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숲을 돌아보고 담양 명옥헌에 왔다
격년제로 한번씩 오지만 꽃이 만발 했을 때는 딱 한 번이었고 계속 날자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일부러 꽃을 보려면 장거리를 와야 되기에 항상 벌초가며 들리다 보니 그렇다(9/13)
유명메타스퀘이아 길은 따로 있지만 이곳은 명옥헌으로가는 짧은 메타스퀘이아 길이다
차창으로 운전하며 담은 사진인데 그런대로 나왔네
명옥헌으로 들어가는 작은 연못과 오래된 왕버드나무
저앞에 정자 부근에 꽃이 있다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꽃이 지고 없다
명옥헌원림은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에 위치한다.
별뫼의 원림들보다 한세대 뒤인 1625년, 명곡 오희도(1583~1623)를 기리기 위해 그의 넷째 아들인 오이정
(1619~1655)이 도장곡에 창건하였다.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로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의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 명옥헌원림의 볼거리, 연못과 백일홍나무 * 사각형의 작은 위 연못과 사다리꼴 모양의
아래 연못으로 이루어졌고, 그 사이에 정자를 세웠다. 계곡사이로 수량이 풍부했을 때에 “물이 흐르면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하여 이름을 얻었다. 위 연못은 인공적인 석축을 쌓지 않고 땅을 파내어
큰 우물같이 보인다. 아래 연못은 동서 20m, 남북 40m 크기로 자연 암반의 경사지를 골라서 주변에만
둑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다.다음백과
명옥 헌원림은 주변의 자연 경관을 차경으로 도입한 정사 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명옥헌은
연못 주변에 심어진 약20여 그루의 백일홍나무로 유명하다. 꽃 이름과 같이 여름철이 되면 석달 열흘 동안
늘 붉은 꽃나무 열에 연못이 둘러싸이게 된다. 바깥으로는 다시 소나무들이 열 지어 서 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전국의 인재를 찾아 호남지방을 방문할 때 후산에 머물고 있는 오희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명옥헌의 북쪽 정원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들 나무 밑에 인조(仁祖)가 타고 온 말을 맸다고 하여 이 나무를 일명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 계마상 (仁祖大王 繫馬像)’이라고 부른다.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인조는 오희도를 등용하기 위해 세 번 찾아왔다고 하며, 훗날 우암 송시열은 명옥헌의 영롱한
물소리와 경치에 반하여 ‘명옥헌’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기기도 하였다. [문화재 정보] 지정번호 :
명승 제58호 지정연도 : 2009년 9월 18일 소장 : 국·공·사유 시대 : 조선시대 면적 : 13,484㎡
분류 : 자연유산, 명승.다음백과
이곳에도 곳곳에 꽃무릇이 피기시작하였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의 정자다. 정자의 한가운데에 방이 위치하고
그 주위에 ㅁ자 마루를 놓은 형태로 소쇄원의 중심건물인 광풍각과 동일한 평면구조를 가지고 있다
. 이러한 형식은 호남 지방 정자의 전형이다. 방이 있는 정자에서는 별서의 주인이 항상 머무를 수 있고,
공부를 하거나 자손들을 교육할 수도 있다. 명옥헌은 이와 같이 은일자의 거처나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기에 알맞은 구조를 지녔다.
[Daum백과] 명옥헌 원림 – 우리 명승기행, 김학범, 김영사
뒤쪽에서본 명옥헌의 모습
명옥헌 원림에는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모두 네모난 형태로 안에는
둥근 모양의 섬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정원에 많이 나타나는 방지원도(方池圓島)의 모습이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고
여긴 선조들의 우주관에서 비롯되었다.
[Daum백과] 명옥헌 원림 – 우리 명승기행, 김학범, 김영사
정자를 오른쪽으로 하고 돌아 계류를 거슬러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썼다는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명옥헌에 걸려 있는 ‘삼고(三顧)’라는 편액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오희도를 중용하기 위해 멀리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조는 반정 직전에
세상을 돌며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다녔는데 이때 만난 선비 오희도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Daum백과] 명옥헌 원림 – 우리 명승기행, 김학범, 김영사
오희도는 1602년(선조 35)에 사마시와 1614년(광해군 6)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었다.
이는 당시 광해군 재위기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모시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어머니와 후산마을에 정착해 산기슭에
망재(忘齋)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공부에 매진했으며, 때때로 고개 너머에 있는 장계골에서
자연을 즐겼다. 정철의 아들 정흥명이 지은
《명옥헌기(鳴玉軒記)》에는 명옥헌을 오희도의 손인 오대경이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Daum백과] 명옥헌 원림 – 우리 명승기행, 김학범, 김영사
명옥헌에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눈에 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오희도를 중용하기 위해 세 차례 찾아왔다고 한다.
명옥헌현판
꽃무릇(석산)
석산은 상사화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우선 석산과 상사화에는 무릇이라는 공통된 별칭이 들어 있다.
석산은 가을가재무릇, 상사화는 개가재무릇이라고 한다.
두 꽃을 언뜻 보면 아주 비슷한데, 특히 잎과 꽃이 함께 달리지 않는 것이 똑같다.
그러나 꽃 색깔이 달라서 석산은 붉은색이고 상사화는 홍자색이다.
상사화는 여름꽃이고 석산은 가을꽃이지만 최근 어느 지방에서 상사화 축제를 열었는데, 석산이 더 많이 군락을
지어 피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석산과 상사화는 혼동할 수 있다
그래도 이정도라도 피어 있어 찾아온 보람은 있다
위 아래 사진은 몇 년 전에 갔을때 사진인데 다음에는 일부러라도 만개 했을 때 찾아야겠다
부근에 있는 후산리 은행나무도 찾았다
은행나무로 가는길에 멋진정원이 있어 담아본다
이마을은 외지인들이 여러집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다
비가 조금씩 내리니 노랑 코스모스에 물방울이 맺혀 있어 담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