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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충주.박물관

중원문화권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충주박물관은 시민들이 기증한 유물을 모아 1986년 유물전시관으로

개관한 이래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국보6호) 주변으로 이전 종합박물관으로 발전하고 있다.

1986년 11월 25일 성내동에 유물전시관을 개관하였다. 1991년 6월 29일 충주박물관 직제에 대하여 의회

승인을 받았다. 1992년 11월 23일 문화부에 등록하였다.

중원군 가금면이 충주시에 통합되면서 1995년 1월 1일 가금면 소재의 중원향토민속자료전시관이

충주박물관로 바뀌었다. 1996년 8월 문화체육부로부터 문화학교 지정을 받았다.

박물관은 제1관, 제2관, 야외전시, 조동리선사유적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관은 역사1·2실, 민속1·2실로 구분하여 불교미술품과 민속품 위주로 전시되고 있으며, 제2관은 선사삼국실,

고려조선실, 충주항쟁실, 충주명현실 4실로 구분하여 충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야외전시에서는 중원문화권내에 흩어져 있던 석조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충주댐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신매리 선돌을 비롯하여, 율능리 석불입상, 장성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용탄동 석탑, 신만리 부도, 성불사

석불좌상 등 많은 불교관련 유물과 각종 묘비, 문인석과 동자석, 촛대석 등이 있다.

철조여래좌상

 

 

박물관 소장 유물은 금속 유물 384점, 옥석 유물 281점, 토도 유물 1,264점, 목죽초칠 유물 381점, 피모지직 유물 242점,

서화 탁본 유물 488점 등 총 3,000여 점에 이른다.

정토사지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통일신라 말에 창건된 큰 사찰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 제17호), 홍법국사탑(국보 제102호),

홍법국사탑비(보물 제359호)가 전해지며 고려실록이 보존되던 사고지(史庫址) 였다

이 유적은 발굴조사시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건물들이 찾아졌고

정토사, 개천사 등의 명문기와를 비롯한 다수의 유물을 수습하였으나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금동광배

미륵리 5층석탑

미륵대원사지 석등

미륵대원사지 삼층석탑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탑평리 칠층석탑(중안탑)

문주리 석조여래좌상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원평리 삼층석탑

5~60년대에 사용했던 생활도구들

5~70년대의 학생용품들 

조선시대 구한말 화폐

솜누비 창의

이응해장군이 입던 창의로 기증받은 것이다

 

이응해 (李應獬) 장군

장군의 자는 직경(直卿) 이고 어릴 때 이름은 응룡으로

임진왜란시 선조임금을 호종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제수된 인물이다

 

장군은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나 36세인 1582(선조 16년) 무과에 등과하였고

청주, 안주, 울산 등에서 벼슬을 하다가 1592년(선조 29년) 부판관에 재수되었다

 

1603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활약하고 1607년에는 제주목사, 1612년(광해군 4년)에는 행호군,

1613년에는 전라도병마절제사, 1619년에는 주사도감 주사대장, 1620년에는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훈련원 도정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 경상병마 절도사(종 2품관)를 지냈다

1626년(인조 4년) 6월 향년 80세로 졸(卒) 하였는데 묘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장들에 있었다

그림으로 보는 충주의 역사

도자기 제작과정

고려청자

조선 분청사기

조선백자

임경업 (林慶業, 1594~1646)

조선 중기 친명배청파의 명장으로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인 이며 본관은 평택이다

1618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으로서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명, 청전투시 명나라 편을 들다가 발각되어 심양으로 압송 명령을 받았다

압송 전 황해도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명나라가 청에 의해 멸망하자 임경업은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 태종은 그를 설득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 했으나 장군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심기원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국내로 돌아와 김자점의 모함에 의해 장살되었다

숙종 23년(1697)에 복원되었으며 충주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홍가상 (洪可相)

1649(인조 27) ~ 1740(영조 16), 자는 보이(輔而), 호는 돈암 또는 시산(詩山)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681년 과거에 합격하여

1703년 현릉 참봉이 되어 내섬시 봉사를 거쳐 1708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 후 옥과현감과 대구판관을 지냈으며 1726년에 세자익위사어와 시강관을 겸하였다

 

1729년 80이 넘게 되므로 국가에서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정성을 다하여 국가에 봉사하고 외직에 나아가서는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동의보감 (東醫寶鑑)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책으로 허준(1539~1615)이 왕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하여 1613년에 감행한 의학서적이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 <동의보감>이라 하였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로 인정 받고 있다

여기 전시된 동의보감은 1814년 전라감영에서 다시 발간한 책으로 25권 25책의 완질이다


교지

조선시대 국왕의 말씀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국왕이 관직 및 과거 합격 증서, 토지나 노비, 기타 특권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라고 적는 문서군을 통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라는 용어가 사용되다가 1435년(세종 17)에 교지를 사용하도록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들 교지라고 지칭된 문서는 관직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백패(白牌),

추증 교지(追贈敎旨), 시호 교지(諡號敎旨), 면역 교지(免役敎旨), 사패 교지(賜牌敎旨) 등이 있다.

숙종의 어필첩

6폭 병풍

(조선후기)

조선후기 문인 겸 서예가인 유한지(兪漢芝, 1760~1840)가 쓴 6폭 병풍

기원 유한지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더불어 3대 예서체 대가로 손꼽힌다

 

병풍의 글은 주희의 문집인 회암집에 실려 있는 5언절구 5편과 맹호연집의 1편의 시, 모두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군자정(君子亭), 채릉주(采菱舟), 인지당(仁智堂), 한매(寒梅), 정사(精舍)는 회암집,

형가(荊歌)는 맹호연집에 각각 실려 있다

이응해장군 묘에서 출토된 방령의

깃이 내모난 상의를 방령이라 한다 겉감의 무늬는 연꽃과 모란의 줄기와 잎을 서로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안감은 명주와 한지로 제작되었다

깃아래에 사각형의 덧단을 대고 섶을 달았고 사각 덧단 아래에는 주름이 1km당

3~4개씩 총29개의 주름이 잡혀있다

우륵 가야금 연주상

(크기~: 175 x 100 x 135cm)

 

악성 우륵 선생의 모습은 이종상화백의 초상화를 모델로 하였으며

가야금은 신라 토우(土隅)의 연주상을 기본으로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하고 있는 신라금의 모습대로 재현하였다

(제작:엄태식,  고증:충주박물관) 

강수영정 (强首影幀)

 

신라시대 유학자, 문장가, 초명은 두(頭),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뜻을 두어 <효경 : 孝經>, <곡례 : 曲禮>, <이아 : 爾雅>, <문선 : 文選> 등을 수학,

벼슬길에 오른 후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654년(태종무열왕 1) 당나리에서 온 난해한 국서를 쉽게 해석하고 그 답서도 유창하게 지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재물에 뜻이 없어 집안이 가난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세사미(歲賜米) 100석을 하사받았으며

문무왕 때는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하여 세조(歲祖) 200석을 받고 사찬 벼슬에 올랐다

신문왕 때에 처음으로 국학(國學)을 설치하여 여러 박사(博士)를 두었는데

그때 설총과 함께 제자들을 가르쳤다 

대장간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반드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는 대장간은 하나의 필수적인 존재였다.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정·

메(앞메와 옆메)·집게·대갈마치·숯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루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철·구리·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장인을 대장장이라 한다. 또한, 딱쇠·대정장이·

성냥·바지·야장(冶匠)·철장(鐵匠)이라고도 한다. 대장장이는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하였다.

베틀과 물레 씨아(목화씨를 빼내는 기구)

베틀

베틀은 무명 · 명주 · 삼베 따위의 옷감을 짜는 재래식 가정용 직조기이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2개의 누운 다리에 구멍을 뚫어 앞다리와 뒷다리를 세우고 가랫장으로 고정시킨다.

베틀로 베를 짤 때, 그 날의 촘촘함을 따져서 '새' 라는 말을 쓴다.

한 새는 바디의 실구멍 40개로 짜여지는 것을 말하며, 새가 많을수록 옷감이 곱게 짜여진다.

가래와 살포

가래:3명 또는 5명의 사람이 함께 흙을 떠내는 농기구

살포:이것은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며, 논에 나갈 때 지팡이 대신 짚고 다니기도 한다. 

용두레

용두레는 고인 물을 다른 곳으로 퍼 옮기는 데 쓰는, 한국의 농기구이다.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길쭉하게 파거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몸통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양쪽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 가는 나무를 끼워 끈을 매어 만든다.

시계추와 같이 중력을 이용하여 물을 밀어 올렸다가 손잡이를 위로 세워 물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달고

땅을 단단히 다지는데 쓰는 기구

전 유학사지 삼층석탑 (傳 遊鶴祉 三層石塔)

(고려시대, 높이 250cm, 충주시)

 

방형중층의 통일신라기 석탑의 전형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일부 약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원래 이중기단이었을 것이나 현재 상층기단 면석은 전하지 않는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버팀기둥이 새겨졌고 4매의 판석을 엇물림식으로 조립하였다

초층몸돌은 위층몸돌에 비해 매우 크며 지붕돌은 전각에 이르러 반전이 뚜렸다고 처마밑은 평박하다

충급받침은 초층이 4단, 위층은 3단씩이다,

각층 지붕돌 윗면에 호각형의 탑신괴임을 마련하였으며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기 양식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버팀기둥의 수가 하나로 감소했고

갑석이 경사를 이루면서 합각선이 돌출되고, 층급받침수가 3~4단인 점을 고려하면

석탑이 9세기 이후 경주중심에서 벗어나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각 지방의 법형 양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신만리 부도재 (新萬里 浮屠材)

(고려시대, 높이 160cm,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8각 원당형 부도로서 현재 기단부의 하대석과 몸돌, 지붕돌만 남아있다

원형의 하대석 앞에는 평면 8각형의 괴임대를 만들었으며 몸돌 또한 8각형으로 특별한 문양은 없다

지붕돌 각면이 합쳐지는 곳에는 굵직한 우동형(隅棟形)을 조성하였으며

처마 밑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흔히 보이는 반전(反轉)을 이루고 낙수홈을 만들었다

지붕돌의 크기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부도였을 것으로 보이나 나머지 부재는 전하지 않아 실제모습은 알 수 없다

율릉리 석불입상 (律陵里 石佛立像)

(고려시대, 높이 200cm, 충주시 엄정면 율릉리 태고산)

 

넓적한 화강암으로 조성한 불상으로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가 표현되었고

이목구비는 마모가 있어 윤곽만 확인된다

귀는 어께에 닿고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목은 짧은데 삼도(三道)를 표현하였고 어깨는 당당하며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였고

왼손은 다리 아래로 내려 손등이 밖을 향하도록 하여 시무외, 여원인(施無畏, 與願印)을 변형시킨 모습이다

석불이 대좌에 꽂히는 형식으로 보아 발은 표현되지 않았거나 대좌에 따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측면에서 볼 때 넓적한 형상이며 됫면은 특별한 문양없이 편평하고

옷주름선이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된 점 등으로 미루어 고려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신만리 석불입상 (新萬里 石佛立像)

(통일신라 말~고려초기,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탄방)

 

머리가 결실된 석불입상으로 현재 높이만 255cm가 넘는 당당한 장륙불상이다

불신은 어깨가 당당하고 허리가 잘록하여 육감있게 보이며

그 중심축이 약간 오른쪽으로 쏠려있는 굴신(屈身)상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상체에서는 U자형을 이루고

허리 아래에서는 양다리로 각기 둥근 옷주름이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를 들고 중지와 약지로 살짝 법의를 움켜잡은 모습이며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다

 

석불의 대좌가 결실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법의자락 밑으로 발가락이 쌀짝 보인다

전체적인 모습이 단양 보국사지의 석불입상을 연상케 하며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정도로 추정된다

 

엄정면 탄방마을에 거주하는 윤형길님의 제보로 확인한 이 불상은 웃골에서 발견되었는데

주변에 사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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