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광주.제주

화순 적벽강과 물염정 김삿갓 초분지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 유역과 무등산에서 발원한 영신천(靈神川)이 합류되어 약 7km에 걸쳐 수려한 절벽경관이

발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복댐 상류에 있는 적벽(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창랑리, 물염적벽 등

 4개의 군으로 나뉘어 있다.


적벽은 수려한 자연경관이라든가 웅장함 그리고 위락공간으로서 주변의 적절한 자연조건

 때문에, 동복댐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 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소동파가 선유하며 그 유명한 적벽부를

 지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깎아세운 듯한 수백척 단애절벽의 절경에 젖어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도

이곳에서 방랑을 멈추고 생을 마쳤다. 그러나 김삿갓을 비롯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좋아했던

상류의 노루 목적벽은 85년 동복댐 준공을 계기로 수몰되어 25m 가량 잠겨버렸다.


또한 1807년(순조 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회동면에서 출생하여 전국을 떠돌다가 이곳 적벽에

매료되어 1863년 4월 29일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김삿갓의 초분지

(初墳地 - 3년 후 차남이 고향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 모심)가 보존되어 있다.

그가 생전 동복에서 고향영월을 바라보며 그리워하였을 자리에 망향정(望鄕亭)을 건립하였다.



화순적벽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장항리,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 약 7km에 걸쳐 크고 작은 수많은

수려한 절벽경관이 발달하고 있는데, 휘어 있는 기암절벽으로 유명한 곳이다. 화순에서 대표되는 유명한

 절경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낙사(落死)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동복댐에 널리 분포한 노루목,

 물염, 보산, 창랑적벽들이 크게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 옆에도 관광지가 있어 관광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적벽은 동복댐 보호구역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1996년 12월 개설된

임도로 한결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적벽 앞에는 망미정, 보안사지석탑, 망향정 등이 있다.

망향정 건너편으로 적벽의 모태가 되는 웅장한 옹성산의 자태가 수려하다. 화순적벽은 옹성산의

서쪽 사면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동복호에 일부가 잠겨 있는 지금도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다.

 동복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스친다. 


노루목적벽

노루목적벽은 현재 동복댐 건축으로 인해 파손되었으나 그 전에는 수많은 시인들이 영감을

얻어갈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후 동복에 유배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물염적벽

물염적벽은 규모와 풍치면에선 노루목적벽보다 떨어지지만 그 건너 언덕 위에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이 위치해 있으므로 쉼터공간으로 유명하다.


보산적벽

보산적벽은 보산리의 하천가에 있는데, 조그마하고 물살이 잔잔하여 인기가 높으나,

최근 수심이 깊다는 것이 밝혀졌다.


창랑적벽

창랑적벽은 창랑리에 있는데 높이 40여m에 길이가 100여m가량 이어진 절벽군으로,

 장엄한 풍경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 중의 하나다.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에 있고,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구나.”

 적벽을 다녀간 방랑시인 난고 김병연(김삿갓)은 화순적벽의 수려한 풍경에 넋을 잃었다.

아마도 적벽의 절경에 매료되어 더는 방랑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물염적벽

적벽은 장동응회암과 적벽은회암의 백악기 퇴적층이 층리를 이루고 이를 조화롭게 덥고

있는 식생들로 인해 그풍경이 중국 양자강 상류의 적벽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야졌다

퇴적암층은 세립사암 실트스톤 이암 또는 응회질 사암이 시루떡처럼 얇게 교대로 쌓여

형성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정단층에 의해 지층의 어긋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1982년 10월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 56호로 지정되었다

나무들이 자라 시야를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세상을 등지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 김병연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중 욕설의 백미(白眉)가 자신을 모질게 박대한 시골 서당의 훈장을 향해 날린 다음과 같은 시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김삿갓이 시골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을 하며 내쫓는다.
화가 치민 김삿갓이 더러운 욕설시를 한 수 써 붙이고 나온다.(소리 나는 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제목이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입니다.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왔는데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방안엔 모두 높은 분들 뿐이고

학생제미십(學生諸未十): 학생은 모두 열 명도 안 되는데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 선생은 찾아와 보지도 않네.



김삿갓은 1841년 35세 때 광주 무등산을 넘어 화순을 처음 찾았다.
이후 1850년 두 번째로 화순을 찾아 구암마을 정치업의 사랑채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겼으며, 마지막으로 1857년 화순을 찾은 김삿갓은 1863년 57세
숨을 거둘 때까지 동복 구암리 정치업 사랑채에서 머물다 생을 마감한 후
마을 뒷산에 3년간 묻혔다가 강원도 영월로 후손이 이장해 갔다 한다.



김병연은 화순적벽 가운데서도 물염적벽을 자주 찾아 시를 읊었다고 전한다.

물염적벽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정자, 물염정이 있다.

지난 2004년 풍광이 수려하고 유서 깊은 정자로 뽑힌 8개 가운데 당당히 제1경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중엽에 물염 송정순이 세웠고, 1966년에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물염정 내부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시 28수가 걸려 있다. 중수 당시 마을의 배롱나무를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세운 기둥도 볼 만하다







물연정에서 바라본 상류의 모습 지금은 오염돼 잡풀만 무성하지만 그 시절 깨끗한 강가의

모습을 상상만해도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짐작이 간다








이런 적벽을 보려고 아래 전망 좋은 곳으로 내려 왔으나 밑에 사진처럼 숲이 우거져서

물염정 일부와 바위절벽 일부만 약간 보여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선다

이런 풍경은 나무를 잘라서라도  옛모습을 잘보이게 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4계절 멋진 풍광들이 존재하는 4개 적벽을 블친님들께 다 전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두곳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데

만족을 하고 이자리를 따나는 아쉬움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하고 위안을 해본다. (사전에 자료를 뒤저보고 올걸)

다음에 가시는분은 적벽관광지(동북면 사무소에서 들어가면됨)꼭 가보시라 권해드립니다



부산으로 가는 도중 동복면에 김삿갓 유적지가 있다하여 네비를 치니 안내아가씨

그런곳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주소를 모르니 어쩔 수 있나 면사무소에가서 물어 볼 수 밖에

면사무소를 찾다가 어느나이 지긋한분에게 물으니 구암리로 가란다. 시골에서는 다들 저리가세요

쭈욱 가세요 식이다 몇 분에게 구암리를 물으니 그렇고 그렇다 그래도 네비에 의존해서

동복면 구암리 물어서 찾아갔다 김삿갓 종명지 초분지라고 하면 금방 찾을 것을 네비양에게

 동북면 김삿갓 유적지만 물으니 네비양도 답답했겠다

1807년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안동 김씨 김안근과 어머니 함평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
이름 炳然(병연). 자 性深(성심). 호 蘭皐(난고).

 

1812년(6세)때 선천방어사로 재직 중이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 반란군에게 投降(투항) 함으로써 조부 김익순은 처형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어머니가 아들들의 장래를 위해 영월
산중으로 들어가 자식들을 공부시키며 숨어 살았다.


1826년(20세)때 장수 黃(황)씨 와 결혼,
그해 영월 도호부 백일장에서 시험을 보는데 課題(과제)가
'논정가산 충절사탄 김익순 죄통우천'으로 나와 글을 지어서 장원을
하였는데 역적의 후손임이 탄로 나 장원이 취소되고 병연도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되었다.

 

조상을 모독하여 큰 죄를 지었음을 痛感(통감)하고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하여 삿갓을 쓰고 방랑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1828년(22세)때 장남 학균을 1830년(24세) 차남 익균을 낳고 다시
출가하여 대지팡이에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 등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부자나 권력자들의 行悖(행패)를 嘲弄(조롱)하는
諧謔(해학)과 諷刺(풍자)하는 시를 남겼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이나 어려운 사람들의 인생사를 시로 엮으며
방방곡곡을 두루 섭렵 1841년(35세) 전라도로 내려와 광주에서
無等山(무등산) 長佛峙(장불치)를 넘어 꿈에도 못 잊어 그리워했던
동복 赤壁(적벽)을 보고 '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沙上流' 시를 지음



난고 김병연은 몰라도 방랑 시인 김삿갓하면 모르는 이 없죠.화순은 김삿갓과 특히 인연이 많은 곳입니다.

 김삿갓은 평생 화순을 3번 찾았으며 6년간 머물다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그의 방랑이 화순에서 끝을 맺었다.


백인당 정치업은 후손들의 교육을 위한 '경몽가'를 지어 대대로 실천하게 했다.
행신처사 편에  '내 집에 오는 손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을 남겼다고 한다.

 

화순을 두 번째 찾은 김삿갓도 그 소문을 듣고 정치업의 집을 찾아갔는데,
역시 소문대로 후하게 대접받자 마치 자기 고향집 같은 평온함을 찾았고
이후 세 번째 왔을 때도 사랑채에서 머물다 운명한 것이라 한다.

동복면 龜巖(구암) 마을 창원 丁氏(정씨) 童蒙敎官(동몽교관)댁
사랑채에서 머물면서 지내다가 그곳 사랑채에서 한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김삿갓은 평생 화순을 3번 찾았으며 6년간 머물다 방랑을 화순에서 멈췄다.
무엇이 김삿갓을 화순으로 세 번이나 오게 했으며 그를 여기서 운명하게 만들었을까?
바로 천하제일경 화순적벽의 풍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초아님글에서



안채의 모습 거주자가 없는 듯

다시 앞에 있는 문학동산으로 가본다

2009년 화순군에서는 그가 숨을 거둔 종명지에 안채를 비롯한 사랑채, 그리고 사당을 복원하였으며,
그의 주옥같은 삿갓詩(시) 중 50여수를 엄선하여
시비로 제작 2016년 3월에 문학동산을 완공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많은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1857년 지친 몸으로 말 년에 들린 곳이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였다.
그곳 명소 '赤壁(적벽)'에 매료되어 자연 경관을 즐기며 몇편의 시를 남겼고
아들 翼均(익균)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이 마을 押海丁氏(압해정씨)
창원군백인당파(派) 정씨의 종가 사랑채에서 기거하며 수려한 자연경관을 즐기며
詩想(시상)을 얻어 작품을 남기다 863년 57세를 일기로 終命(종명)하였다.


그는 해학적 민중시와 많은 변형시를 남겨 미국의 윗트먼,
일본의 이시카와 타쿠보쿠와 함께 세계 3대 詩(시) 혁명가로 꼽힌다.

 초아님 글 중에서


벌써 해가 서산에 걸려있다 갈길은 먼데 아직도 이렇게 있으니 야간 운전이 걱정된다

야박한 풍속

해질녁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니 주인들은 손을 내두르며 나그네를 물리치는구나

두견새도 야박한 인심을 알고 있는지 수풀을 사이에 두고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우는구나

비를 만나 시골집에서 자다

굽은 나무 서까래 처마 밑에는 먼지만 쌓였는데 방은 어찌나 좁은지 몸을 겨우 움직이네

평생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고 하지 않았는데 오늘 밤엔 다리하나 펴기도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들어오는 연기에 방안은 칠흑 같이 어둡고 봉창은 띠로 덥혀서 새벽 온줄도 모르겠네

그러나 의관이 이슬에 젖는 걸 면했으니 떠날 때는 가만히 주인에게 고맙다고 하리라

주막에서 술마실 것을 생각하며

천릿길 여정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떠돌다 보니 남은 돈 엽전 일곱 닢 오히려 많아 보이네

주머니 속 일곱 닢 깊이깊이 간직하려 했건만 석양녘 주막에서 술을 보았으니 내 어찌할꼬?


농가에서 하룻밤

종일토록 계곡을 걸었으나 사람을 못 보았는데  다행히 강가에서 작은 오두막집을 찾았도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왜씨 원년의 아득한 옛날 것이고 방은 전황씨 감자년에 겨우 먼지를 쓸었던 정도이네

검게 윤이 나는 그릇은 순임금 때의 질그릇 같고 붉은색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곡식 같더러

날이 밝자 주인에게 인사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일을 생각하니 입맛이 쓰디 쓰구나




경치가 어찌 좋은지 걸음마다 발을 멈추고 서서 바라보니산은 푸르고 바위는 흰데 그 사이사이 꽃이 피었네

만약화공에게 이 경치를 그려보게 한다면 숲속에 아름다운 새소리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

헛소리

푸른 산 그림자 속에서는 사슴이 알을 품었고흐르는 물속에는 게가 꼬리를 치는구나

석양에 절로 돌아가는 중은 상투가 석 자나 되고  베틀 위에서 베 짜는 여인의 불알이

한 말이나 되겠더라

송아지값 고소장

넉냥 일곱 전 주고 사 온 송아지를 푸른산 푸른물에 놓아서 푸른산 푸른 물로 길러왔는데

이웃집의 콩 먹고 자란 살찐 황소가 그 뿔로 송아지를 받았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리까?


상사화는 연분홍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흰꽃도 노랗꽃도 있다






맷돌

누가 산속의 바위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은 쉬지 않고 돌아도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가는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초분지가 여기서 300m라고 하니 한번 올라가 보자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이 숨지자 이곳에 임시로 묻었던 곳
3년 뒤 차남 익균이 아버지를 찾기위해 전국을 순회하다가 알게되여
강원도로 모셔 갔지만, 처음 묻었던 그 자리에 초분지란 비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사랑하는 블친님들 제가 오늘 서울로 해서 10월초까지 여행에 들어갑니다

썰렁한 방이지만 가끔 오셔서 거미줄 걷어 주시고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저역시도 다녀와서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Lady / Kenny Rog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