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생가와 기념관에 들렸다
보호수
팽나무 수령 350년 높이 18m 둘레 3.5m
둔덕면은 예로부터 물 좋고 인심 좋은 거제시 역사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둔덕면은 고려 의종왕이 호위군의 주둔지를 두었으므로 이름하였으며 넓은 들판에는 둔전(屯田)을
설치하여식량을 생산 공급하였다는 기록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둔전은 고려시대 군사들의 식량을 생산하던 토지였다.
고려 18대 의종왕이 정중부의 난으로 거제 둔덕기성(구:폐왕성)(사적 제509호)에 피난하여 왕이 3년간 둔덕에
거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 연극계의 거목 동랑 유치진 선생과 생명파 시인인 청마 유치환 선생의 생가가 방하마을에 위치하고
있고 청마기념관은 2008년 4월에 완공돼 많은 관람객들이 찾는다.
미동조차 허락하지 않는 님 앞에서..
내 눈물은 파도가 된다..
출렁이고 출렁이는 가슴 안의 파도..
멈추라 해도.. 아프다 해도..
파도는 멈출줄 모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나는 이미 바다거품이 되었거늘..
님의 삼장에 칼을 꽂지 못한..
순간의 이슬로 죽어간 사랑인데..
어쩌란 말이냐..
내 사랑은 저리도..
잔인한 사람이거늘..
그조차도 내겐 사랑인 것을..
유치환은 1908년 7월 14일 경상남도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 유준수(柳焌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순석(朴珣碩)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2살 때 충무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냈다.
통영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일본 토요야마(豊山)중학교에 유학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했고,
시를 쓰면서 한때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다. 1931년 '문예 월간'에 첫 시인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그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1937년(29세) 부산의 화신지사를 그만두고 통영으로 귀향했다.
통영에서 향교 재단이 운영하던 통영협성상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 시절 유치환은 발행, 편집인이 되어
같은 해 7월 1일 부산 초량에서 동인지 『생리(生理)』를 창간하며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1940년 교사를 사임하고 만주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다시 교육계에 투신,
충무/부산/경주 등 지방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였으며훗날 안의중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경주고등학교장,
경주여자고등학교장, 경남여자고등학교장 대구여자고등학교장,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장까지 역임했다.
만주 피난 활동과 교직활동 중, 그리고 6.25 전쟁 중에도 틈틈이 시를 쓰고 시집을 발표하며 출간한 활발한
문학인이었다. 1946년에는 창립 조선청년문학가 회장을 지냈으며, 19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내는 등 대한민국 문학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다. 특히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교과서에 정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인 '깃발'과 '생명의 서', '행복' 등이 유명하다
통영여중 재직 당시 가정교사로 근무했던 시인 정운 이영도(1916년 10월 22일 ~ 1976년 3월 5일)에게
그야말로 한 눈에 반해 살아 생전 20년 동안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다. 처음 만나게 된 1947년부터 교통사고로
죽게 된 1967년까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리고 설렘과 기쁨을 잔뜩 버무려 표현한
연애편지들 가운데 6.25 전쟁 이전의 것은 소실되고 남아 있던 것이 5,000여통이라 한다.
그 중 200통을 추려 유치환이 죽고 나서 두 달 후에 《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 1967)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부수인 25,000부를 찍어냈다.
문제는 그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점. 반면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홀로 키우고
있던 과부였다. 다만, 두 사람은 현실의 만남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치환 아내는 이 이야기가
퍼졌는데도, 20년동안 꾹 참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영도는 위에 나온 책 판매수익을 모두 기부했다.
거제시에 청마기념관과 청마거리가 있고 통영시에 청마문학관이 있으며 부산광역시 동구에는
'유치환 우체통'이라고 불리는 문화공간이 있을 정도로 고향에서는 확실히 스타 작가 대접을 받는 분.
실제로도 그런 분이긴 하다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7년 2월 13일에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부산시 동구 수정동 봉생병원 앞 대로에서 시내버스에 치였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끝내 숨지고 말았다.묘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에덴공원에 있었으며 이 까닭에 에덴공원에
청마 시비가 있기도 하나, 현재는 유씨 집성촌이 있는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로 이장하였다.
경남여고 교장시절 학생들과
학창시절의 청마
젊은시절의 청마
청마 신혼가진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시절의 청마
청마가남긴 시작품들
청마연보
동래고등학교 교가작사
산방산
둔덕면 동편에 위치한 산방산 (해발 507.2m)은 서쪽으로 고려 의종왕이 거처했던 우두봉산과 마주하고
있으며, 산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명시인 청마 유치환선생의 생가(生家)가 있고, 산골짜기에는 보현사가
자리잡고 있다. 산 정상부에는 암석으로 된 두개의 봉우리가 형제처럼 우뚝 솟아 사방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이들 암석은 능선을 따라 산중 복부까지 이어져 내려 오면서 군데군데 튀어나와 작은
바위 봉우리를 만들고 있다. 그외 아랫부분은 푸른 해송림으로 감싸고 있어, 이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방산이 바로 거제의 명산임을 직감할 수 있다. 산 정상부 주변에는 철쭉, 산철쭉, 진달래 등 철쭉류가
많아 봄이면 철쭉꽃으로도 유명하다.
둔덕기성(屯德岐城)은 7세기 신라시대 축조수법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懸門式) 구조인 동문지(東門址)와 삼국시대 초축(初築)되고 고려시대 수축(修築)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 유적에서 인화문토기, ‘상사리(裳四里)’ 명문기와, 청자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및 경덕왕대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되며,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는 등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청마기념관전경
청마 생가에 핀 능소화
청마생가
이렇게 청마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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