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에 서울에서 예식에 참여해야 되는데 느긋하게 있다가 예매 하려니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까지
매진이다 어쩔 수 없이 금요일 오전 열차 예매 서울에 도착하면 창경궁과 비원을 다녀올까
했는데 친구의 제안으로 인천 모노레일 바다열차 탑승하기로하고 인천으로 갔다
말도 많고 손실도 많았던 월미 모노레일 10월 8일부터 개통을 했다
인천역(仁川驛)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1가에 있는 경인선, 수인선의 시·종착역이자 환승역이다.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철도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과 함께 전철역이 되었다.
경인선의 부설권이 미국에 있었을 때, 인천역은 경인선을 우각동역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이어 현재의
축항구내 인근에 지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대 토지 소유자와 부지 협상이 결렬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건설하게 되었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은 심야에 완행 8편성과 급행 1편성이 주박하고, 수도권 전철 수인선은 심야에 2편성이 주박한다.
역 앞에 인천항이 있어 경인선 개통 당시에 ‘제물포역’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잘못된 것이다.
인천역 일대를 예전부터 인천 사람들은 ‘하인천’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인천역을 하인천역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2011년 10월부터 몇 년간 부기역명으로 ‘차이나타운’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역사는 1960년에 준공된 건물로, 2015년에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고 있다.
승강장에 지붕이 추가되었고, 대합실 등을 대리석으로 마감하였으나, 역사 건물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출구에는 2015년까지 인삿말("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이 적힌 표지판이 있었으나,
리모델링 이후 사라졌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1884년 이 지역이 청의 치외법권(治外法權, extraterritoriality)
지역으로지정되면서 생겨났다. 과거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물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현재는 거의가
중국 음식점이다. 현재 이 거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 내 거주 중국인들은 초기 정착민들의 2세나 3세들이어서
1세들이 지키고 있었던 전통문화를 많이는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중국의 맛만은 고수하고 있다.
차이나타운 내에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가 있다.
1901년 중산소학교로 개교한 이 학교는 한 때 학생수가 1,500명에 이르는 큰 학교였고, 평택이나 수원 등지에서도
화교들이 자녀를 입학시켰다. 지금의 학생 규모는 400여명이다. 1992년 8월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과 국교를 단절하였지만 학교는 여전히 중화민국의 소유로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매년 졸업생 중 10여명이 대만으로 유학간다. 유학생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1950년대 중반 졸업생
이수영을 들 수 있다. 당시 인천 당면 공장 화교 노동자의 딸이었던 이수영은 13세에 대만으로
유학하여 1961년 18세의 나이로 미스차이나에 선발되었다
바로가면 타는 줄 알고 차이나타운 중국관에서 간단히 짜장과 탕수육으로 식사를하고 매표를하려 갔더니
대기자들이 많아 1시간 40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시장구경하자 해서
신포국제시장으로 향한다
인천역에서 수인선 한정거장 신포역에서 내려 5~6분 걸으면 신포시장이다
해상교통과 육상교통이 맞물리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신포국제시장은 역사적으로 인천의 격심한 변화를 함께 겪어왔다.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이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시장으로 형성된 신포시장은 당시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롯해
여러 외국인들이 찾는 시장이었고, 말 그대로 국제시장이라 할 수 있었다.
신포국제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으로, 2002년 시장 현대화 작업을 통해 시설을 정비했다. 동인천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며 반찬거리를 파는 골목, 수산물을 파는 골목, 의류를 판매하는 골목 들이 구획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우리나라 재례시장은 어디를 가나 거기서 거기지만 특출나는게 하나씩은 있다
옛날 우리가 즐겨 먹었던 과자와 사탕 종류들 옛추억이 새록새록
광고는 그저 참고 사항이고 점심은 배불리 먹었는데 맛볼 수도 없고 그저 눈요기로 대신한다
친구는 여기서 만두와 빵을 구입하는데 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포국제시장의 어원
신포시장이라는 이름은 신포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포동은 바다로 통한 내가 있다고 해서 예부터
순우리말로 ‘터진개’ 또는 ‘탁포’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3년 개항 이후 이 마을은 터진개라는 이름을 한자로 써서
‘개포동’이라 불렀다. 1903년에 ‘새롭게 번창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라고 부르다가 일제에 의해 1914년
일본식 이름인 신정(新町)이 되었고, 해방 이후 우리식으로 지명을 고치면서 신포동으로 바꾸어 불렀다.
매립해서 새롭게 생긴 땅이 많은 지역이다.
골목을 들여다 보니 등대도 있고 횟집들이 줄지어 있다
엿집에는 손님이 없어요 구경하는 우리가 전부인듯
신포시장에는 닭강정도 유명한가 보다 여기 집단 닭강정 집들이 즐비하네
인천으로 들어와 살게 된 외국인들은 현재의 자유공원 인근에 ‘조계(租界)’라고 부르는 외국인 거주지를 형성했다.
일본인들은 주로 중앙동 일대에 살았고, 중국인(청나라)들은 선린동 일대에, 서양인들은 일본 조계 서쪽을 따라
일본과 중국 조계를 감싸듯이 거주했다. 오늘날 이 지역에 근대 건축물들이 즐비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개항 이후 일제는 한강과 인천 연안을 잇는 항로를 개설했고 서해의 항구들, 즉 진남포, 군산, 목포를 잇는 항로를
열어 인천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교통망을 갖추었다. 하지만 1899년 9월 경인철도가 부설되면서 육로를 통한 물류가
증가하고 장거리인 해상 물류는 약화되었다. 그 대신 인천의 연안과 황해도와 충청도를 잇는 근거리 해상무역이 발달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인천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장은 신포시장이었다.
현재 신포시장은 동인천역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신포시장은 외국인들의 거주지인 조계와 가까운 위치에 있어 다른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동인천역 북쪽에 있던 시장들이 일본인들에게 밀려나 고단한 삶을 살았던 가난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었다면, 동인천역 남쪽에 있던 시장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신포시장은 개항장이었던 중구 신포동에 개설된 시장이었다. 당시 신포시장은 채소를 취급하는 채소 시장과 수산물을
취급하는 어시장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어시장 서쪽에 닭전 거리에서는 닭과 달걀을 중심으로 육류를 팔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을 주로 했기에, 시장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채소 시장에 공급되는 채소는 주로 인천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이 재배한 것이었다.
당시 모습을 조형화한 조각상이 신포시장 내에 세워져 있는데 화농(華農)이라 불리던 중국인이 재배한 채소를
일본인이 사는 모습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오늘날의 인천 남구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들이 인천에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1887년 중국의 범선인 정크선 승무원들이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종자를 가져와 채소를 재배하면서였다.
인천의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
일제는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4년 ‘시장규칙’을 제정하고 시장의 공영화를 추진했다.
시장규칙에는 시장에 대한 정의와 경영 주체를 제한하는 규정이 들어 있어 행정관청의 기관장만이 시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27년 신포동에 개설되었던 시장을 행정관청인 인천부로 이관시키고 시장을 허가제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민간이 세운 시장이 모두 관청에 속하게 되었다.
물론 시장이 공영제로 바뀌었다 해도 기존 상인들의 권리는 그대로 인정받았다.
다만 채소와 과일은 인천물산주식회사가 대행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인천부가 경영했다.
그에 따라 과일류는 인현동 시장에서, 채소류는 신포동 시장에서 경매가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어시장은 제1공설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채소시장은 제2공설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또한 제1공설시장은 1929년에, 제2공설시장은 1933년에 건물을 세웠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신포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으로 꼽힌다.
또한 외국 문물이 유입되는 관문에 있는 시장이었다. “신포동에 없는 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개항장을 통해 들어온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그것들을 사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신포시장에서 신포국제시장으로
일제강점기 때 크게 성황을 이루었던 신포시장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건물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뼈대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다시 신포시장이 있던 자리로 모여들었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신포시장의 설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으로 엇갈린다. 1951년과 1970년으로 의견이 나뉘는데, 당시의 사정과 1955년
발간된 《인천석금》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1951년에 세워진 것이 맞는 듯하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천이 안전한 땅으로 인식되며 많은 피란민이 몰려들었다는 사실과 그 무렵 인천 동구에 배다리시장이나
송현자유시장 등 여러 개의 시장이 형성된 것에서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신포시장이라는 이름도 이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신포시장을 잠간 들여다 보고 시간 맞추어 매표소로 왔다
우리가 탑승 할 시간은 17시이다
드디어 탑승 모노레일 내부도 살펴보고
서서히 미끄러저가기 시작한다
월미바다열차 관광안내서에서 옮김
2019년 10월 8일 개통한 인천 월미도를 순환하는 국내 최장 도심형 관광모노레일이 2019년
한국관광공사가 제시한 한국인이 가봐야 할 곳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었다.
총 운행거리는 6.1km이며, 평균시속 10km의 속도로 월미도를 한 바퀴 순환하며 시간은 약 35분
소요되며,궤도차량 2량을 1편성으로 구성하여 최대 46명이 탑승 가능하다.
월미바다열차는 지상 7m부터 최고 18m까지의 높이에서 월미도 자연경관 및 인천내항,
서해바다와 멀리 인천대교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어 살고 싶은 도시 인천을 대표하는 새로운 관광명물이 되었다.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에서 운행되고 있는 관광용 궤도운송수단. 전체 구간 6.1km로 국내 최장의 도심형 관광모노레일이다.
동인천역, 인천역까지 연결되는 전체 3단계의 건설계획이 있었으나, 경인선 인천역과 월미도 사이를 잇는 1단계 사업만이
추진되었다. 1단계 사업은 2008년 7월 착공해, 이듬해 완공 및 운행될 예정이었으나 부실공사로 인한 안전성 문제로
개통일이 지연되어 착공 11년 만인 2019년 10월 8일 첫 운행을 시작했다. 전체 노선은 월미바다역, 월미공원역,
월미문화의거리역, 박물관역 4개 정거장으로 구성된다.
인천항 7부두에 위치한 곡물 저장 사일로(곡물저장시설)가 알록달록 새단장을 마치고 인천항의 랜드마크로 탈바꿈했다.
1979년 건립된 사일로는 대형 선박에서 하역한 곡물 저장용 창고다. 40년이 된 노후시설인 데다 둘레 525m, 높이 48m의
회색빛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시민들에게는 흉물로 인식돼왔다.
이에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지난 4월부터 미술 전문가 22명을 동원해 ‘수퍼그래픽 조성사업’을 벌였고, 벽화 전문 인력이
100일간 투입돼 86만5400L의 페인트를 사용해 완성했다.
이 수퍼그래픽은 지난 9월 20일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벽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벽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성장’이다.
벽화 디자인은 어린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형상화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북 커버 장식으로 그려졌고 성장과정을 의미하는 문구를 총 16권의 책 제목으로 담았다.
월미도
인천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약 1km 거리에 있다. 남쪽에 있는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 내항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
섬의 모양이 반달 꼬리처럼 휘어져 있다고 하여 월미도라고 한다. 섬의 최고지점은 94m이다.
1883년 인천 개항을 전후해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장미섬(Rose Island)이라는 명칭으로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월미공원의 느티나무는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중
월미도는 일제강점기에는 군사기지로 사용되었고,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중요시되면서
미군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1962년에 석축제방으로 매립되면서 해안도로를 건설해 인천의 관광 코스가 되었다.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인천항 방파제 주변의 여러 시설물을 정비하면서 시민의 휴식처와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너비 20m, 길이 0.8km의 해안도로를 따라 만남의 장, 교환의 장, 문화·예술의 장,
풍물의 장 등 4구간이 있고, 이 거리의 해안도로변에는 각종 카페와 횟집이 줄지어 있다.다음백과
해양경찰 선 수명을 다하여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듯
무지개 사료공장
월미산
유람선인지 여객선인지 지금 승객들이 승선중인듯
월미도 상가들도 하나둘 불이켜지고
2001년 6월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었고, 거리의 길이는 770m, 폭은 20m이다.
이 거리의 끝지점에 바다로 난 길이 있다. 문화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바닷가, 왼쪽으로는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다. 이 곳에서 매년 ‘월미관광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월미관광문화축제 중에 풍어제, 인천근해 갯가 노래, 뱃노래, 은율탈춤, 국악제 등 전통적인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다.
저 앞에는 영종도 신도시일까?
1980년 이후 관광지가 조성되어 각종 위락시설과 해수욕장·호텔이 갖추어져 있다.
1989년부터 꾸며진 문화의 거리에는 문화행사인 월미축제로 시민의 문화의식 고취와 지방예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있으며, 인근의 놀이공원과 함께 각광을 받는 곳이다.
관람차는 지금 휴식중
마이랜드 바이킹도 휴식중
저다리는 인천대교 같고
인천 해사고등학교도 보이고
인천 내항인듯
지리를 잘 몰라 세세히 설명을 못하는점 안타갑고 미니 카메라로 찍었고 또한 날이 어두어지고
창문이 선팅이 돼 있어서 많이 흐립니다 보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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