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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진안 마이산 탑사의 가을

11월 3일은 우리집안 시제가 있는 날이다

너무멀어서 격년제로 참석한다고 전에부터 예고를 했었고 금년에 참석하는 해이다

이번에도 옆지기와 둘이서 가면서 오면서 여러곳을 구경삼아 돌아보며 1박2일로 다녀왔다

부산에서 9시가 다되어 출발 마이산에 도착하니 11시가됐다

주말이라서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벌써 1주차장은 만차고 2주차장으로 안내를 한다

밖에서보니 멋진 나무 제품들이 있어 호기심에 들어가본다

여러가지 동물의 형상과 금수의 형상을보며 대나무 도마를 하나 구입했다

천년고찰 금당사


진안읍 마이산에는 금당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금당사는 814년(신라경덕왕 13년)에 혜강대사가 지은 절이며

이 절에는 목불 셋과 괘불이 있다.

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백제 고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며

중국의 승려혜강대사 지었다고한다

 마이산 금당사는 마이산에 오르는 입구에 위하고 있는데 여처차례 중수하였으며

금당사의 대웅전은 금색으로 채색되어 매우 화려하게 보인다. .

진안고원에 있는 2개의 암봉. 동봉을 숫마이봉(680m), 서봉을 암마이봉(687.4m)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이라고도 했으며, 조선시대부터는 산의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별칭이 많은데, 봄에는 안개 속의 두 봉우리가 쌍돛배를 닮아서 돛대봉, 여름에는

 숲 속에서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 덮인 들판 가운데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봉과 서봉은 약 20m 간격을 두고 있으며, 주위에는

부귀산·성수산 등이 있다. 기반암은 수성암이며, 산 전체가 거대한 암석산이나 정상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사방이 급경사로 이루어졌으며, 남쪽과 북쪽 사면에서는 섬진강과 금강의 지류가 각각 발원한다.

두 산봉은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북·서 사면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습한 북쪽 사면은 식생이 풍부하나 건조한 남쪽 사면은 식생이 빈약한 반면, 풍화작용으로 암석의 측면에

 동굴 형태의 구멍이 생기는 타포니(taffoni)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북쪽 산록에는 사양제 등 저수지가 있으며,

높이 400m 이상은 계단을 이용하여 산정으로 통한다.


절정기에 접어든 빨간 단풍을보며 내장산과 강천산을 생각하게 된다




고려 말 이성계(조선 태조)가 속금산(束金山)이라 개명하였는데 이는 마이산이 기(-쇠의 기운)

너무 강하여 나무()의 기운을 눌러 이()씨가 왕이 될 수 없다 하여 쇠()의 기운이 강한 마이산의

 정기를 묶는다는 의미의 속금산(束金山)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이후 태종 13, 태종이 몸소 나와 진안 성묘 산에서 제사를 지낸 후 마이산을 보고는 이미 이 씨가 왕이

되었는데 산의 기운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 하고 산이 말의 귀를 닮았으므로 마이산(馬耳山)이라 하라

하여 그때부터 마이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이산은 진안군 진안읍 단양리와 마령면 동촌리 경계에 있는 685m의 산이다.

마이산에는 서봉인 암마이산[685m]과 동봉인 수마이산[680m]의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두 봉우리의 모양이 말의 귀처럼 생겼다 하여 마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湧出峰)이라 하였고,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였으며, 신라 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 불렀다. 이성계는 속금산이라

 불렀으며, 조선 시대 태종이 남행(南幸)하여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암마이봉 남쪽 기슭에 위치하는 탑사(塔舍: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는 자연석으로 절묘하게 쌓아올린

 원추형기둥과도 같은 80여 개의 돌탑이며, 마이산 신 등을 모시는 탑이 있는 암자이다.

쌓아올린 지 100여 년이 지났으나,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아 더욱 신비감을 주며 중생들을 구제하고

 만인들의 죄를 속죄한다는 뜻으로 만불탑이라고도 한다.

이곳의 돌탑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똑같은 크기의 돌들을 첩첩이 수십 개 쌓아 올린 외줄탑이고,
다른 하나는 크고 작은 돌들로써 3~4미터 높이의 기단부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외줄탑을 세워 놓은

 피라미드형 돌탑이다.


돌탑의 높이는 사람의 키보다 조금 높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10여 미터, 어떤 것들은 20여 미터 정도가 된다.
돌의 크기는 두 손으로 안으면 가슴에 완전히 들어오는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두 팔로도 다 껴안을 수 없는

 것들까지 다양하다.

 
그렇지만 조그만 것들도 아주 무거워 혼자서 들기는 어려우며  큰 돌은 감히 들어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한다.

사람도 제대로 딛고 설 수 없는 절벽에도 이런 탑들이 쌓여져 있고 10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않았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지만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는다.

이전에는 탑사 아래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

탑사와 탑을 30년간에 걸처 쌓아 올린 이갑룡처사

축지법과 도를 이용하여 30년간에 80여개의 탑을 쌓았다고한다

만지면 툭하고 터질 것 같은 홍시

인증도 남기고

좌측에는 월광탑 우측에는 일광탑이라고 한다  저위에는 천지탑이다

이 천지탑은 이갑룡 처사가 만 3년에 걸쳐 쌓았으며,

축지법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고 힌다.

보는 쪽에서 왼쪽은 음탑, 오른쪽은 양탑이다.

이른바 음양의 조화를 이룬 탑이다




마이산 탑사는 현재 이갑룡 처사의 3대손 혜명 스님과 4대손 진성스님이 탑사를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높이까지 올라간 능소화

 누가 저런 곳까지 올라 저런 탐을 쌓았을까 밧줄타고 내려가 쌓았겠지?

마이산 탑은 108번뇌를 상징하기 위해 108개를 축조 했다는설과 ㅂ20개를 축조 했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는 80여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은수사 오르는 길 여기서 300m 올라간다







전설에 따르면 마이산에는 한 쌍의 두 신선이 자식을 낳고 살아가던 중 승천할 때가 이르러 남신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승천하는 장면을 보면 부정을 타서 안 되니 한방 중에 떠나자.” 하였으나, 여신은 밤에 떠나기는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하였다.

그래서 새벽에 떠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아침 일찍 물을 뜨러 온 동네 아낙이 승천하려는 장면을 보고 “어머나 산이 하늘로 올라가네!”

 하고 소리치자, 승천이 틀린 것을 안 남신이 화가 나서 “여편네 말을 듣다가 이 꼴이 되었다.”하고 여신으로부터 두 자식을 빼앗아

그 자리에서 바위산으로 주저앉았다. 그래서 진안읍에서 마이산을 보면 아빠봉은 새끼봉이 두 개가 붙어 있고,

서쪽 엄마봉은 죄스러운 마음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떨군 모습이라고 한다

지금도 민물고기 화석이 간혹 발견되는 것을 통해 마이산이 암석화하기 전에 호수나 하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이산 남쪽 사면에는 지름이 수 ㎝에서 수 m에 이르는 풍화된 구멍인 타포니(tafoni)가 많이 나타나는데,

역암의 메트릭스[matrix, 자갈 사이의 충진 물질]인 세립 물질[모래 성분]이 풍화되고 역(礫)[큰 자갈]이 빠져나감에

 따라 큰 구멍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사찰에 비해 산신각이 배는 더 큰 것 같다

금강의 발원지



이 감나무는 나에게 오랜 추억이 있는 감나무다

지금부터 50여년전 고등학생 때 가을 친구들과 은수사에 들렸는데 그때는 조그마한 암자

하나에 부부스님이 살았던듯 그때도 지금처럼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는데 욕심이나서

두친구가 올라가 감을 따는데 스님께서 큰소리치고 마구 달려오는것을  두친구가 스님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무사히 감을 따 줄행랑을 치며 배꼽잡고 웃었든 기억이 있다


지금 같았으면 신고하여 철창행이었을 텐데 그때는 그게 재미로하는 서리 였었다

저 감나무가 생각나서 혼자서 은수사까지 올라갔는데 지금은 저렇게 올라갈 수도 없을 만큼

커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감은 탐스럽게 잘도 익어간다


무량광전에 있는 부처님과 탱화 그리고 대광전이나 대웅전 이렇게 큰북이 설치 되어 있는 것은

여러 사찰을 다녀봤지만 처음보는 것이다

목어

목어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빚고 배 부분을 파낸 기구로, 이것을 걸어두고 아침저녁 예불 때 배 안쪽의 두 벽을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낸다. 물고기가 늘 눈을 뜨고 있듯이, 졸지 않고 정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는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츰 용의 머리에 물고기 몸을 한 형태로 변형되었고, 또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도 있다.


법고

‘가르침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즉, 북소리가 널리 퍼지듯 불법을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큰 북은 걸어두고 아침저녁 예불 때 두드리고, 작은 북은 의식 때 사용한다.


대적광전

대적광전의 부처님과 제자들

숫마이봉 중턱에 있는 화암굴 속의 약수를 마시고 산신에게 빌면 아들을 얻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수사에서 남쪽 약 2km에는 금당사가 위치하며, 금당사 경내에는 은행나무에 조각된 금당사목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금당사괘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4호) 등이 있다.

이곳으로 오르면 화암굴이 나오며 448계단을 오르면 북부주차장에 닿을 수 있다


금당사 남쪽 1km 아래에 위치하는 이 산묘에는 단군 성조, 조선 태조·세종·고종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지사·의병장 33위를 모신 영광사가 있다. 진안-천황문-은수사-마이산탑-금당사-진안, 금당사-탑사 왼편-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으나 급경사의 암벽길이다. 산정에는 평평한 공터, 돌탑 등이 있으며, 주변은 소나무숲이 우거져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주변에 운일암반일암 계곡, 풍혈(風穴), 냉천(冷泉), 덕유산국립공원 등의 명소가 있어

관광지로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대적광전의 벽화


메리골드.가우라.각종국화꽃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는 정원






주말이라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북새통이다





이렇게 마이산탑사를 둘러보고 익산 국화축제장으이동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