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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뿌리 깊은나무 박물관

뿌리 깊은나무 박물관

낙안읍성 인근에 있는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은 故한창기 선생님이 생전에 모아오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광복 이후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우리 '토박이'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故한창기 선생님은 생전에 우리 것의 낡음과 투박한 것에서 문화를

창조하고자 하셨다. 보잘것없고 천대받던 것들이 지금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 되고, 조상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재탄생 되었다.

한창기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사장을 역임했고, 월간 문화종합잡지 〈뿌리깊은나무〉, 월간 여성문화잡지〈샘이깊은물〉를

발행·편집했다. 1976년 창간된 〈뿌리깊은나무〉는 한글전용, 가로쓰기, 일관된 문화적 시각 등 새로운 시도로

잡지계의 혁신을 일으켰으나, 1980년 8월 신군부 세력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한창기는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엔사이클로피디어브리태니커사에서 발간한 영문판〈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한국에 보급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1968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탄생하는 데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0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 뒤 출판활동에 진력해 〈한국의 발견〉,

〈뿌리깊은나무 민중 자서전〉 등을 출간했으며, 전통음악의 맥을 계승하고자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섯 마당〉, 〈브리태니커 팔도소리 전집〉등을 만들어 선보였다.

생전의 글을 모아 사후에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을 펴냈다.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공연한 최초의 인물로 8·15해방 이전의 한국무용계를 주도했다.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였던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민족주의적·국제주의적 성향이 섞여 있다.

그녀는 장기공연과 지속된 순회공연을 통해 대중의 인기를 모음으로써, 당시 춤 작품의 유통구조에

신기원을 열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보고 감명받아 무용에 입문하기로 하고 이시이 바쿠와 함께 도쿄로 떠났다.

1927년 가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공연할 때 한병용과 함께 출연했고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귀국하여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오빠와 함께 월북했다

순천시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시립박물관으로서
故(고) 한창기 선생이 생전에 모아오신 유물 6,500여점을
기증받아 전시. 보존 하고 있다.

 

1980년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뿌리깊은나무 이 한 권엔 민족 철학과 계몽의식 등 바르고

양심적인 것들이 가득 담기지 않았을까.

선생은 우리 것의 낡음과 투박한 것에서 문화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보잘 것 없고 천대받던 것들이 지금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 되고,
조상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자료로 재탄생되었다 할 수 있다.

우리의 것들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이신 고.한창기 선생의 오랜 노력이고,
많은 결실들이 이렇게 후세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숭고하다고 하겠다

한창기선생은 보성 징광문화를 일으키신 한상훈선생의 형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끝자락에서 태어나 세계인으로 살았던 20세기속  21세기인

굴레를 벗어나 푸른 하늘을 날 듯 자신만의 괘적을 남겼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을 뜨겁게 살다가 돌아갔지만 우리는 모른다

많은 이들의 삶 속에 알게 모르게 그의 흔적을 그리고 뜨거운 삶 속에도

헛헛한 겨울이 있었음을

어려운 한자도 빼고,
서구식 표현, 발음도 모두 순수 한글화 했다.
소개되는 문학도 서양문학은 모두 배제한채,

순수 우리 작가 혹은 작가등단의 등용문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1969년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험프리가 브리테니커 이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신이 만난 동양인중 영어에 가장 능통하다고 평가했다.한창기는 그때부터 이미 영어가

국제 통용어가 될 것 임을 알고 영어교육위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부리테니커 소속 재단법인 언어교육을 설립하고 산하의 학원을 통해 1970년대에 

흔하지 않던 원어민 영어교육을 시작했다

거북모양의 병들

정순왕후 국장 반차도

조선21대 영조의 계비의 국장 행렬도이다

한글과 한문이 병용되어 12m길이의 종이에 채색하여 그려진 기록화이다

반차도는 복잡한 의례 절차를 미리 그림으로 그린 후 국왕에게 보여 예에 어긋나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행렬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듯하다 조선시대 반차도의 백미는 가례 국장등 국가의 주요 행사를 그린 것으로 

당대의 명망있는 화원들이 참여하여 그렸다

박물관은 토기류, 기와류, 옹기류, 불교제례의식에
쓰인 금고와 바라, 은으로 만들어진 은제유개병 등
조선시대부터 쓰였던 민속품들과, 백자, 청자, 김홍도의 낙관이 있는
창해 낭구도 작품이 있으며,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정순왕후의 장례식을 담은
국장행렬도인 '정순왕후국장반차도'가 전시되어 있다.

이그림이 김홍도의 창해 낭구도 인데 여기서 보지를 못해서 가져온 그림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신사임당이 그렸다는 여덟 폭의 초충도(草蟲圖)와 두 폭의 발문이 함께 병풍으로 꾸며진 것이다.

발문은 양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제2폭에서 제7폭까지가 초충도이다.

편종

백자 항아리와 청화백자매죽문필통

의미 있는 일이라면 돈을 낙엽처럼 태울줄도 알아야 한다던 선생은 홀로지내면서

문화재를 수집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문화재를 보듬었다

선생이 마지막으로 수집한 문화재는 위의 백자청화 매죽문 필통이라고 한다

선생은 19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산은 성북동 자택 한채가 유일하다

선생이 수집한 문화재 6500여 점은 이제 우리의 유산이 됐다

여인도(조선시대 24X46.5)

샘이 깊은물 창간호에 표지로 쓰인 작가 미상의 민화이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광장:미술과 사회1900~2019)

2부에 대여 전시되었다

등잔

1970년대 말 한창기가 펼친 전통문화사업은 사실 쓰기만 하고 벌지 못하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돈을 낙엽처럼 태우는 듯 한 일이었다

정침 베갯모 베게

한창기는 일제의 우리문화 말살정책때문에 판소리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소리를 되살리고자 매주 1회 브리테니커 본사에서 무료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했고

100회 국립중앙 박물관 마당공연으로 마무리 했다 더 나아가 마지막 정통 판소리

<뿌리 깊은 나무 판소리> 5마탕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 있다

평생 사용했던 흡연도구

평소에 입던 옷들

한창기는 나이가 들어가며 한복으르 즐겨입었다 개량한복에 치어 원형을 잃은

전통 한복의 형태를 살려내려 <샘이 깊은 물>에 잘 입은 한복을 연재했다

한창기선생 유품들

빼어난 안목을 가졌던 한창기의 미적 감각은 개인용품에서도 반영되었다

1970~1980 년대에 구하기 힘들었던 명품이 많다

학위기와 문화훈장

세상을 뜬지 7년 만에 추서된 대한민국 문화훈장 유족이 대리수상하였다

상장으로 삶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는 될 것이다

한창기 선생의 모습들

한창기의서재

빛바랜 사진 속의 집무실은 한창기실 내에 재현하고 있다 그의 손길 닿은 유품과

성공의 반석이었던 브리테니커 백화사전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떠난지 20여년이 지났건만 책상위의 많은 것들은 아직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우리글의 뿌리를 언어에서부터 찾았던 한창기의 한글사랑은 집무실 한벽을 

온통 훈민정음으로 장식할 정도였다 그뜻을 기리는 용비어천가 족자가

위 집무실 사진 오른쪽에 걸려있다

박물관 건립에 헌신하신 분은 지난번에 보성벌교 징광문화를 소개했던 한창기선생의 동생

한상훈선생의 부인 차정금 재단 이시장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