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게곡 매표소 가기전 숙소에서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라면으로 때우고 아침산책을 나선다
이른시간이라 매표소는 무사통과 바로 다리를 건넌다 실로 몇 년만이가 10년은 넘은 것 같고
20년은 안 된 것 같고(9/3)
저위에 보이는게 삼화사다 이번장마로 내린 빗물이 모여 계곡에는 제법 물이 많다
위 아래 계곡을 담으며 전진을한다
청옥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침식과 마식작용을 통해 항아리 모양의 상ㆍ중ㆍ하 3단의 바위용소(Pothole)를
형성하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제일 아래 계단을 밟으면 전체 암석이 동요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동석(動石)이라 불리며, 이 일대를 폭포골 또는 용추동이라 부른다. 상단ㆍ중단ㆍ하단 등 3단으로 연결되는
폭포는 전국에서 이 곳 뿐이며, 폭포들이 절묘하게 연결되는 형상과 주위 무릉계곡의 뛰어난 경관과의 조화는
매우 아름답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이 암각글을 보니 수덕사 입구 수덕여관의 이응노화백의 암각 글씨가 생각이난다
무릉반석 옆에 있는 금란정이다
김홍도의 금강 사군첩에 수록된 무릉계 그림이다
무릉계의 아름다운 계곡풍경이다
5000평방미터의 반석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 한장 남기고
떠나가 아쉬워 또 한장 찰칵 여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물론 이른 아침이니까 그렇겠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발길이 뜸한 이유도 있겠지
계곡으로 오르려면 여기 삼화사 일주문을 지나지 않을 수가 없다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도 담아보고
무릉계곡의 용오름길이 무려 6km나 된다니 놀랍다 위에글 참고
반석으로 이루어지는 계곡 때로는 이런 작은 폭포도 만나고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옛날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하였다.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가버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393년(태조 2) 조선의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
(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읍지(邑誌)에 의하면,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의 일로 적혀 있다.
또,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
(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
영은사라고 전한다.
또,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왔는데 그 용이 변하여 바위로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하며, 약사삼불의 손은 외적(外賊)이 잘라 땅 속에 묻었다고도 한다.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지었고, 1820년(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鄭元容)·
이기연(李紀淵)·이광도(李廣度)·윤청(尹晴)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년(고종 6) 화운(華雲)덕추(德秋)가 단청을 하였고, 1873년(고종 10)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
학송(鶴松)·창명(彰明) 등이 승당(僧堂)을 지었다.
이처럼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오다가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년 8월에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요사채·삼성각·육화료(六和寮)·큰방·천왕문·일주문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삼층석탑 1기를 비롯하여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
(元谷堂大禪師浮屠) 및 비(碑)가 있다.
삼화사 사천왕상은 다른 사찰에 비해 그리 험상궂은 상이 아니고 부드러운면이 있다
삼화사 수륙재
(三和寺 水陸齋)은 조선초기부터 온 수륙의 고혼 천도를 위하여 행해졌던 불교의례이다.
2013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수륙재는 조선초기부터 온 수륙의 고혼 천도를 위하여 행해졌던 불교의례로 조선왕조실록에 설행기록이
나타나는 등 역사성과 예술성이 높으며,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대중적 성격이 두드러지고
낮재․밤재 합설이라는 의례상 특수성을 지니므로 중요무형문화재 신규종목으로 지정하였다.
철조노사나불좌상
보물 제1292호. 강원도 동해시 삼화사 적광전(寂光殿)에 봉안된 철조노사나불좌상은 1996년 정밀조사
과정에서 불상 뒷면에 좌우가 뒤집혀 주조된 명문이 발견되었다. 도드라지게 새겨진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 있는데 140자 정도가 판독이 가능하며 화엄종과 관련된 사찰에서 결언스님이 중심이
되어 지역민들의 시주로 노사나불을 조성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12월 18일 보물 제1292호로 승격되었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은 파손이 심해 머리와 상반신만 남아있었던 철불로 1997년 복원 불사가 진행되어
현재는 대좌까지 갖춘 모습이다. 이 불상은 부드러운 얼굴과 단정한 이목구비, 통견식 대의의 도식적인
옷주름과 V자형 옷깃 그리고 훤히 드러나는 가슴과 승각기를 묶은 리본형 띠매듭 등이 특징이다.
소라형 나발이 촘촘히 표현된 머리에는 낮은 육계를 표현하였는데 머리와 육계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별도로
계주를 감입했던 구멍이 확인된다. 살이 오른 둥그스름한 얼굴은 이마가 좁고 두꺼운 눈두덩이와 좌우로
긴 눈, 짧은 인중, 도톰한 입술 등이 표현되어 부드럽고 자비로운 인상이다.
통견식 대의에 목깃이 V자형을 이루면서 드러낸 가슴과 옷주름은 층단식으로 도식적으로 흘러내렸으며,
겨드랑이 아래로 역U자형을 이루며 같은 간격으로 주름이 잡혀 있어 매우 독특하다. 등간격의 층단식
옷주름의 표현은 장흠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58년)이나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65년)
등과 유사하다.
좌우 협시불
무설전
불경을 강의 하는 곳이다
중대폭포 평소 때에는 폭포가 형성이 되지 않다가 비가 와야만 흐른다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중대폭포
본격적으로 한참을 오르다 보니 학소대에 도착했다
신선이 노닐만 하고 학이 노닐만한 아름다운 곳이다
관음 폭포가 50m라니 한번 올라가보자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상부폭포가 보일락 말락 나무에 가려 시야가 좁아진다
앞을 봐도 운동화로는 오를 수 없고 뒤로 가도 절벽 멋진 풍광을 담기는 역부족
부분적으로 줌인해서 최대한 담아봤는데 이정도 밖에 비가 안오면 그리 감동을 줄 폭포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은 비경인데 요즘 흔한 계단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든다
이정표에 있는 이사진으로 만족을 해야되겠다
이어지는 산수화들 뚝떼어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든다
뭐 금강산이 별거드냐 이정도면 사촌은 되겠지
모진 풍파에도 바위 틈에서 유유히 자라고 있는 소나무 그질긴 생명력이란 어디까지 일까?
장군바위
'서울.경기.강원.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백 구문소 (0) | 2020.10.12 |
---|---|
동해 무릉계곡 쌍폭과 용추폭포 (0) | 2020.10.07 |
태백 매봉산 바람의 언덕 (0) | 2020.09.19 |
시흥 갯골 생태공원 (0) | 2020.09.11 |
폐쇄된 관광지 태풍으로 폐허가된 임원항 (0) | 2020.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