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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예천 삼강주막과 초간정

엽전 조형물

조선말기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들의 숙식처를

제공하던 삼강주막의 활기찬 상업활동을 표현한 상징 조형물이다(4/11)

복원된 '경북 민속자료 제134호 삼강주막' 모습이다. 

이 자리에서 삼강주막을 운영하던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1917~2005)가 세상을 떠난 뒤,

 주인이 떠난 주막은 예천군에서 옛 모습대로 복원해서 관광지로 개발돼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삼강주막 뒤에 위치하고 있는 수령 450여년 된 회화나무이다. 회화나무의 꽃을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중국에선 괴(槐)는 '회'로 발음하기 때문에 회화나무가 되었다. '槐'는 나무 木(목)과 귀신 鬼(귀)를 합한

것인데 나무가 귀신을 물리친다고 믿어 집이나 절 같은 곳에 많이 심었다. 옛날엔 회화나무를 심으면

유명한 학자가 태어난다고 믿어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한다

회화나무는 옛날부터 신선이 되게 하는 나무로 알려질 만큼 좋은 효능을 가진 나무다.

또 곧게 자라고 자유롭게 뻗어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 회화나무는 선비의 나무다.

팔도의 선비들은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진사(進士)의 꿈을 키웠고, 양반들은 이사갈 때 씨앗을 꼭 챙겨

갔는데 집 앞에 심어 자신이 학자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큰 항아리를 뭍어 푸세식으로 사용했던 옛 화장실

시대의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 19세에 이곳으로 시집을 와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70년동안 삼강주막을 지켰다고 한다 2005년 10월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 복원하기 전의 마지막 모습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강 바닥에서 만나는 합수지점 옆에 있는 삼강주막(三江酒幕)은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어,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삼강주막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의 숙식처로, 때로는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건물이다. 1900년경에 지은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 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들돌의 유래

들돌은 일반적으로 농촌의 청년이 장성하여 농부(어른)로서 인정받는 의례에서 생겼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많은 물류의이동에 따라 인력이 필요하게 됐으며 이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삯을 책정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과연 저 회나무는 몇 년이나 살았을까

숫한 애환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늠늠한 모습이지만 생이 얼마 않 남았는지 군데군데 치료를 받고 있다

삼강나루터는 문경 주흘산맥과 안동 학가산맥, 대구 팔공산맥의 끝자락이 만나며,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는 수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예로부터 서울로 장사하러 가는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릴 때, 그리고 선비나 장꾼들이 문경세재를 넘어 서울로 갈 때 반드시 거쳐 가던

길목으로, 나루터 주변은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를 통한 농산물의 집산지였고, 대구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도로였기에 1960년대까지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었다.

 

더구나 이곳에는 강을 이어주는 나룻배 두 척이 오갔는데 큰 배는 소와 물류를 수송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작은 배는 15명의 사람을 태우는 교통수단으로 이용하였으나, 인근에 다리를 설치함으로

인하여 1980년경 나룻배 운항이 중단되었다. 2013년에 청소년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나룻배를 재현해 강나루를 오가고 있다.

옛 삼강나룻터는 없어지고, 세 강이 만나는 지점의 강 위를 가로질러 설치된 삼강다리의 모습이다.

삼강주막 건너편에는 강줄기가 마을을 350도 휘감으면서 고운 모래밭이 펼쳐지고, 산과 강이 태극 모양의

조화를 이룬 회룡포가 자리해 있다. 양쪽은 직선거리로 300m에 불과하지만, 다리가 없어 관광객들의

불편이 컸는데, 2012년에 다리가 완공되면서 삼강주막과 회룡포를 하나로 연결하게 되어 삼강주막은

더 많은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낙동강

옛 삼강주막에서 팔았던 국밥을 재현해 팔고 있는 식당이 있다

이렇게 삼강주막을 잠시 둘러보고 예천 초간정으로 왔다

입구에서 바라본 초간정의 모습

초간정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권문해(1534~1591)가 지은 정자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1626년(인조4)에

새로 지었으나, 다시 화재를 당하였다가 1739년(영조15), 1870(고종7)에 다시 짓고 고쳐지어 오늘에 이른다.

권문해는 선조 임금 연간 시작된 극심한 당쟁을 피해 낙향하여 학문에 몰입하며 말년을 보냈다.

권문해는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지리·역사·인물·문학·식물·동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간정은 풍류나 안식을 위해 지은 정자가 아니다. 조선시대 정자는 보통 관직에서 은퇴한

    사류가 노후의 안식을 위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세와 탐욕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은일하고자 하는 은둔자에 의해 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이나 은일과는 전혀 다른 학문과 집필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 정자가 있다. 오롯이

    묵향으로 가득 찬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초간’이라는 뜻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시 〈저주서간(滁州西澗)〉의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

     (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초간정 관리동을 민박체험장으로 활용을 하고 있다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관향이 예천이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그는

    유년 시절에 아버지 권지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았다. 초간의 행장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글을 읽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총명함이 넘쳤다고 한다. 일례로 역사서를 읽으면 눈에

    한 번 스친 것은 모두 기억하는 능력을 지녀 인물의 성정, 문장, 내용의 높고 낮음에 대해

    일별로 모두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우 문연(文淵)과 함께 용문사에서 공부할

    때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혹독하게 매진하여 늘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모자랐다고 한다.

    가학에 통달한 권문해는 1546년 한서암(寒棲庵)으로 가서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다.

    총명한 두뇌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그는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며, 명종 15년(1560)

    별시문과에 병과로 대과 급제한다.

    권문해는 명종조부터 선조에 걸쳐 벼슬길에 나갔다. 우부승지, 좌부승지, 관찰사, 목사

    등의 중앙관료와 지방수령을 역임했다. 그는 공주목사직을 사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기 위해 초당을 짓는다. 이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1582년 그가 49세 되던

    해 완성한 초간정은 그의 종가에서 약 2km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금곡천 계류가에

    조성되었다.

오래 전에 갔을 때의 모습 위 아래

 초간정의 기둥과 기둥 사이가 하나의 액자가 되어 멋진 풍경화를 담아낸다. 움직일 때마다 그림은 달라진다.

결국 풍경화를 만드는 사람은 그 풍경을 보는 사람이다. 난간 아래에는 작은 기암괴석이 솟아 있고,

바위 사이로 작은 계곡물이 졸졸졸 흘러 초간정 우측을 감싸며 흐른다.

계곡 건너 푸른 언덕에는 늠름한 소나무들이 있고, 그 가운데 비석 하나가 당당히 섰다.

 

초간정 마루에 잠시 앉아 계곡 소리를 BGM 삼아 소나무 원림을 바라본다.

정지화면에 계곡물만 소리 내며 흐르는 정중동의 시선, 이것이 정자 주인의 시선이다.

초간정을 세운 권문해도 이와 같은 풍광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동학과 제자들과 학문을 하며, '

대동운부군옥'을 썼을 것이다.

초간정의 정문 방향에는 초간정사(草澗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사란 학문에 정진하는

     집을 뜻하는 말로 초간정의 본래 이름이 초간정사였다. 정자를 지은 후 대사간을 지낸 박승임

      (朴承任, 1517~1586)이 정자의 이름을 ‘초간정사’라 지어 직접 글을 써서 보냈는데 지금 정자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초간정과 별채 사이에는 담으로 가로막아 엄격하게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학문을 위한 공간인 초간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이 잠겨있어 밖에서만 들여다 봤네요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1582년(선조 15)에 말년의 생활을 보내고자 원림을 조성하면서 함께

건립하였다. 당시의 이름은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 불렀는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이 지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1626년(인조 4)에 권문해의 아들인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다시 건립하였는데,

이 역시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오랫동안 고치지 못하였다가, 1739년(영조 15)에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옛 터에 집을 짓고는 바위 위에도 정자 3칸을 세웠다. 지금의 건물과 원림 배치는 이 때 만들어졌다.

그 뒤 1870년(고종 7)에『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포함한 권문해의 유고(遺稿)를 보관하기 위해서

거듭 고쳤지만, 예천 권씨 초간 종택에 백승각(白乘閣)을 지어 이를 다시 옮기면서 지금은 비어 있는 상태이다.

노구의 권문해는 초간정에서 집필에 몰두하여 56세 되던 1589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되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완성한다. 초간은 일찍이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잘 모르고 있어 이를 한탄했었다. 이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물건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의 남의 것만 주시하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우리나라 역사와 사적을 담은

     백과사전을 만들 뜻을 일찍이 품은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은 20권 20책으로 은나라 음사부의 《운부군옥》을 본떠 단군에서

     조선의 선조까지의 사실을 지리, 역사, 문학, 철학, 인물, 예술,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총망라한 방대한 저작이다. 초간은 이외에도 초간정 원림에서 《초간일기》, 《초간집》

,   《선조일록》, 《신묘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긴다. 《대동운부군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쓰인 것으로 선조 이전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 책의 판각이 보물 제87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초간정은 1739년에 지은 건물을 일컫는데, 주변의 원림 속에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금곡천(金谷川)을 바라보는 경관을 확보하려고 절벽 위에 지었기에, 북쪽과 서쪽은 담장이 없이 개울에

바로 붙어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받침 위에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고서 네모난 기둥을 세운 다음 5개의 도리로 꾸몄다.

기둥을 이은 창방(昌枋)과 도리를 받친 장여(長欐) 사이에 네모난 소로[小累]를 끼워 소박하게 장식한 소로수장

(小櫨修粧)집이다. 앞면 3칸 가운데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고, 개울 쪽으로 향한 3칸과 온돌방의

옆면 1칸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건물 4면에는 정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온돌방과 그 옆벽에는 칸마다 2짝의 세살 여닫이문을 달았고, 개울 쪽의 판벽에는 2짝의 판문을 달았다.

북쪽 면은 시야를 확보하려고 창호를 달지 않았다.

처마에는 남쪽에 초간정사, 북쪽에 초간정(草澗亭), 동쪽에 석조헌(夕釣軒)이라고쓴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가운데 초간정사라고 쓴 편액은 권문해가 처음으로 초간정사를 지을 때 박승임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곡천

출렁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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