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가덕도는 보개산이 바다 가운데 침몰되었다가 다시 솟아서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 있는 부산 최대의 섬이다.
최고봉인 연대산(459.4m)을 위시하여 수많은 산들이 펼쳐져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눌차·동선사이를
이어주는 주변 백사장에서부터 기도원앞 바닷가의 경관, 동남쪽으로 대항 새바지의 넓은 자갈밭과 용두암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동백숲과 아동섬일대와 동두말, 가덕도 등대 주위의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 서남쪽으로
돌아 외양포 해수욕장, 두문의 길게 뻗은 솔섬, 천수말 코바위 등 가덕도는 해금강 절경을 방불케 한다.
대항 전망대
거가대교 해상구간
거제도 장목면측 풍경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항의 모습
어선도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너무 썰렁한 느낌이든다
대항항
대항항은 가덕도에 있는 어항으로, 강서구청장이 시설 관리자이다.
가덕도 북쪽의 연대봉과 남쪽의 국수봉 사이 잘록하게 이어지는 목의 서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대항항의 어항 구역은 월분서 돌출부와 대안 동북쪽 새바지 서쪽 돌출부를 연결한 선내 수역이다.
대항항 동쪽으로는 해안가를 따라 대항 마을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자리하고 있다.
만입부 중앙으로 대항 선착장이 건립되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어항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주위에 먹거리가 없어서인지 휴식을 취하는지 갈매기들도 졸고 있다
오전이기는 하지만 다니는 사람도 볼 수가 없는 대항의 거리
건조대에서 건조되고 있는 대구
이곳 거제 앞바다와 가덕도 인근에서는 대구가 많이 잡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 용원에서 배타고 들어 올 때는 대항항도 활기넘치는 어항이였는데 지금은 육지가 돼
다니기가 수월한데도 코로나의 영향인지 거리가 썰렁하다
대항 항에서 외양포로 왔다
일본식 가옥
건축물에 대한 명칭및 상세한 연혁은 파악할 수 없으나 외관은 비늘판벽 위에 철재 스레이트
보강을한 것으로 보여지며 지붕은 일본식 기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가덕도에 온 것은 남쪽이고 양지쪽이라서 매화가 피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 필생각도 안 하고 있다
포진지
1904년부터 일본군이 군사시설로 설치한 것으로 엄폐막사 2개소 탄약고 3개소와 탄약고 사이에 2개씩
포좌를 설치하여 총 6문의 유탄포를 배치하였다 막사와 탄약고는 진입구를 제외한 4면을 구릉으로 처리하고
상부에 대나무와 잔디등을 심어 은폐엄폐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화장실터
사령부 발상지지
사령부발상지지(비의 제목) 1905년(명치 38년)4월21일에 부대 편성 명령이 내려지고 같은해 5월 7일에
편성된 부대가 외양포에 상륙하였다. 후면 1936년 (소화11년)6월에 세우다
전에 왔을 때는 이비가 포좌 앞에 있었는데 이곳 입구로 옮긴 듯하다
앞에는 엄폐막사 좌우로 탄약고 사이사이로 이러한 포좌가 세군데에 6문이 있다
탄약고
당시 일본군은 이곳에 포대 진지를 구축하면서 주민을 모두 쫓아내고 마을 전체를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현재 마을에 남은 건물은 그때 세운 적산 가옥(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소유한 건물이나 재산)이다.
해방되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헌병 막사며 장교 사택, 무기고 등을 수리해 지금껏 살아간다.
탄약고 입구
원자력 발전소 내외벽 만큼이나 두껍고 견고하다
외양포 가옥의 특징
일본식 기와:누운 파도 모양의 일본식 기와
눈섭지붕: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창문위로 처마같은지붕을 얹어 설치한 눈섭지붕
비늘판 벽:널판을 비늘처럼 붙여 마무리한 비늘판 벽
우물
샘물을 가두는 하단부는 큰 돌로 상단부는 붉은 벽돌로 우물을 보호하는 우물대와 지붕구조물은
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포좌
각 2개씩 총 6문의 280mm유탄포를 배치하고 측면에는 즉시 사용하도록 포탄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을 된다 280mm 유탄포의 최대 사정거리는 7.8km 포탄의 무게는 217kg이다
외양포 포진지는 러일 전쟁을 대비하여 1904년 말에 조성되었다
화약고
화포의 탄약을 비축하기 위해 요새지역내 가장 안전한 위치에 엄호와 은익을
고려하여 구축하였다
산악보루
포대의 배면 방어를 위해 설치된 보루로 해안포의 배후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륙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산 정상등에 구축하였다
관측소
측원기로 적의 함정의 움직임을 관측 계산하는 장소로 외양포 포대를
둘러싼 국수봉 일대인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다
일본군이 물자운송하기 위해 조성한 길로 추정되며 말을타고 다닌 길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말길 혹은 마찻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포진지 엄폐막사
공동 목욕탕
우물터
병사(兵舍)
1905년 일본군이 군사시설로 설치한 것으로 1908년에 작성된 한국진해만 요새사령부 배치도에
의하면 병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에 작성된 진해만외양포연습창사 배치도에는
사무실및 하사실로 되어 있다 현재는 정면 18m 측면 5.6m의 규모로 양측으로 분리하여
사용되고 있다
개조되어 살고 있는 일본식 가옥 아마 사령관실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외양포마을은 부지 전체가 해군 소유로, 주민이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수 없다.
적산 가옥이 원형 그대로 남은 건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랜 세월 고향을 지켜온 이들 덕분이다.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면 마을은 폐허가 되고,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흔적도 세월의 뒤안길에
묻히지 않았을까 생각이든다
일본식 가옥
병사들의 숙소로 사용됐을 것 같은 건물 건축형태나 양식에서 근대기 일본식 가옥으로
추정하나 건축연대및 용도를 특정할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다 건물 외벽은 철재 슬레이트로
외부가 둘러져 있으며 그 안쪽으로 원래 형태의 비늘판벽 형태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가덕도 등대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군사 보호구역이라 길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아마 선박을 이용해서 들어다니는 것 같다
가덕도 등대
옛 등대 시설은 사무실과 숙소, 등탑이 연결된 복합건물 형태로써 중앙에 높이 9.2m의 등탑이 세워져 있으며,
붉은 벽돌과 미송을 사용했고 출입구 천정에는 그 당시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함석으로 된 지붕은 부식방지를 위해 함석 위에 피치타르가 덮혀져 있다.
가덕도 등대는 전국의 아름다운 등대 16경 중의 하나이다. 1909년 만들어진 등탑의 등대 신호 반경을 늘리고,
점점 증가하는 선박들의 안전을 위하여 2002년 높이 40m의 등탑을 최신형으로 만들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등탑이 되었다. 2009년 12월에는 가덕도 등대 100주년 기념관을 설치하여 등대의 역사와
가덕도 역사를 함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이와 더불어 학술 회의실 및 전시장 등대 체험 시설로 20여 명이
합숙할 방 2칸과 주방 등도 만들어졌다.
이처럼 가덕도 등대는 등대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나 현재 군사 시설 보호 구역으로 되어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을 통하여 해군사령부의 승낙을 받고 출입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2006년 12월에는 해양수산부 등대
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대항 새바지항
인공동굴 앞 바위군
인공동굴에 왔더니 낙석위험으로 이렇게 휀스를 처 놓고 출입을 막나놨다
가덕도 인공동굴
2차 세계대전 말에 일본군은 전력이 급강하하자 부산과 주변 해안에 미군 상륙작전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는데 가덕도 대항마을의 인공동굴도 이와 같은 정세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가덕도 대항 인공동굴은 현재 10여 개 정도 발견되었으며 탄광 노동자들을 데려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형태는 I자, T자, L자형 동굴과 연결 복식 동굴이 있고, 내부 통로가 십자형으로 얽혀 있을 정도로 긴 동굴도 있다.
동굴 내부에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조형물로 표현해 놓아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 볼 수 장소이다.
예전에 왔을 때의 모습
탄광 노동자들을 강원도에서 대려와 동굴을 팠다고 한다
인공동굴로 들어가면 이러한 해변이 나오는데 지금은 낙석위험으로 들어 갈 수가 없고
2년전에 왔을 때의 사진이다
새바지에서 바라본 가덕도 연대봉
왼쪽에는 장림공단 무지개공단 다대포 몰운대 쥐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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