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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낙안 돌탑공원

오래전부터 이곳의 돌탑을 알고 있었으나 기회가 되지 않아서 못와 봤는데

이번 코로나 방역 2단계 발령으로 꽁꽁묶여 집콕을 해야 하기에 주말에 옆지기와

바람도 쐴겸 순천 보성 화순의 몇 군데를 계획하고 출발을 하였다

바로 첫 번째 목적지가 여기 돌탑공원이다. 입장료 인당 3천원을 내고 입장을 한다

돌탑과 돌로 쌓은 건축작품이 110점이나 된다. 면적은 3300㎡ 정도다(11/28)

낙안 돌탑공원

낙안읍성 앞에 새로운 볼거리가 탄생했다. 낙안면사무소 앞 들판에 널려진 돌탑들이다.

납작한 작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사람 키를 훌쩍 넘긴 돌탑이 110여 개에 달한다.

세련된 자태는 아니지만 그 돌을 쌓아올린 이의 정성이 기특하다.

 

이 돌탑들은 인근 벌교에 사는 최병수씨 혼자서 일궈낸 '예술'이다.

그가 돌탑을 쌓게 된 사연은 이렇다. 벌교 읍내에서 아내와 옷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30년 전

지금의 이 땅을 사게 됐다.

 

매실농사를 지으려던 참에 그 땅에 누가 건축현장에서 나온 자갈더미를 잔뜩 버리고 갔고

그는 이 돌을 치우려다, "밭둑에 탑이나 한번 쌓아볼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쌓기 시작한 돌탑이 하나 둘 생겨날 때 꿈에서 노인 한 분이 나타나 계속 돌탑을 쌓으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단다.

 

꿈 속의 노인은 이후 또 나타나서 돌탑을 쌓으라 권했고 그도 돌탑을 쌓다 보니 건강도 좋아지고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아 아예 만사 제쳐두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탑을 쌓을 마땅한 돌을 구하러 전라도 땅을

다 돌아다닌다는 그는 "세상에서 제일 큰 돌탑공원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한국일보에서

운주사에있는 7층석탑을 연상케 하는 탑이다

사람의 생김새를 한 돌장승은 웃음을 짓게 한다.

얼굴과 표정이 저마다 다르다.

  하나같이 작고 넙적한 돌을 켜켜이 쌓아 올렸다.

돌탑과 돌 건축물이 즐비한 돌탑공원이다.

공원에 소나무와 회양목, 동백과 장미도 자라고 있다.

돌탑정원이다

한번도 모형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소원탑

이작품은 광화문 돌 하나 하나를 27년 동안 온 정성을 다해 쌓았는데 설계도도 없이

오로지 사진한장 들고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었다니 그집념이 참 대단하다

탑을 쌓는 일도 힘들지만, 적당한 돌을 찾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파리의 에펠탑 같이 생겼다 

나로우주센터에서 쏘아 올린 나로호도 돌탑으로 만들어져 있다. 높이가 6m 가량 된다

때아닌 장미꽃도 보고

애기 동백도 활짝 피었네

음양의 조화를 돌탑으로 표현한 작품

작품 하나 하나에 설명을 해놨으면 싶은데 작은 정성이 빠진 것 같아서 아쉽다

남대문을 형상화한 돌탑

숭례문은 한양의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다.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문이라고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무사했다.

지난 2008년 불이 났다. 한순간에 재로 변했다.

몇 년 동안 복원을 했다.

서울 남산타워

벌써 흰동백이 피어있네 애기 동백 종류인가?

어려서 시골 화단에서 보았던 맨드라미도 탐스럽게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화와 아주까리

국화와 달리아는 이제 점점 시들어 안녕을 고하는 것 같다

저기 보이는게 운주사 원형 다층 석탑과 칠층 석탑이다

최병수씨의 돌탑 쌓기는 나이 50살 때 시작됐다.

그는 젊은 날, 서울 평화시장에서 옷을 만들어 팔았다. 옷공장 사장이었다.

1970년대 후반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공장을 정리했다. 고향으로 내려왔다.

보성 벌교시장에서 옷장사를 했다. 시간이 흘러 옷가게가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번 돈으로 땅도 샀다. 농사를 짓고 싶었다. 옷가게 운영은 부인한테 맡겼다.

그리고 밭을 정리하다 나오는 돌로 탑을 쌓기 시작 했다고 한다

금전산

전남 순천에 위치한 금전산(해발 668m)은 조계산에서 뻗어나온 한 지맥이 남쪽으로 흘러내리며 고동산을

거쳐 일으킨 바위산이다. 이 금전산의 옛이름은 쇠산이었으나 100여년 전 금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자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금으로 된 돈 산이다. 그러나 실은 불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처의 뛰어난

제자들인 오백비구(혹은 오백나한)중 금전비구에서 산이름을 따왔다" 고 금강암 스님들은 말한다.

금강암은 백제 위덕왕 때 창건되었다. 승주향리지는 '위덕왕' 30년 583년 금둔사가 창건되었고 그 후

의상대사가 금강암, 수정암, 문주암 등 30여동의 사우를 가진 대찰로 중건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금둔사는 1985년 선원으로 재건된 것으로서 태고종 소속이며 금강암은 송광사에 속한

조계종 사암이다

울타리에는 피라칸사스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모습이 장독대위로 보이고

털머위도 아직 꽃으 피우고 사스타 데이지 인지 구절초인지 삐쭉 고개를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