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계획 전무 월요일에 수목원 휴일이라 범어서 다녀왔는데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다녀온지 한달여 되는데 무슨 꽃들이 있고 단풍이 아직 남아 있을지 머리속이
오락가락한다(11/25)
정문에 들어서니 앞에 메타스퀘이아가 갈색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이 들어온다
소나무 밑에는 소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고
온실에 들어가며 열체크 방문자 기록하고 한바퀴 돌아 본다
학자스민
풍로초
톰소니애클레로 덴드룸
부겐베리아
천사의 나팔
케리안드라 (홍천층)
란타나
파키스 타키스
브라질아브틸론
자운두견
야모란
해국
세월따라 인연도 달라진다는 것을
세월따라... 인연도 달라지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다 어린시절의... 친구들이 그대로 늘 함께있을줄 알았는데
그리고 학창시절의.....친구들도... 늘 영원한친구 라며 언제나 함께 할줄 알았는데 사회생활 친구들과.....
늘 함께 하며 삶을... 이야기하며 한잔의 술에 인생과 그리움을 이야기를 하며 울고 그리고 웃고 행복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가... 이제야 조금씩 알것 같다 세월따라 인연도 달라 지는것을 사람도 변한다는것을 .....
어쩔수 없이가... 아니라 삶에 시간에 따라서 달라질 수 밖에 없음을 그러나 한가지...
마음속에 지울수 없다는 것을 얼굴은 잊혀져 가더라도그때의 그 아름다운 추억들은 마음속에있다는 것을 .....
떡갈나무
파락호(破落戶) 김용환 님을 소개합니다
노름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재산이
고스란히 보내진 곳
만주 독립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오랜 친구가 건넨 권유
"이제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의 마지막 대답
"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말게."
결국
사진 한장조차
남겨놓지 않고 떠난 그는
광복 59주년인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독립운동가 김용환金龍煥, 1887~1946
졸참나무
깨뜨릴 파(破),
떨어질 락(落),
집 호(戶).
파락호는 다른 말로 '팔난봉'이라고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안동에서 노름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용환은
조선 천지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파락호였다.
노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도박하느라,
마누라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땅 7백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에게 이젠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하고선
다음날 집에 있는 땅문서를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간 인물이었다.
그는
경북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가 의성 김씨 종가의 장손이자,
학자였던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며 의병을 지원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다.
이런 명예가
김용환으로 인해 한순간에 추락했다.
집안 재산도 모두 날아갔고,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 18만 평도
노름빚으로 몽땅 팔렸다.
현시가로 약 200억원에 달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친정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자신의 외동딸에게 준 돈마저도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그 딸은 하는 수 없이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헌 장롱이 귀신 들린 장롱이라면서
강변 모래밭으로 가져가 부수고 불에 태웠다.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처럼 된다'
- 당시 유행어
생강나무
윤학준의 <양반 동네 소동기>에 의하면,
우리나라 근대 3대 파락호가 언급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운동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김용환이 바로 그들이다.
김용환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흐른 뒤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노름빚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집안 재산이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사실과 함께
노름꾼 김용환이 독립투사였음이 밝혀졌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남몰래 독립운동을 돕게 된 배경엔
할아버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아버지 서산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가
왜경에게 들켜 종가 마당에서 꿇는
치욕적인 장면을 본
그는 항일운동에 몸 바치겠다고 결심,
식구들이 고초를 겪지 않도록 은밀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일제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했던 김용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평생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했지만
"선비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며 눈을 감았다.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딸 김후웅은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편지를 남겼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낙우송
외동딸 김후옹의 글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지나간 이야기지만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기에 옮기는데
요즘도 저런분이 있을까?
굴거리나무
졸 참나무
메타스퀘이아
장구채
감국
술패랭이
용담
갯국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일본 원산으로 해안 지역의 절벽이나 풀숲에서 서식한다.
‘일본 해국(海菊)’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주로 지바(千葉)에서 이즈 반도까지의 동쪽 해안 지역에 자생한다.
한국에서도 남해안 지역에 분포한다. 10~11월경 줄기 끝에 노란색의 작은꽃이 뭉쳐서 핀다.
진한 녹색 잎과 샛노란 꽃의 대비가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정원이나 화단, 화분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청까실 쑥부쟁이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원산지는 일본청화쑥부쟁이의 학명은 아스테르 아게라토이데스
에조 무라사키(Aster ageratoides 'Ezo Murasaki')입니다.
아스테르 아게라토이데스는 우리꽃이름으로 말하자면 까실쑥부쟁이죠. 이것의 이름에
또 청까실쑥부쟁이가 붙여졌는데 꽃빛이 청보라색이라서 청화쑥부쟁이라 부른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아직 올라 있지 않은 꽃으로 청보라색으로 피기 때문에 ‘청까실쑥부쟁이
’라고도 합니다.꽃은 늦가을에 청보라색의 꽃이 10월부터 원줄기와 가지 끝에 머리모양으로
한 개씩 달린다.번식력도 매우 왕성하고 원예종처럼 화려하고 예쁜 꽃이다.
가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꽃으로 꽃말은 ‘기다림, 인내’
남천
오데코롱민트
오렌지민트(Eau de Cologne mint)는 박하속(민트)의 한 품종이다. 오렌지향이 나 오렌지민트라고 불리며
오데코롱민트(Eau de Cologne mint)라고도 불린다. 오렌지향이 나 허브티나 포푸리로 사용하며 향을
즐기거나 요리의 장식용으로 사용하기 좋은 품종이다.
오렌지민트는 약 90%를 차지하는 리날릴 아세테이트(45%)와 리날로올(45-50%)의 두 가지 화학 성분으로
인해 강한 냄새가 난다. 고수율 품종인 Kiran은 linalool의 45%를 유지하면서 150kg의 기름또는 헥타르를
생산한다. 주로 인도 북부와 같은 열대아의 비옥한 땅에서 자란다. 오일은 주로 향수 산업에서 사용된다
산딸라무
칠엽수
산수유열매
산사나무
루브라 참나무
단풍철쭉
애기동백
구골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