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선몽대 뒤편의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된 우리 선조들의 풍수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100~200여년 수령의 소나무 노거수와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으며,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막이숲(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거나 풍수상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물길 등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 및 비보림(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보인다.
우암 이열도 선생의 유적비
내외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경산현감(慶山縣監)을 지낼 무렵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가 독서당 삼아 지은 조촐한 대가 바로 선몽대인데, 이렇게 이름을 지은 데에는 약간의 이야기가 있다.
퇴계 선생은 어느 날 밤 꿈에 신선이 되어 바람을 타고 선경을 유람하였다. 꿈에서 노닌 그 선경이 너무 아름다워
퇴계는 늘 잊지 못하고 그곳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던 중 예천에 살던 제자 이열도가 내성천 가에 대를 축조하고
그 일대의 풍경을 일러주며 대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이열도가 묘사하는 광경을 들은 퇴계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꿈속에서 신선이 되어 노닐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몽대’ 세 글자를 손수 써서 보내고
아울러 시 한 수를 함께 보내주었다.
노송과 높은 누대는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
松老高臺揷翠虛
강변의 흰 모래와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白沙靑壁畵難如
나는 이제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서니
吾今夜夜凭仙夢
예전에 이런 경치 감상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노라
莫恨前時趁賞疎
퇴계는 아끼던 종손(從孫)이자 문하생이었던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가 예천의 백송리에
선몽대(仙夢臺)를 지었을 때 손수 편액을 쓰고 〈선몽대란 제목을 지어 부치다(寄題仙夢臺)〉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이 시에는 선몽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탄하는 수사로 가득 차 있다.
선몽대의 경치는 정말 아름답다. 비단 같은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내성천, 시냇가 아래위로 넓게 펼쳐져
있는 흰 모래 벌판, 강변 모래밭 어귀에 줄지어 늘어선 노송 숲, 그리고 석벽 위로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정자의 모습은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와도 같은 비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몽대 일대는 기러기가 내성천에서 풍부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형이라고 하여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이라 전하고 있는데, 예천에서 안동 방향으로 흐르는 내성천의 강물과
십리에 이른다는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역사적 유래가 깊은 선몽대와 숲과 함께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경관적·역사적 가치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그 옛날 선몽대를 찾는 선비들은 가벼운 발걸음이 저절로 이곳을 향했을 것이다. 선몽대라면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 같다. 이곳에서는 동서로 흐르는 아름다운 풍광의 내성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몽대는 백송마을의 우측에서 앞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정자다. 암벽을 다듬어 경사진
터에 마치 석벽에 기대어놓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름을 선몽대라 한 것은 이곳에서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이후 건물을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고 오르는 계단도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내부는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어 편액이라던가 여러 현판들은 볼 수가 없었다
내성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선몽대(빌려온 사진임)
선몽대를 아름다운 비경으로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단연 내성천이다.
푸른 내성천의 물은 선몽대의 상류에서 크게 S자형으로 감돌아 흘러온 후 선몽대 앞에서 동에서
서로 물길을 따라 비단결처럼 여울져 내려간다. 이 여울은 매우 넓게 펼쳐져 있어 화창한 날 맑고
고요한 수면에 비친 선몽대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다. 그야말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 할 만하다
신선의 세계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예천 선몽대 일원은 2006년 11월 명승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의 선몽대 숲은 하천변의 경사진 모래밭에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숲의 규모가 축소되어 전통적인 원형이 위축된 상황이고 생육에도 지장을 받고 있다
선대동천
선몽대가 산찬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의미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말해주고 있다
선몽대에서 이곳 삼구정으로 왔다
부근에 소야정을 찾다가 우연치 않게 소야정은 못찾고 삼구정으로 왔다
소야정도 부근인 것 같은데 비슷한 정자 삼구정만 보기로 한다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과에 속하는 속씨식물. 한국에서는 황해도와 강원도 이남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이 원산지이고, 온대지역의 양지바른 곳에 서식한다. 크기는 7~17m 정도이다.
꽃은 초여름에 노란색으로 피며, 꽃말은 ‘자유로운 마음’, ‘기다림’이다. 열매는 녹색으로 가을에 익는다.
식물 전체를 정원수로 심는다.
보호수
소나무 지정일 1982년 10월 26일 수령 250년 수고 13m 나무둘레 2.3m
삼구정은 김영전 형제들이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정자다.
삼구정은 안동시 풍산면 소산마을에 있다. 소산마을은 안동김씨 집성촌이다.
안동김씨는 김선평을 시조로 안동에서 1,000년을 세거해 왔는데 김선평의 9세손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이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김삼근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한성판관을 지낸 김계권이고 둘째 아들은 대사헌을 지낸
보백당 김계행, 길안면에 있는 정자 만휴당의 주인이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고 보물이 있다면
청백정신 밖에 없다던 청백리다.
김계권은 다섯 아들을 뒀다. 맏아들이 학조대사다.
학조는 당대의 명승이었으며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로 칭송됐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국사(國師)의 지위에 올랐다.
둘째 아들 김영전은 사헌부 감찰, 셋째 김영균은 진사, 넷째 김영추는 수원부사, 다섯째 김영수는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김계권은 한성판관을 지내면서 장의동에 세거지를 마련했는데 장의동이 안동김씨 장동파가 번창하는
베이스캠프가 됐다. 김계권의 다섯째 아들 김영수는 세 아들을 뒀다.
첫째 김영과 김번이 문과에 급제했다.
김영은 벼슬살이를 하다가 소산마을로 들어와 은일의 삶을 살았고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은 할아버지
김계권이 살던 장의동에 세거하면서 안동김씨 장동파의 파조가 됐다.
김번의 후손들이 파죽지세로 번창했다.
김상용 김상헌에 이어 그의 손자와 증손자가 영의정 대사간 등 높은 벼슬을 했다.
이른바 그것을 압축하는 표현은 ‘삼수육창(三壽六昌)’이다. 손자 ‘수’ 항렬 3명과 증손자 ‘창’자 항렬 6명을 말한다.
이 계보는 조선시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김조순에게 까지 이어진다.
3명의 왕비와 15명의 정승, 6조판서와 대제학 등이 고관대작이 나왔다.
하늘을 찌르는 권세 덕에 장동 김씨로 불렸다
.삼구정은 김계권의 아들 김영전 김영추, 김영수 형제가 88살의 노모 예천권씨를 위해 마을 입구의 나즈막한
언덕, 동오동산에 지은 정자다. 예천 권씨는 여름철이 되면 집에서 나와 이 언덕의 나무그늘에서 쉬기를 즐겨했다.
이를 본 아들들이 힘을 모아 1496년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 현판 글씨는 《용재유고》를 쓴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출생년 미상~ 1499)이 썼다.
정자 안은 조선의 내로라 하는 문장가들의 기문과 시문이 가득하다.
기문은《용재총화》의 저자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이 썼다.
그는 용재 외에도 허백당(虛白堂) 등 다양한 호를 썼는데 기문에 쓴 호는 허백당이다.
“풍산현은 안동부의 속현으로 고을 서쪽 5리쯤에 ‘금산(金山)’이라는 마을이 있고 그 금산 마을 동쪽
20보 쯤에 ‘동오(東吳)’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는 예닐곱 길밖에 안 되지만 그 꼭대기에 정자가 걸터앉아 있다.
동쪽·서쪽·남쪽은 모두 넓은 들판으로 형세가 시원하게 트여 있어 전망이 끝없이 펼쳐진다.” 고 썼다.
용재 성현이 쓴 삼구정기
장교관가(長郊觀稼)
너풀너풀 춤을 추는 천 이랑의 벼들이
논두렁에 즐비하게 비단결을 이루었네.
다만 바라노니 좋은 날씨 계속되어
이 즐거움을 영원히 누렸으면.
곡저타어(曲渚打魚)
곡강(曲江) 물가에다 어구를 펼쳐 두니
그물 친 곳엔 물이 어찌나 많은지.
참으로 우스워라 피라미 떼들은
낚싯줄을 입에 물고 꼬리를 흔들어대네.
삼복피서(三伏避暑)
인간세상 삼복이면
대지가 뜨겁기 불과도 같은데
이 정자만은 도대체 어찌하여
시원한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올까.
중추완월(仲秋翫月)
일 년 중의 중추절
중추 이날 밤 달이
마음속 깊은 곳을 깨끗이 맑게 하니
나는 달의 보금자리를 더듬네.
정자는 사방을 개방해 풍산들을 한눈에 내려 볼수 있도록 했다.
병자호란때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장동김씨 파조인 김번의 증손자이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나자 소산마을에 들어와 김번의 옛집을 누각으로 고치고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했다. 그때 가까이 있는 삼구정에 올라 인근 경치를 돌아보며 8곳 아름다운 경관을 정하고
‘삼구정팔경(三龜亭八景)’이라 불렀다. 김상헌의 ‘삼구정 팔경’을 받아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삼구정팔영(三龜亭八詠)’을 지었다. 이른바 ‘계택상월(谿澤象月)’ 중 2명의 대문장가가
시를 쓴 것이다.‘계택상월’은 조선 중기 네 사람의 문장가로 장유와 신흠, 택당(澤堂) 이식(李植)과),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말한다.
정자 옆에 있는 세개의 바위 삼구석. 바위의 이름을 따 정자이름을 지었다.
삼구정은 정자 옆에 있는 세 개의 바위가 거북모양을 하고 있어서 지은 이름이다.
3개의 바위는 거북 3마리가 정자를 등에 진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바위는 작은 돌 두 개 위에 판석을 얹은 형태인데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 추정하기도 했다.
바위를 굳이 거북모양으로 본 것은 거북이 십장생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모의 장수를 염원하는 자식들의 마음이 전해온다.
정자를 세운 아들들은 명절과 기쁜 날에 어머니를 가마를 지고 정자에 올랐다.
형형색색의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노래자가 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떨며 기쁘게 했던 고사를 따랐던 것이다.
淸陰(청음) 선생의 삼구정 팔경
鶴嶠晴峯(학교청봉)
비개인 뒤 학가산의 맑은 봉우리
馬崖초壁(마애초벽)
마애산의 깍아지른 듯 한 절벽
縣里烟花(현리연화)
현리의 자욱한 봄 경치
驛洞寒松(역동한송)
겨울철 역동의 푸른 노송
長郊觀稼(장교관가)
넓은들판의 누렇게 익은 벼 모양을 보며
曲저打魚(곡저타어)
낙동강가에서 그물쳐 고기잡기를 잡고
三伏避暑(삼복피서)
무더운 삼복기간 정자에서 더위를 피하며
仲秋翫月(중추완월)
중추가절에 달을 감상하며 즐기다.
삼당 김영선생 시비
보호수
읍나무 지정일 1982년 10월26일 수령 느티나무 300년
소산마을에 안동김씨 종택 양소당과 소야정도 있는데 판단 잘 못으로 여기까지 왔다가
두곳을 못보고 철수한 아쉬움 언제 다시 안동에 올 수 있을지 그때는 다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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