 사흘 동안 물맛이 달아서 감내라 지었다한다.

 

[金宗直(김종직)선생 동상]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죽은 지 오륙년이 지나서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마저 찢긴 비극의 정치인. 생전에 지은 문집마저 불질러 버려라,
임금이 엄명한 비운의 문인이었다.
 그럼에도 영남 사림파의 開祖(개조)로 불리는 대학자.
'아닌 것은 아니오', 송곳 같은 정신을 내보인 풍운아.
연산군 무오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김종직의 글 한 편, 弔義帝文(조의제문).

 

 

추원재

추원재라는 뜻은 장례를 정성스럽게 치르고 조상의 제사를 잘 지내면 백성들의 덕이

커질 것이다 라는 의미라고 실제로 전국에 추원재라는 곳이 여러군데에 있다

향나무 김종직. 그의 학풍은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잇는다.
전향을 거부하고 피살된 정몽주,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낙향한
길재. 포은과 야은은 평생 뜻을 같이한 동지며 야은은 김종직 아버지 김숙자의 스승이다.

 

전심당

 

 [傳心堂(전심당) 현판]건물을 개조 重建(중건)하여 追遠齋(추원재)라 하고 堂號(당호)를 '傳心堂(전심당)'이라 하였다.  '傳心(전심)' 이라 함은 동방의 性理學(성리학)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에게 전했으며 아들 점필재에게 전하고,  점필재는 金宏弼(김굉필)과 鄭一竇(정일두), 탁영 金馹孫(김일손)에게 전했으니 점필재는 조선조 심학의 傳授者(전수자)라는 뜻이라한다.

 

 

 [ 生家(생가)] 김종직은 項羽(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懷王(회왕),
즉 義帝(의제)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端宗(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金馹孫(김일손)이
史官(사관)으로 있을 때 史草(사초)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成宗實錄(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李克墩(이극돈)으로 이른바 勳舊派(훈구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非行(비행)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奇貨(기화)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主流(주류)를 이루고 있는 士林派(사림파)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不忠(불충)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獄事(옥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戊午史禍(무오사화)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剖棺斬屍(부관참시)를 당하였고,
김일손, 權五福(권오복), 權景裕(권경유), 李穆(이목), 許盤(허반) 등이 斬首(참수)되었다

 출처 점필재 金宗直(김종직)선생 生家(생가)|초아님글

 

 

 

 

예림서원

독서루와 외삼문

 

서원은 국가에서 권장하고 사림에서 추천하는 유림만을 엄격하게 선별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 고등기육기관으로서 조선시대전기에는 전국에 29개소 밖에 설치되지 않았다

그중에 덕성서원(예림서원의 전신)은 전국에서 10위안에 들었다

 

예림서원은 명종22년에 당시 부사 이경우가 밀양유림의 요청으로 퇴계이황의 자문을 자시산 아래 영원사 엣터인

 지금의 밀양시 황성동에 서워을 짓고 덕성서원이라 하였다

.

 

현재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영남(嶺南) 유림의 종장(宗匠)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을 사숙(私淑)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지금은 김종직(金宗直)을 주벽(主壁)으로, 박한주(朴漢柱)을 동쪽에, 신계성(申季誠)을 서쪽에 모시고 밀양 유림(儒林)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본래는 1567년(명종 22)에 당시 부사(府使) 이경우(李慶祐)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아래 영원사(靈源寺) 옛터인 덕성동(德城洞)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고 불렀는데, 1635년(인조 13)에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禮林里)로 옮겼다가 1680년(숙종 6) 묘우(廟宇)가 소실되어 다시 지금의 부북면 후사포리(後沙浦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강제 훼철된 바 있으나1874년(고종 11) 향사림(鄕士林)의 노력으로 강당(講堂) 5칸과 동서재(東西齋) 등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하였고 1945년 광복(光復)후에 사액(賜額) 현판을 다시 달았는데 건물은 육덕사(育德祠), 정양문(正養門), 강당, 동재, 서재, 양몽재(養蒙齋), 독서루(讀書樓)등이 있다

 

태종에서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조선 봉건국가 체제는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의 반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의 실시 등 법제가 완성되고, 유학이 일어나면서 유교문화가 융성했다.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세조 이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했는데, 이로부터 정치·경제·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깊어갔다.

 

 훈구세력은 예종대와 성종 초년에 걸친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수렴청정기간 동안 남이(南怡), 구성군 준(龜城君浚)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척과 정실 등이 벌족을 이루면서 부패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세종대 이후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던 경제적 상황과 훈구파의 권력장악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한편 길재(吉再)로부터 학문적 연원을 갖는 사림파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점에서

토지겸병 확대현상을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이의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찾고 있었다.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 보급운동과 유향소(留鄕所) 재건운동을 통해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편성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같은 사림세력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꾀하게 되었다. 1498년의 무오사화가 그 시작이었다.

몽양재

몽양재란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집이라는 뜻.

 

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유자광·이극돈·

윤필상 등 집권세력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대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편 이극돈의 비행을

문제삼았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

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하고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등과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목·허반 등을 보름간 스스로 신문하여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하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나무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

며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서들이 불살라졌으며,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고 처형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맹·강혼 등은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논죄되었으며, 어세겸·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돈선재

두터운 우정과 선행으로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

직방재와 돈선재는 학생들이 기숙하는 동제와 사재이다.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중앙정계에서 일단 후퇴하게 되었다.

 사화로 많은 수의 사림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전횡과 훈구파의 득세로 분위기도 크게 경색되었다.

 

한편 이 옥사의 주모자 가운데 유자광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서 위세를 떨쳤으며, 이극돈은 잠시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곧 광원군(廣原君)으로 봉해지는 등 훈구파들은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그뒤에도 연산군과 중종의 재위 동안 사림파는

 잇단 사화를 겪으면서 훈구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사림은 재지(在地)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조선 성리학의 중심을 이루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도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봉님 글에서 

 

직방재

안과 밖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

시민재

때에 맞게 민첩하게 움직인다는  뜻

 

구영당

가득참 즉 완성됨을 추구한다는 뜻

일신제

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롭게라는 뜻

 

극준조약무생과실

'이치와 규약을 지극히 잘 따르면 잘못이 생겨날 수 없다'는 뜻이다. 김종직 선생이 원칙에

 충실하게 살았고,그 때문에 잘못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사당에서나 보는 것이지만 여기는 유득히 향나무가 많다

정양문

제사를 모시는 사당 내삼문

육덕사 사당에는중앙으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좌우에는 오졸재 박한주 선생과 송계 신계성 선생을 배향했다.

 

1470년부터 1480년대 초까지는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지방관을 거치면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불행도 겹쳐 세 아들을 모두 잃게 된다. 1482년에는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다.

 한 마디로 불행의 연속이다. 그래서 '죽은 아내에게 바치는 제문'이 더욱 절절하다.

 

적막해라 서편 방 그대 있던 곳이었네.            寂廖西閤 君其在玆옷 이불 대야 빗자루 그대 물건 그대로 있네.    衣衾盥櫛 象君平時음식과 기물도 편의대로 따랐건만                  飮食供具 亦且隨宜자식 낳은 수고에도 아이 하나 없으니             君昔劬勞 終無一兒

상복 입을 사람 누구인가 아아 모두 끝났구나.  執喪者誰 嗚呼已而

불두화

둥근형태의 꽃 모양이 부처님 머리모양을 닮았다 하여 불두화라 하였다.

정원수로 쓰이며 열매를 맺지 않는 상징적 의미 때문인지 사찰에 많이 심겨져 있다.

인동과의 낙엽지는 작은키나무이다. 불두화는 백당나무의 유성화를 없애버리고 무성화의

 꽃잎만 자라게 한 원예품종이다. 공 모양의 커다랗게 핀 꽃이 인상적이다.

몇백년은 된듯한 산수유나무 생각보다 열매는 많지가 않다

조의제문

운문체로 씌어졌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이 칠장복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서초패왕 항우를

세조에, 의제를 노산군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다

산에는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예림서원을 둘러보고 여기 밀양 산외면 다죽리 혜산서원으로왔다

 

 

일직 손 씨의 집성촌이며 산외면 면소재지인 다원 마을은 마을 곳곳에 흙과 돌로
쌓은 담장과 높은 대문으로 된 고택의 기와지붕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마을의 중심에 혜산서원이 있다.

격제선생 신도비각

내용은 위에 설명 참고

전사청 건물인듯

서원 입구 양쪽으로 웅장한 고목이 된 소나무가용트림하는 듯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서원을 보호하기 위해 사열하듯 자리하고 있었다.

 

상례문

산외면 다죽리 죽서(竹西)마을에 세거(世居)하는 일직(一直) 손씨(孫氏)의 5현(賢)을 받드는 서원으로 본래는 1753년(영조 29)에

 창건한 손조서(孫肇瑞)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던 자리이다. 손조서는 조선 초기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의 횡포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의와 탁절(卓節)로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오직 도학에만 전념한 학자인데

후일에 사림(士林)들의 추앙을 받아 이곳에 서원을 세웠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된 후

그 집을 “서산고택(西山古宅)” 또는 철운재(徹雲齋)로 편액(扁額) 하였다.

 

 1971년에 서원의 경역을 확장 정비하고 각지에 분산

봉안되었던 일직 손씨 명현 다섯 분의 서원(書院)인 정평공 손홍량(靖平公 孫洪亮)의 안동 타양서원(陀陽書院), 격재 손조서

(格齋 孫肇瑞)의 밀양 서산서원(西山書院),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의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 문탄 손린(聞灘 孫燐)의

대구 봉산서원(鳳山書院), 윤암 손우남(綸菴 孫宇男)의 영천 입암서원(立巖書院)등을 후손들의 세거지인 이곳으로 옮겨복설(

復設)하고 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중건한 것이다.

 

6백년 된 차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없덨는데 관광공사 사진을보니

위에사진 좌측에 가지치기를 한 나무가 바로 600년 된 차나무라고 한다

 

 

혜산서원이 있는 동네는 차나무 밭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다원이라 이름 붙었지만 현재는 차를 재배하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다만 혜산서원의 강당 앞에 오래된 차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나무 앞에는 한때 일직손씨 밀양 입향조인 손광공이 진성현감 시절에 진성(현재 산청군 단성면)에서

차나무를 가져와 식수했고, 현재 600년이 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최근 마을 어른들이 600년이 되지 않았다며 설명을 떼버렸다고 한다.

심경당과 정원당

1971년 惠山書院(혜산서원)으로 개칭하고 다른 4현을 모시던
4개 서원을 이곳으로 함께 옮겨와 孫洪亮(손공량). 孫處訥(손처눌).
孫?(손린). 孫宇男(손우남)의 四位(사위)를 追享(추향)하였다.

이곳으로 이건 된 4개 서원은
孫洪亮(손홍량)을 모시던 안동의 陀陽書院(타양서원),
孫處訥(손처눌). 孫?(손린)을 각각 모시던 대구의 靑湖書院(청호서원)과
鳳山書院(봉산서원), 孫宇男(손우남)을 모시던 영천의 立巖書院(입암서원)이다.

서원의 규모는 1,300여평의 대지 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中門), 전사당(典祀堂), 신도비각(神道碑閣), 다원서당(茶院書堂),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大門)등 13동의 건물이 경역에 자리잡고 있다.

동재와서재

담벼락 왼쪽편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고, 서원으로 들어간 뒤 돌아나온 뒤 만날 수 있는 담벼락 오른쪽에는

 어린아이들이 공부했던 서당이 있다.

 

서당 앞에는 작은 연못과 정원도 조성돼 있다. 강당과 사당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건물이 이렇게 배치된 것에는 서원철폐 당시 서원을 보존하기 위해 주택이나 조상을 모시는 재실로 위장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 점에서 씨족마을의 서원 배치와, 서원철폐령 이후 서원이 어떻게 변형돼 살아남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건물의 위치를 바꿔가며 서원을 지키려 한 선조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원서당

이이정

요사스러울 정도로 배배꼬여 자란 향나무

정원연못에는 노란 창포가 피어있다

다원재

 

서원찰폐령이 내려저 서산고택 철운재로 불리었다

숭덕사 5현을 모신 사당(손홍량.손조서.손처눌.손린.손우남)

성균관 진사 영모재 손선생 유허비

 

손씨고가

 

죽계서당 현판이 보인다

타지에서 오신분이 기거를 하신다고 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바라보았다

 

담장넘어로  찍어본 안채건물

여기는 연극배우이자 전 문화부장관을 하시던 손숙씨가 어렸을 때 살던집이다

담장이 높아 안에는 들여다 볼 수가 없고

손숙씨 친척이 인수해 살다 지금은 또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손숙의 일직손씨는 그 조상이 중국 송나라 때 망명온

서역인(유럽인)이라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고

손숙 생가 / 이양훈 지음

고향에 봄은

돌아왔네.

떠난 주인은

잊었어도

봄은 옛집을

찾아와

소꼽놀이 언덕을

다시 장식하고 있네.

 

허브나라 꽃새미 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초에 변계량 선생의 비각에 잠시 들렸다

 

변계량은 정도전과 권근의 뒤를 이어 조선초 관인문학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 진덕박사 등의 벼슬을 담당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과 권근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다.

변계량(卞季良)


내해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義) 아녀든 좇지 마라

우리는 천성 (天性)을 지키어 생긴대로 하리라.

 

 

내가 하기 좋다 하고 하여 남에게 싫은 일을 하지 말며

또 남이 한다고 하여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니거든 따라 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타고난 성품대로 나 생긴 대로 지내리라.

날씨도 더울뿐만 아니라 간밤에 잠을 설처 운전중 자꾸 눈이감겨 더 돌아 다닐 수가 없어

아까운 오후 시간을 뒤로하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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