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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원이엄마 태마공원.고산서원

원이엄마 테마공원에서 영호루까지 도로변에는 능소화길이 500여m 이어진다

날씨가 덥고 걷기도 그렇고 여기 능소화나 담고 지나가면서 눈으로나 봐야겠다

덩굴박주가리 같기도하고 닭의 박주가리 같기도 하고 이런아이들 만나면 머리아파요 

아시는분 가르처주세요

 

가득 쓰고도 모자라 위 여백까지 빽빽이…남편 호칭은 ‘자내’ 

 

한지 오른쪽 끝에서부터 써내려간 편지는, 왼쪽 끝까지 가득 채우고 모자라 위 여백으로 이어진다. 그러고도 모자라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다시 글 첫머리 쪽 여백에 거꾸로 씌어 있다. 뭉클해져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조규복 학예연구사가 냉정하게 설명했다.

 

 

“여백을 활용해 쓰는 이런 편지 양식은 당시로선 일반적인 것이죠. 첫째 종이가 귀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둘째 쓴 이의 마음, 즉 할 말이 이토록 많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백까지 활용해 글을

꽉 채웠으면서도, 읽는 이에게 풍성한 느낌을 주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히도록 한 방식이기도 하다.”

 

 

더 감동적인 건 함께 출토된 미투리다. 미투리란 삼껍질 등을 꼬아 삼은 신발이다. 여기서 나온 미투리는 삼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아 삼은 것이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 엄마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투리는 한지에 싸여 있었는데,

한지엔 한글 편지가 적혀 있으나 훼손돼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 등 일부 글귀만 확인된다.

조 학예사는 “남편이 병석에 누운 뒤 쾌유를 빌면서 삼기 시작한 미투리”라며 “끝내 세상을 뜨자 함께 무덤에

넣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이 아버님께.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당신이 늘 나에게 이르되,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먼저 가셨나요?

나와 자식은 누구의 말을 들으며,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셨나요?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매번 함께 누워 당신에게 내가 이르되, "남들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요?

남들도 우리 같을까요?"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어찌 그런 일을 생각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셨나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래도 살 수 없어요.

어서 당신 계신 곳에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가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은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생각 끝이 없어요.

이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자식을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따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내 꿈에 편지 보시고 하시는 말씀 자세히 듣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거랍니다.

그러니 자세히 보시고 내게 일러주세요.

 

당신은 내가 밴 자식 낳거든 보고 싶다고 말하더니 그리 훌쩍 가셨으니,

자식이 태어나면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나요?
아무래도 내 마음 같을까요?

천지가 아득한 이런 일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요?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있을 뿐이니,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러울까요?

안타깝고 끝이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를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보여 주시고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나는 다만 당신 볼 것을 믿고 있으니 이따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그지없어서 이만 적습니다.

 

위에 인용한 글은 경북 안동에 살았던 고성이씨 이응태(李應台, 1556〜1586)라는 사람의 묘에서

발견된 한글 편지이다.

편지를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응태의 부인, 곧 원이 엄마이다.

그녀는 먼저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아픈 마음을 편지에 적어 죽은 남편의

품에 고이 넣어 묻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런 편지를 읽으며 감동받는 것은 그 사연도 애틋하기 그지없거니와, 편지가 쓰인 시대가 참으로

뜻밖이기 때문이다. 흔히 유교에 바탕을 둔 가부장제 아래에서 살다간 부부간에는 다정다감한 인간적

정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위의 편지글은 우리의 통념을 단박에 깨뜨려 버리고 만다.

그때의 부부도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허물없는 애정 표현,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

그리고 죽음을 넘어 영원히 함께하고픈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애뜻한 사랑으로 태어났을까 능소화는 말없이 피어 슬픈 사연을 말해주는 듯

원이엄마가 자기 머리를 잘라 만든 미투리

원이 엄마의 편지 무덤에서는 이 편지와 함께 머리카락으로 짠 미투리와 배냇저고리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원이 엄마는 남편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아 쾌유를 기원했건만, 남편은 아들 원이와 유복자를 남겨둔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배냇저고리는 뱃속에 든 아이를 위해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인다.

보호수

정상동 동나무 은행나무로 수령 480년(1982년 현재)

이응태가 살던 귀래정

이곳에는 이현보·이우·이식·윤훤 등 30여명의 시를 보존하고 있다.

저무개를 끝까지 견딜수 있을까? 보기에는 애플 수박 같다

이렇게 원이엄마 테마공원을 돌아보고 고산서원으로향 한다

차창 넘어로 바라본 암산 바위터널

밑에서 바라본 고산정

고산서원에서 바라본 암산유원지

향도문

고산서원은 외삼문이 없고 향도문이 대신하고 있다

본디 향로문 앞에는 중층 루각이 있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당했다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경내로 들어가지 못한채 밖에서 처다 보는것으로 대신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 서원 건물앞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수십그루가 자라고 있었으며 서원의

건물상태는 복원을 해서 그런지 외관상으로 봐서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였다.

 

이 서원은 18세기 유학자인 문경공(文敬公)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 - 178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상정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으로 25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거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후진 양성에 힘썼다.

 

조선 고종(高宗) 19년(1882)에 이조 판서에 올려졌고 1910년에 문경공이란 시호가내려 졌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된 이후 1977년부터 몇회에 걸쳐 새롭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경내에는 사당인 경행사(景行祠)와강당인 호인당(好仁堂)이 있고 앞에서 왼편으로는

고산정사(高山精舍)가 있다.또 유물을 보관하는 백승각과 제관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동재.

관리사 등 여러채의 건물이 있다.

중앙에는 경행사 사당이다

이상정과 이광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외부인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이렇게 무거운 자물쇠로 결박을 해놨다

고산서원현판과 강당의 호인당 현판이 보인다

호인당은 온돌방 2칸과 마루가 8칸으로 돼 있다

전면 좌우에 자리하고 있는 백승각(百承閣)과 청임헌(淸臨軒)은 전퇴칸을 둔 정면 6칸, 측면 1칸반의 규모로

향교의 동,서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이나 현재 서고로 사용하고 있는 백승각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한 반면 청임헌은 工자지붕으로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청임헌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관리사는 안동지방의 班家形式(반가형식)인 □자형 평면이나 관리사의

기능에 적합하게 부엌, 고방 등 수장공간을 많이 확보하였다.

고산정사

유생과학생들이 학문을 익히는 장소다

고산정사(高山精舍)

1767년(영조43) 대산이 안동 남후면 고산에 학문 수양과 후진 양성을 위해 건축한

서당으로, 후에 고산서원으로 확장되었다.

조금 있으니 큰 고기가 낚였는지 제법 큰 파문이 일었다

대붕어나 잉어가 낚였을 것 같은 예감이든다

부산으로 오면서 바라본 인공폭포

안동 지인께서 주신 복숭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http://youtu.be/wr7QKio5l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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