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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후산리 은행나무. 관방제림.벌초

2년전에 왔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후산리 은행나무를 보기위해 건너다 보이는 은행나무 쪽으로

가는데 길초에 곱게핀 능소화를 만나 한컷 남기고



전라남도 기념물 제45호. 이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6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목이다.

이 나무는 일명 인조대왕(仁祖大王)의 계마행(繫馬杏)이라고도 한다.


고전천(高傳川)의 기록에 따르면 인조대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호남지방을 돌아오던 중 고전천의 소개로 인조는

후산에 살고 있는 명곡(明谷)오희도(吳希道)를 찾은 일이 있었다. 이때 명곡의 북쪽 뜰에는 은행나무가 있었고

 명옥헌(鳴玉軒) 뒤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들 나무 밑에 인조가 말고삐를 맨 일이 있다는 후세의 기록이 있다.

그 뒤부터 이들 나무를 각각 인조의 계마행(繫馬杏) 또는 계마동(繫馬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오동나무는 고사해서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가우라 바늘꽃

미국이 원산지이며 2년생 또는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한다.

전국적으로 관상용으로 식재하며 자연상태에서 월동하여 자란다.


높이 60∼150cm 정도이고 가지가 갈라져서 1개체의 폭이 60∼90cm 정도이다.

 잎몸은 길이 5∼9cm 정도의 긴 타원형으로 붉은빛이 돈다. 잎가장자리에 약간의 톱니가 있다.


 원추화서로 달리는 꽃은 지름이 1.5∼3cm 정도의 나비 모양이며 색깔은 흰색 내지 연분홍색이다.

 꽃잎은 4개이며 위의 2개는 작고 아래의 2개는 크다


수세미

박과에 속하는 덩굴성 한해살이 풀. 수세미외·수세미오이라고도 한다.

 열매 안의 그물 모양의 섬유질을 이용해서 수세미로 쓴다.

어린 열매를 먹을 수도 있다. 동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서 재배된다.

관방재 정자


맥문동이 활기를 잃은 듯 하지만 아직도 붉은 꽃들이 남아 있네




관방제림

천연기념물 제366호. 면적 4만 9,228㎡. 나무의 나이는 300년 내외이고 가슴높이의 줄기둘레는 1∼3m 정도이다.

담양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리는 곳으로 수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1648년(인조 26) 담양부사 성이성(成以性)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1794년(정조 18)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다시 제방을 중수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방제림은 담양읍 남산리 동정마을부터 시작해서 담양읍 천연리까지 이어지는데, 현재는 수북면 황금리를 거쳐 대전면 강의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현재 자라고 있는 나무의 종류는 푸조나무 111그루, 느티나무 43그루, 팽나무 18그루, 벚나무 9그루, 개서어나무 1그루, 곰의말채나무

 1그루, 엄나무 1그루 등 184그루이다. 나무를 심을 당시에는 왕버들·서어나무·갈참나무·이팝나무 등이 있었으나 최근 보고에는

이것들이 빠지고 은단풍나무가 1그루가 들어 있는 것이 다르다.

이곳에 양수장도 있었나본데 둘러봐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에 죽녹원이 보이지만 전에 방문을 했기에 벌초도 해야하고 시간상 생략을한다

제방을 따라 시민운동장이 있는 곳까지 걸어간다 이길로 계속가면 메타스퀘이야길과

메타프로방스가 나온다고 한다

중간중간에 이런 징검다리가 있어 건너는데 편리하게 이용을 할 수 가 있다


옥잠화

옥잠화는 백합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관상용으로 많이 가꾼다.

 잎은 둥근 알뿌리에서 떨기로 나오는데, 넓은 심장 모양으로 매우 크고, 긴 잎자루가 있으며,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이 있다.

 8~9월에 떨기 복판에서 30cm 가량의 꽃줄기가 나오고, 그 끝에 흰 꽃이 모여 핀다. 향기가 짙으나 저녁 때 피었다가

이튿날 아침이면 시든다. 열매는 삼각형의 달걀 모양이며, 관상용으로 정원에 흔히 가꾸고 있다.

 꽃봉오리가 마치 비녀 같아 '옥잠화'라 불리게 되었다.


1번나무부터 이렇게 번호표찰을 붙여놨다 푸조나무 일명 팽나무 포구나무라고도 불린다


밑둥을보면 세월을 말해주는 듯


제방 아래에는 이런 조각 공원도 보이는데 작품에 대한 설명은 없다



계요등

계요등이 한창 자랄 때 잎을 따서 손으로 비벼 보면 약간 구린 냄새가 난다.

그래서 계요등의 다른 이름은 구린내나무다. 또 속명 ‘Paederia’는 라틴어의 ‘paidor’에서 유래되었는데, 역시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봄과 여름에 냄새가 더 심하고 가을이 되면 거의 없어진다.

우리 이름인 계요등은 글자 그대로 닭 오줌 냄새가 나는 덩굴이란 뜻이다.










추성 경기장을 넘으면 나무들은 근래에 심은 나무들만있어 뒤돌아선다


반영도 담으며 반대방향을 택해 주차장으로 간다

왼쪽에는 메타스퀘이야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는데 이제 거의 지고 있다

반대편 제방에는 이렇게 프라타나스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저기 걷고있는 젊은 커플 여러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여유로워보인다

죽록원 앞에는 분수대도 있고 제법 광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쉼터의 의자도 대나무 고장을 잘 표현 호기심을 갖게한다

자전거 타는 사진을 담으려고 준비중인 듯


외삼문


명륜당은 새로 개축한 듯 명륜당은 유생들이 강학하는 곳이다



이건물들은 수학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방인 동재와 서재다

내삼문

대성전은 공자위 그의 제자들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단양향교는 다른 곳에 비해 초라한 모습이다

고려가 망하자 서해 절해고도로 몸을 숨긴 충신이 있었다.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뇌은(隱) 전귀생(田貴生)이다.

전우는 뇌은의 친형인 야은(隱) 전녹생(田綠生)의 후손이어서, 뇌은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야은 전녹생, 뇌은 전귀생,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이 삼형제를 여말 3은(麗末三隱·목은, 포은, 야은)에 견주어

 전씨 3은이라고 부르는데, 전우는 전씨 3은을 기리는 유허비문을 1899년에 짓기도 했다.


조선조에서가장 인상적인 인물로는 조선 성리학의 마침표를 찍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있다.
전우는 조선이 망하자, 서해 먼바다 왕등도로 몸을 숨겼다. 공자가 ‘논어’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乘浮于於海)”고 한 말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는 집안 선조의 유사한 판단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담양 전씨가 조선시대에 큰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데는 고려 말 전씨 3은의 여파가 크다.

전씨 3은이 모두 목숨을 걸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던 충신들이라 그 후손들이 조선 왕조와 잘 융화하지 못했다.  

전씨 3은은 고려 말에 은(隱)자 돌림의 호를 썼던 10은(隱)에 꼽힐 만큼, 삼형제가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따져보면 전씨 3은처럼, 삼형제가 함께 충신의 소리를 듣는 예도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  


 간재 전우에 대하여는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이나 여타문헌에 보면 자세히 알 수가 있다


향교를 돌아보고 여기 국수거리로 왔다





국수집의 메뉴들

마침 점심시간도 다가오고 국수거리에 왔으니 열무 비빔국수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이렇게 담양을 뒤로하고 비도 그치고 본격적인 벌초길에 오른다

부모님은 84년 86년 한해 걸러 두분다 돌아가시고 이제 내 나이가 부모님 돌아가실 때의 나이가 넘었다

세상이 많이 변해 손자들은 벌초도 성묘도 별로 관심이 없다 산소를 이대로 유지해야 될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고향에 살고 있는 사촌의 아래 산소는 잡풀 하나 없이 관리를 잘해 잔디만 무성한데 모처럼 찾은

우리 부모님 산소는 잡풀이 우북하여 마음이 참 무겁다 1년에 두번만 벌초를 해도 될텐데 마음만

있을 뿐 실천을 못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화려한 국화축제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