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공원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인 역사 도시, 어느 땅을 파도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사방이 경주국립공원으로 둘러쌓인 경주시에서 황성공원은 문화유적 답사에 지친 여행자들의
발을 편하게 해주는 쉼터 구실을 한다. 경주시 북쪽에 있는 공원으로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공원 안에는 공설운동장, 충혼탑, 높이 16m의 김유신장군 동상, 박목월 시비 등이 있으며,공원 주위는 온통 숲으로 덮혀있다.
2년마다 10월 초순이면 신라문화제가 이곳에서 열린다.(8/22)
육이오참전 월남참전 기념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참나무 숲
옛날 경주(동경)는 숲의 도시였으며,그 중심선상에 위치한 곳에 高陽藪(고양수)라
불리는 평지 숲이 지금의 황성공원이라 불리우며,풍수지리설에 의거 동경의 불길한 기운을 눌러서
보완하기 위해 서라벌의 북쪽 형산강변 평지에 숲을 조성하여 동경의 영원한 영화를 염원한
유서 깊은 황성공원이라 한다.
황성공원은 신라시대 진평왕과 충신 김후직에 대한 전설이 지금까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성격이 호방해 당시 황성공원 일대에서 사냥을 즐겼다. 병부령 김후직이 정사를
돌볼 것을 간청했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김후직이 나라를 걱정하다 죽음에 이르러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임금이 사냥을 다니는 길가에 묻어라”
고 유언해 황성공원에 묻혔다.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무덤 속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물으니 신하가 “김후직의 무덤에서 나는 소리”라며
유언까지 전해 올렸다. 왕은 눈물로 뉘우치고 “살아서 충신은 죽어서도 충신”이라며 사냥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가 풍물지리지에 전한다
황성공원 맥문동단지는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이로 인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이 시기에 아름다운 장면을 영상에 담기 위한 발길이 끊어지질 않는다.
시내 한 복판에 이렇게 아름다운 참나무숲과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는데 거기에 맥문동까지 재배하여
보라빛 향기를 더해주니 더할나위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게된다
경주에 살고 있는 분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요즘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단연 맥문동과 배롱나무 일것이다. 뿌리의 굵은 부분이 보리와 비슷해 맥문(麥門)이라
하고 겨울을 이겨 낸다고 해서 동(冬)을 붙인 맥문동. 이 꽃은 몇 해 전부터 깊은 여름만 되면 황성공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사진은 작년 8월19일에 찍은 사진인데 금년에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이러한 모습이
아니어서 올까말까 하다가 옆지기는 한번도 와보지 않아서 안내를 했는데 역시 실망스럽다
울산 대왕암 공원의 맥문동과 거의 동급이다
황성공원의 역사
경주시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역사도시이다. 신라시대 초창기로부터 2천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도시의 형태와 문화는 크게 변화했다. 경주지역 전체에 신라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조금씩 보존되고 있다.
황성공원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형태는 신라시대의 모습을 가장 온전히 간직한 곳이라 짐작된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기 때문이다. 숲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변화하는 새로움을 추구해
현대적 문화의 옷을 껴입고 있는 곳이다.
황성공원은 경주의 중심에 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덕동댐, 보문호를 지나 황성공원 남쪽을 감싸 흐르고,
서쪽 경계도 토함산에서 발원한 남천이 형산강으로 합해 포항 바다로 이르는 강줄기가 현곡과 다리로 잇게 한다.
동쪽과 북쪽이 동천동, 황성동으로 연결되는 경주시 중심으로, 도시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는 허브 기능을 한다.
황성공원은 경주시 황성동 산1-1번지 약 90만m² 부지에 소나무, 참나무 등 60여종의 나무 1만2천여 그루가 심어져
사철 푸른 동산이다. 신라시대 고성숲으로 불렸다. 사냥터이자 화랑들이 심신단련을 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시민들이 심신단련을 하고, 활 시위를 당기고, 백일장을 하는 등으로 그 기능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보라빛 맥문동은 분류 : 백합과, 꽃말 : 겸손, 인내, 용도 : 약용, 보양식,
다년초로 그늘진 곳에 잘 자라고 보라색으로 피며 가끔 흰색도 볼수가 있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고 초록색으로 유지한다.
전통 한국의 소나무와 너무 잘 어울린다. 작은 꽃속에 뭔 꿀이 나올까
생각을 하는데 벌들이 무수이 드나 들며 일을 하는걸 보니 꿀이 나오긴 하나보다.
황성공원은 지금 경주시민의 공원이자 삶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민들의 쉼터로 발전하고 있다. 신라시대 고성숲으로 불리며 사냥터이자 화랑들의 심신수련의 장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삼국유사를 비롯한 많은 역사서들에서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지금 황성공원은 아름다운 숲, 운동장, 문학비와 각종 기념비, 동상 등으로 꾸며져 백일장, 축구대회, 태권도대회,
테니스대회, 궁도대회, 뮤직페스티벌 등등 다양한 전국규모의 행사와 축제가 벌어지는 힐링의 중심센터로 기능하고 있다.
숲속의 산책로는 경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 기능을 넘어 스포츠인들의 훈련, 문화예술인들의 창작공간으로도
크게 활용되고 있다.
그대 며칠 전 팔백리 밖 阿火 안말에서
띄워 보낸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오늘 아침 동남풍과 함께 닿아 내 몸의
숨구멍을 타고 흘러 오다. 흘러 들어와 그 말의
숨결이 내 심장의 피 덥히고 온 몸을 흐르다.
팔백리 밖 사람아, 그대 사랑한다는
말의 길로 또 내 말을 보낸다
오늘밤, 금강이나 추풍령 상공에서 내 말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소리치며 떠 헤매
가리라. 잠 못들고 뒤척이는 이 나라의
사랑하는 마음들아, 한 마디씩 씨받아
팔괴고 잠들어라
아화 라는 곳은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아화 라는 지명을 말합니다.
이경록님의 고향입니다 박목월님의 고향인 건천 근처인데
그 마을에 사랑하는 동성동본의 연인을 두고 팔백리밖에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쓴 시라고 합니다
목양 오세재 선생 문학비. "청바위" 라는 제목으로 오랑캐를 무찌르겠다는 의지가 표현 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시문인
전북 고창(高敞)이 고향으로 자 덕전(德全), 시호 현정(玄靜)인 선생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 학사를 지냈으며 왜적을 토평한 공으로 고창을 식읍으로 하사 받으면서 후손들이 고창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係)를 이어왔다.
선생은 한림(翰林) 학린(學麟)의 손자이며, 세공(世功)·세문(世文)의 아우이다. 명종 때 과거에 급제했지만
성격 탓에 끝내 등용되지는 못했다. 친구 이인로(李仁老)가 세 번이나 추천했으나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인 경주에 살면서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속세의 명리에서 벗어나
고결한 절개를 지키며 이인로(李仁老) 등과 시주(詩酒)를 벗 삼으며 살았다고 한다.
김동리(1913~1995)
본명은 김시종(金始鍾), 동리는 필명. 경북 경주 출생.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4년 동안 세계문학을 섭렵하고 동양의 고전에 심취, 그 속에 표현되고
있는 인간과 신, 자연과 세계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1933)가
당선되었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1935)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화>가
거듭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서정주, 김달진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해인사의 말사(末寺)였던
다문사 부설 광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후 <바위>·<무녀도>(1936), <황토기>(1939) 등의 문제작들을
발표함으로써 주목받는 신진작가의 한 사람으로 부상하였으며, 유진오(兪鎭午)와 순수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문학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청년문학가협회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예술원상, 자유문학상, 대한민국국민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소설가협회 대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경주출신 시인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 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귀도 얼룩 귀
귀가 닮았네.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 출신.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옆지기 계단 오르기 싫다고 김유신장군 동상에 안 가겠다 하여 패스 작년에 사진으로 대체
살아서는 실질적 1인자였지만 1인자의 자리를 결코 탐하지 않고 2인자로 겸허하게 살았고
죽어서는 성골도 진골도 아니었던 장군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대되었던 김해김씨
12대손 김 유신 장군 !
'경북.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첨성대 해바라기와 황화코스모스 (0) | 2021.08.31 |
---|---|
영주 무섬마을 1 (0) | 2021.08.27 |
웅부공원과 태사묘 (0) | 2021.08.22 |
안동 봉정사 (0) | 2021.08.19 |
원이엄마 태마공원.고산서원 (0) | 2021.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