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경기.강원.인천

포승전망대와 평택호

세계 식물원을 출발해 비가 내리는데 포승 전망대에 올랐다

우산을 쓰고서 사방이 캄캄하니 방향감각이 없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 안 간다

포승전망대는 평택항 홍보관이다

포승전망대 건물에 도착하니 문이 닫혀있고 냉냉하다

계단을 타고 옥상 전망대에 오르니 흐미하지만 서해대교와 마린센타가 보인다

앞에 보이는 곳은 평택항과 저쪽 바다 건너에는 부곡산업단지 인 것 같다

줌인해 봤지만 서해대교만 크게 보이고 선박들도 정박해 있지만 흐미하게 보일뿐 분간하기는 어렵다

위와 아래의 모습은 포승산업단지이다

포승전망대에서 평택호 관광단지로 왔다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는 평택호대교와 아산방조제다 

평택호 관광단지 오리배와 유람선이 보이는데 비도 내리고 관광객은 나뿐인 것 같다 

관광 안내소가 있지만 들어가 문의 하기도 그렇다 볼거리가 있어야

자세한 설명을 들어 보는데 주위를 돌아볼 엄두도 않나고 또한 실내는

페쇄가 돼 구경할 수도 없고 아래 광광 지도를 살펴보고 홍학사 비각을 찾아 간다

포의각

홍익한

본관은 남양.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로 끌려가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큰아버지 대성에게 입양되었으며,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사서·장령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청나라가 제호(帝號)를 쓰면서 사신을 보내 모욕적 조건을 제시하자, 상소를 올려 사신들을

즉각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의 화의론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사위 등은 모두 난중에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화친을 배척한

자들을 내놓으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반청의 자세로 버티다가 다른 2명의 학사와 함께 사형당했다.

홍익한은 사도세자 부인 혜경궁홍씨의 숙부이다 

평택 홍학사 비각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있는 홍익한(1586∼1637) 선생의 비를 보호하고 있는 건물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1964년 처음 지었고 1982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포의각이라고도 한다.

선생의 묘소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앞쪽 부분에 1964년 비각을 세울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홍익한 부부의 묘

 

오달제(吳達濟)

        1609(광해군1)∼1637(인조1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오경민(吳景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공감역을

지낸 오희문(吳希文)이고, 아버지는 오윤해(吳允諧)이며, 어머니는 최형록(崔亨綠)의 딸이다.

경기도 송탄의 이충부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34년(인조 12)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등을

거쳐 1635년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1636년 홍문관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後金)의 위협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5차례에 걸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淸)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파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한 뒤 적진(敵陣)에 송치되었으나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에

굽히지 않아 다시 심양(瀋陽)으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도 갖은 협박과 유혹에 굴하지 않아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에 그들의 충절을 찬양하여 후세에 삼학사(三學士)라 불렀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다. 묵매도 2점이 전한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양촌마을 산 45-14번지에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대낭장비

(帶囊藏碑)는 1824년(순조 24) 손자인 오경원(吳慶元)이 세운 것이다. 용인시 향토유적 3호이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현절사(顯節祠)·평택의 포충사(褒忠祠)·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윤 집(尹 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 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광주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이다.

팽성객사

평택 팽성읍 동서촌로 101-3(객사리)에 위치한 팽성객사는 조선 성종 19년(1488)에 지어졌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일제시대에는 양조장과 주택으로 사용되다 1994년 해체·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양 옆에 동ㆍ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달에 두번 절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붕도 동ㆍ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ㆍ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됐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지난 1989년 6월1일 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서울.경기.강원.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부도.바다향기 수목원  (0) 2021.06.02
평택 소풍정원  (0) 2021.05.31
오산 물향기수목원  (0) 2021.04.09
강릉 해변을 걸었다  (0) 2021.03.06
동해안으로 눈 구경 갔다  (0) 2021.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