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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가람문학관

익산 가람문학관에 들렸다

가람 문학관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익산 출신으로 우리의 말글과 문화를 지켜 내고 시조를 현대적으로 부흥시킨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입니다. 가람 선생의 현대시조 혁신, 국문학 정립, 한글 및 문화 수호 활동 등

수많은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 그 가치를 계승하고자 2017년 10월 14일(토) 가람문학관이

개관하였습니다.

가람 문학관 전시실

전시실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1. 가람과 마주하기(영상실) - 가람 이병기 선생의 삶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프롤로그 영상

2. 가람 시조 음미하기(가람실) - 가람의 시조를 시청각 미디어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3. 가람 생애 되짚기(상설전시실) - 시대의 격변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지켜가는 가람의 삶

4. 가람 기억 가져가기(체험실) -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작사한 교가를 검색하여 들어볼 수 있다.

5. 천호산 밀길(세미나실)

6. 문필봉 글줄(문인실)

7. 용화산 능둠(휴게실)

8. 물 각부 물(사무실)

9. 수장고(보관실)

가람 이병기(1891~1968 李秉岐)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며 교육자, 서지학자이자 장서가, 한글운동가요 독립운동가이다.

그밖에도 평생의 일기, 수필, 교가 작사, 방송 출연, 전국 기행 등 여러 방면에서 선명한

족적을 남긴 우리 민족의 한 시대 위대한 실천가이며 기록 가이고 활동가이다.

가람은 『역대 시조선』, 『가람 문선』, 『국문학 전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1898년부터 교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의 『음빙실 문집

(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달아, 열아홉 살에 전주 공립 보통학교에 들어가 6개월 만에 마쳤다.

1913년 관립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남양, 여산 등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국어국문학 및국사에 관한 고서적을 수집하고 시조를 연구하고 짓기 시작했다.

 

1925년 무렵부터는 <봉천행>, <한강을 지나며> 등의 시조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여러 편의 시조론을 발표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고, 그 이론을 직접 실천하여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내놓았다.

1920년대부터 조선어문 연구회, 시조회 등을 발기하고 활동하였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전북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다.

술과 난초와 매화의 향기를 사랑했던 그는 시조 분야에서 주된 공적을 이루었지만, <한중록>,

<인현왕후전> 및 <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의 판소리 등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등 서지학과

국문학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인현왕후전 해설과 역대 시조를 해설하기도 했다

의유당일기와 한중록도 해설을 했다

고전문학을 지키기 위해 1913년 교편을 잡은 가람 선생! 가람 선생의 작품이 4,345권이 넘는다고 하며

만들어진 작품은 서울대학교에 기증되었다가 현재는 가람 문고로 보존되어 한국학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시조 혁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시조의 형식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교편을 잡으셨던 가람선생은 월급을 받으면 그중 절반은 책을 사서 보았고, 나머지는 제자들과

막걸리를 먹으며 문학을 논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육성과 이야기를 보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느니 영상관도 들려 시간을 할애하시길.

 

이병기/ 별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이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난초/이병기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뜻한 아침 볕이 발 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가람선생이 얼마나 난을 아꼈으면 일본 순사에게 잡혀가면서도 처자식의 안위보다는

난초가 죽지 않게 잘 보살피라고 했다고 함

가람선생은 난초복 술복 제자복은 타고났다고 한다

가람선생은 술자리와 강의실이 따로 없을 정도로 전주 풍남문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바로 강의실이었다고 한다

 

 

 

가람 이병기 연보(1891~1968)

1891. 음 1.28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변호사 이채의 장남으로 출생
1925 <조선문단>에 '한강을 지나면' 발표
1939 <가람 시조집> 발간
1940 <역대 시조선>과 <인현왕후전> 발간
1946 서울대학교 교수, 군정청, 편찬 과장
1952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
1955 중앙대학교 교수
1957 <국문학 전사> 발간, 학술원 회원
1958 뇌일혈로 와병 중 향리로 귀향
1960 학술원 공로상 수상
1962 명예 문학박사 학위 받음(전북대학교)
1966 <가람 문선> 발간(신구문화사), 한국시조작가협회 초대 회장
1968 7월 29일 생가에서 사망, 현재 가람 시조문학상 시상 계속 중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양치 야오의

<음빙살문집>을 읽고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 공립 보통학교를 거쳐 관립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였다.
재학 중에 조선어 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조선어 문법을 배웠다.
그 후 남양·전주 제2·여산 등의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수집한 서책이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 문고'가 설치되었다.

1912년 권덕규·임경재 등과 함께 조선어문 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동광고 등보 통학교·휘문고 등보 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시조회'를 발기하였고,

이를 '가요 연구회'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 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다.
6·25를 만나 전시 연합대학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가 1956년 정년 퇴임하였다.

학원 추천 회원을 거쳐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가람의 생애
가람은 1891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연안(延安) 이 씨(李氏) 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는 가람(嘉藍 ·柯南), 한자로는 임당(任堂)이라 했다. 그는 완고한 조부의 명으로 9세부터 상투를

틀고 10여 년 동안 한문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중국 량치차오의 「음빙실 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19세 나이로 70리 길을 걸어 전주 보통학교에 통학하여 6개월 만인 1910년 졸업했다.

이어 관립 한성(漢城) 사범학교를 1913년에 마쳤다. 비교적 늦게 신학문에 뜻을 세운 가람은 이 기간 중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여 밤이면 조선어 강습원에 나가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조선어 문법 강의를 수강,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대한 뜻을 굳히었다.
이후 가람은 남양·전주 제이(第二)·여산 등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2년부터 휘문·보성·경복·

덕수상 등에서 우리말의 작문과 습자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또한 연희전문

(1938년)및 보성전문학교(1940년) 강사로 우리말과 글을 위한 활동과 연구를 활발히 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의 편수관과 편수 과장을 지내다가 1946년 나이 56세에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되었으며 이듬해에 단국대·신문학원·예술대학 강사로 출강했고 1948에는 동국대·

국민대·숙명여대·세종중 등교 원양 성소 등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 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피난해 있다가 수복 후 명륜대학과 전시 연합대학

교수, 원광대학 강사를 거쳐 1952년 새로 건립된 전북대 문리대학장에 취임했다.

이곳에서 1956년 정년 퇴임한가람은 다시 상경, 중앙대와 서울대 대학원 강사로 활동하다

1957년한글날 우리말 큰사전 출간기념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 도중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

생가인 수우재에서 10여 년의 투병 끝에 78세로 서거했다.

가람의 연보

시조의 역사 갈래, 특징

가람의 시조 혁신을 위한 노력

고전문학으르 지키기 위한 노력

국문학 정립을 위한 노력

가람이 쓴 책들

조선어학회 사건의 배경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달과 경 고과

한글학자 33인의 옥중 저항                                                          가람의 옥중저항

가람 이병기 선생의 공훈 연보

문방사우와 낙관

건국훈장 애국장

가람 일기

가람은 일제의 강요에도 끝끝내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親日)적인 글을

쓰지 않아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광복 후에도 현대문학 월간문학 등에 꾸준히 시를

발표하였으며 수많은 기행문과 서간문을 남겼다. 특히 1909년부터 근 60년에 걸쳐 쓴 일기는

2백 자 원고지 4천 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훌륭한 산문 문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람선생의 남겨진 유품

가람 선생의 '가람 일기 9선' 그리고 초등 국어 교본을 만들고 지켜낸 가람선생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것이 모두에게 어려움이었겠지만 대한민국의 글과 혼을 지켜내야 한다는

문학인으로서의 가람 선생의고집스러움을 문학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랑채와 오른쪽에 승운 정 정자

수우재(守愚齋)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수우재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이다.

안채, 사랑채, 고방채 등 세 채의 소박한 초가로 이루어져 있는데 'ㄱ'자 형태의 안채는 독특한 구조이다.

수우재 현판이 걸려 있는 사랑채 옆에는 승운 정(勝雲亭)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고 다시

그 옆에는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수령이 오래된 탱자나무가 꿋꿋하다.

수우재 앞은 가람의 조부가 앞서 조성한 우석(愚石)과 우담(愚潭)이 지키며 수우재와 조화롭다.

안채

사랑채와  승운정 그리고 부속건물들

좌측에 승운 정이 보이고 이곳 연못은 우담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가람선생의 생가에 자리 잡은 탱자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는선생의 조부께서

이곳으로 오실 때부터 있었다 하니 수령이 족히 200년은 되었을 것이라 한다.

봉선화. 깃털 유홍초. 천일홍. 채송화 등

생가 뜰에는 우리의 토종 꽃들이 많이 보인다

창/이병기

가람 이병 기선 생상

묘지로 오르는 돌계단

묘지도 소박하게 표지석만 하나 서있다

묘지를 보고  내려오며 생가 전체를 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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