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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경주 최부자집과 경주법주

여기 교촌마을은 신라시대부터 역사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원효대사의 요석궁이 여기에 있었죠.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향교가 들어섰습니다.

원래 향교 주위에는 마을이 들어서지 않는데 최부자 7대이신 최언경이 이곳으로 터를 잡은 후

이곳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8/17)

경주 최 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 채터 뒤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뒤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 최식 씨 가옥(慶州崔植氏家屋)

이었으나, 경주 최 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사랑채 문위에는 용암 고택 대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앞에는 정료대가 서있다

 

용암 고택은 최기영의 아호를 따 지은 이름 최기영은 내남면에서 교촌으로 집을 옮겨온

사람으로 이때부터 교촌 최부자 시대가 열린다 

 

대우헌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 사는 집이다  대우는 최세린의 아호다

그는 26살이 되던 해인 1816년생 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전시에 3번 실패한 후

경주로 돌아온 뒤 선비가 뜻을 숭상함은  쌓은 바 경륜과 포부를 펴서 백성을 다스리고 그 혜택을

입도록 함에 있으나 그렇지 못할 바에는 학문에 정진하고 이름과 행실을 가다듬어 우뚝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벼슬을 포기했다

둔차

어리석은 듯이 드러내지 않는 버금감

최부자가 어리석고 둔함은 잇속을 챙기는데 둔하며 자신을 낮추고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살피는 측은지심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재산과 몸을 던져 구국활동으로 드러나고 나라의 위기가 없을 때는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나눔으로 나타난다 측은지심이 실천적 가치로 형상화된 형태가 박애정신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이 꾀가 많고 약은 사람이 보면 아주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다

이 어리석고 둔함이 오늘날 경주 최부자가를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가로 손꼽히게 한 철학이 됐다

경주 최부자 선양회에서

행랑채는 작은 관리실 하나에 모두 창고 형태로 아마 곡식을 보관하던 곳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곳도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 같아 보인다

noblesse oblige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안에서 본 행랑채

최부자집의 흙 돌담

안채

경주 최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경주 최 씨 정무공파의 시조 격인 최진립 선생은 임진왜란에 참전했고, 병자호란 당시 종들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정무공의 아들 중에 2대 송정 공 최동량이 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땅이 황폐화되었기에 개간 산업에

적극 참여했다. 그 당시에는 개간을 하면 국가에서 땅을 주었다. 그리고 일찍부터 수로를 만들었고,

시설을 적극 정비했다. 3대 최국선이라는 분이 이양법을 도입해서 수확량을 배 이상 확보해서 지금의

부가 확립되었다.    

땅이 커지다 보니 소작을 주게 되고, 소작인들이 많아졌다. 당시엔 수확량의 대부분을 지주가 가져가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자연스럽게 쟁의가 일어나게 되고.

나중에는 도적질을 일삼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도적들이 최부자집에도 오게 되는데 그중 최부자집의

소작인도 있었다.

최부자는 이 광경을 보고 관청에 고발을 하지 않고 고리를 비롯한 소작인의 문서를 없앴다. 이후 5대 5

소작료를 절반으로 낮추었다. 그러자 소작인들의 노동 의욕이 올라가 생산량이 두 배로 늘고, 오히려

최부자의 부는 증가하게 되었다     

최부자집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독립운동 관련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2대 최준 선생 대에 이르러 가문의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시고, 광복 후 교육활동을

하셨다

"11대이신 최현식 선생님은 대한제국 시절 진사를 지내셨는데 나라가 기울던 시절 국채보상운동 등 적극적인

계몽운동을 펼치셨다. 사실 국채보상 운동하면 대구가 유명한데 경주 지역이 다는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운동을 펼쳤다. 일찍이 아들이신 최준 선생에게 20대 초반부터 재산관리와 집안의 경영을 맡겼다

나라를 뺏긴 경술국치 당시 최현식 선생은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만들 당시

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에도 참여했고 최준 선생의 동생이신 최완 선생은 대한광복회 재무부장을 지냈다.

독립운동가인 박상진 선생도 사촌이다. 박상진 선생이 한창 활동할 당시 자금을 여러 방면에서 융통했었고,

당시 최부자가 대구은행의 대주주였기에 대출 한도를 높일 때 보증도 서고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만들 당시 많은 자금을 들고 최완 선생이 상해에 갔다. 당시 임시정부의 1년 예산의

3분의 1 정도 되는 규모였다. 나중에는 조선 최고 자본 회사인 백산무역 주식회사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자금들을 다방면에서 지원했다.

  최준 선생이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다 보니 재산이 점점 줄기 시작한다. 재산 대출을 일본은행에서

했는데 다행히 해방이 되어 재산의 30프로가 돌아왔다. 

최준 선생은 지금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경북대 학기 성회를 만들어 유지들이 참여했고, 많은 유지들이 모여 지금의 영남대를 설립했다.

회장은 최부자였고, 학장, 이사장을 겸해 18년 동안 학교를 경영했다. 그 밖에도 계림 대학을 설립해서

운영했으니 경주에 있는 집과 더불어 전 재산을 학교를 설립하는 데 바쳤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삼성 이병철의 회장의 제안으로 운영권을 넘겼는데 1966년 삼성이 소유하고 있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서, 당시 대구대(현 영남대)가 권력자

박정희 측으로 넘어가게 되는었다. 현재 최부자집은 영남대가 소유하고 있고, 집안의 관리와 사용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에서 

최부자집 하면 교동법주를 빼놓을 수가 없다

교동법주는 만석꾼 집안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 집에서 350여 년간 빚어오고 있다.

초기에는 제사용, 손님 접대용으로 제조했으나 독특한 맛으로 인기를 더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법주를 처음 빚은 사람은 현재 기능보유자인 배영신 씨(89)의 남편 최종 씨(작고)의 9대 조인 최국선으로

전해져 온다. 그는 조선 숙종 때 임금님의 수라상 및 궁중음식을 감독하는 사옹원(司甕院)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사옹원의 실무 책임자로 봉직하다가 낙향하여 법주를 빚었다. 이는 법주가 궁중으로부터 유래된 술임을

시사해 준다.

민속주의 대명사

찹쌀 특유의 진득한 감촉이 돋보이는 교동법주는 은은한 향기와 입에 달라붙는 맛이 일품이다.

놋잔에 담긴 교동법주는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면서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시각적으로 술맛을 음미하게 한다. 황남빵과 함께 경주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꼽히는 교동법주는 고종 때

진상품으로 오르기도 했다. 경주시가 1998년부터 매년 주최하는 ‘한국의 술과 떡잔치’에 매년 출품되는

교동법주는 국내는 물론 외국인으로부터도 인기품목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맛의 비밀은 토종 찹쌀과 우물물

최상의 술을 빚기 위해 원료부터 차별화를 꾀한다. 원료는 비교적 간단하다. 찹쌀과 밀누룩, 우물물이 전부다.

그러나 일반 술은 멥쌀로 제조하는 데 비해 교동법주는 토종 찹쌀을 고집한다. 누룩도 엄선된 밀누룩만 쓴다.

 

물은 100년 넘은 구기자나무 뿌리가 드리워진 집안 우물물만 사용한다. 배 할머니는 ‘명주는 명수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술 담그기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석 달 열흘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술은 원재료 못지않게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하루에 20여 병(900㎖들이)만 생산하고 별도의 유통망도 갖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제조시설이 재래식인 탓도 있지만 최고의 술은 희소성과 품격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대리점이 없는 데다 인터넷이나 우편으로도 구입할 수 없고 교동마을 최 씨 고택에 가야만 살 수 있다.

액자에 하사(荷史)라고 쓰여 있는데 무슨 말인지?

정읍에는 쌍화차 거리 가 있을 정도로 쌍화차가 유명하다

그런데 이정표를 보니 구미가 당긴다 찾아가 보자

입구에 멋진 돌담이 버티고 있다 참 깔끔한 거리다

이 집은 최준 선생의 아우인 독립운동가 최완 선생의 고택이다

그런데 문이 닫혀있다 영업을 하지 않는가 보다  돌아가 보니 뒤에도  길이 있는데

그곳도 문이 닫혀있다  수요일인데 정기휴일 인지도 모르겠다

돌아 나오는데 옆집에 호두나무에 호두 열매가 거의 다 영글어 가고 있다

 

녹음이 욱어졌을 때 다녀온 곳인데 다른 곳 사진에 밀려 한쪽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이제야 빛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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