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천강 계곡 정자에서 야영을 할까 했는데 옆지기가 불편하다기에
백무동 야영장에 갔으나 예약마감 코로나 19 때문에 거리두기 텐트 설치로 들어갈 곳이 없다
국공직원 안내로 칠선계곡 사설 야영장으로 이동을 한다
칠선계곡 벽송사 입구 펜션과 야영장을 함께 운영하는 창산별곡
비가 오려고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덥여 있다
텐트를 설치하려고 준비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 원터치형이라 쉬이 설치를 했다
모두들 우리 보다 먼져와서 안전하게 자리를 잘 잡은 야영객들
우리부부는 구경 다닌다고 늦게야 도착 그래도 여름이라 19시도 안되어 어두어
지기까지는 여유가 있다
칠선계곡에도 물이 별로 없어 예전의 모습은 느낄 수가 없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된다 오늘 일정은 실상사를거쳐 노고단에 오르는 일정이다
이사진은 아침에 철수하기전 모습이다
편상위에 설치를 하니 비가와도 물들어 올 염려 없고 통풍도 잘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작년에도 사용했는데 1년사이에 텐트 접는 걸 잊어버렸다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데 옆에 텐트 젊은이가 친절하게 접어준다 고맙다는 인사말이 저절로 나온다
이것이 바로 나이 먹은 표시다 왜 그렇게 잊기를 좋아하는지
마천면사무소를거처 여기 남원 산내면 실상사로 왔다
실상사 천왕문 사찰마다 있는 사천왕 이번에는 생략하기로 한다
천왕문을 들어서니 보광전과 동서탑과 종각이 보인다
실상사
828년 신라 흥덕왕 때 개창(開創)한 최초의 선종 가람으로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소속의 전통 사찰이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당지장(西堂知藏)선사로부터 6조 혜능의 남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홍척국사가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아 현재의 지리산인 남악(南岳)에 실상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조계종 실상산파로 종명을 개칭한 고려시대는 실상사의 최대 융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127년~1130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도 창건 이후 약 300년이 지나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은 세종 재위 시에 불교계의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묶고 전국에 36개 사찰만을 남겨 놓았다.
당시 실상사는 본래 실상사의 말사였던 산내면 원천리 소재 원수사(源水寺)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말 이후 잦은 병화로 쇠퇴해지기 시작한 실상사는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되었다.
이후 200년간 절의 경역은 민간 경작지로 사용되어 왔다. 철불과 석탑만이 논바닥에 방치되어 오다가
1690년(숙종 16) 침허조사에 의해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36동의 건물을 중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침허조사가 중창한 대가람은 1883년과 1884년의 화재 사고로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등 3채의 불전과
승당 1채만 남겨두고 모두 전소되었다. 1884년 월송대사가 대적광전이 불탄 자리에 지금의 보광전 건물을 새로
중창하였다.
1911년 전국의 사찰을 통괄하는 30본산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실상사는 1912년 법찰 대본산인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새로 제정된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에 의한 전국 24 교구제에 따라 실상사는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가 되었다.
1995년부터 실상사의 옛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절 주위의 경작지를 매입하여 56,198㎡의 옛 절터를 회복하였다.
1996년~2005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창건 당시 가람의 규모와 역사적 변천을 확인하기 위하여 발굴
조사를 시행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그동안 몇 번의 화재로 소실되면서 나온 기와기 아닐까
범종각
서탑과동탑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의 두 탑은 형식이 동일한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지붕돌
[옥개석]을 올린 삼층석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넓은 지대석 위에 2층의 기단을 두었는데 하층,
상층 기단 모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표현되었다.
그 위로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올려져 있는데, 탑신의 폭에 비하여 높고 지붕돌의 처마가 짧아
전체적으로 길쭉하게 보인다.
탑신과 지붕돌은 각각 동일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와 탱주는 모각되었다.
지붕 받침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4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붕돌의 추녀 밑은 수평이지만
위쪽의 끝부분이 살짝 들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두 탑 모두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주목을 받고 있으며,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擦柱)를 중심으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차례대로 올려져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실상사 석등
석등은 석가모니의 진리를 불로 밝혀 전하는 것으로, 사찰의 법당 앞에 봉안된다.
땅 위에 지대석을 깔고 하대석(下臺石), 간주석(竿柱石), 상대석(上臺石)을 차례로 쌓아
그 위에 등불을 켜넣는 화사석(火舍石)을 놓고 지붕돌[옥개석]을 얹은 다음 꼭대기를
보주(寶珠)로 장식한다.
화사석(火舍石)에는 4면에 화창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상사 석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유행했던 고복형(鼓腹形) 석등으로, 장중하면서도 세부 조각이 아름다운 석등
가운데 하나이다.
남원 실상사 석등은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으면서 간주석 부분을 마치 북처럼
불룩하게 표현하여 흔히 고복형 석등이라고 불린다. 하대에는 8장의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꽃잎
끝부분에 귀꽃이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중대는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간의 북 모양 돌에는 세 줄의 띠를 두르고 8곳에 4엽문
(四葉紋)을 장식하였으며, 아래위로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각각 16엽씩 새겼다.
아래위의 북 모양 돌에도 동일한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상대는 8엽의 앙련을 조각하였으며, 위로는 8면 모두 화창(火窓)이 뚫린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을 8엽의 연꽃으로 장식한 점이 특징적인데, 모퉁이에는 모두 크고 화려한
귀꽃으로 장식하였다. 상륜부에는 고복형의 간(竿)과 8각 보개(寶蓋) 및 보주가 장식되었다.
남원 실상사 석등은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8각 석등 양식에서 벗어난 고복형(鼓腹形)
석등에 속하는 작품으로 각 부재가 완전할 뿐 아니라 받침대까지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석등으로서 통일신라 후기 석등의 형태를 잘 전해주고 있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호] 등과 함께 통일 신라 시대
고복형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석등 옆에는 불을 붙일 때 딛고 올라가는 받침대[燈階]가
함께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람하게 자란 소나무 한그루
보광전
템플스테이
보리수
섬초롱
'경남.울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산국가정원. 해바리기.황화코스모스 (0) | 2020.09.04 |
---|---|
울산 테마 식물 수목원 (0) | 2020.07.30 |
함양 벽송사와 서암정사 (0) | 2020.07.17 |
함양 상림 숲과 지안재 오도재 (0) | 2020.07.15 |
함양 화림동 계곡과 정자들 (0) | 2020.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