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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담양 소쇄원

주차장 앞에 세워져 있는 소쇄원 안내도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조성한 곳으로,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대표적인 것이다.

힌편,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다.

2008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지정구역 4,399㎡, 보호구역 11만 7,051㎡

이곳에도 밤꽃이 만개를 해서 꽃냄새가 진동을 한다

매소를 지나 소쇄원에 오르는 대나무 숲길

대숲은 소쇄원의 내외를 구분 짓는 요소이자 신선의 경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입구다. 이곳을 지나야만 내원으로 진입할 수 있어 소쇄원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왕대의 죽순도 담아보고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가 은사 조광조(趙光祖)가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에게 몰려 전라남도

화순 능주로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 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원림(園林)이다.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소쇄원으로 통하는 다리 

왕대나무숲 속에 뚫린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오면, 입구 왼편 계류 쪽에 약 18m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방지(方池)가 만들어져 있고, 과거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이것은 장식용으로 오곡문 옆 계곡물이 홍대를 타고 내려와 위쪽 못을 채우고, 그 넘친 물이

도랑을 타고 내려 와 물레방아를 돌리게 되어 있어, 이것이 돌 때 물방울을 튀기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물의 약동을 건너편 광풍각에서 감상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써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소쇄원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슝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 있다.

소쇄원은 무등산의 북쪽 기슭에 있는 광주호의 상류에 위치하여 무등산을 정남 쪽에 대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까치봉과 장원봉(壯元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동서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광풍각의 건너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위쪽에 초정으로 지어진 대봉대(待鳳臺)가

자리하고 있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지은 조그마한 정자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이름의 대봉대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를 심었다.

또, 뒷산과 까치봉 사이의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산기슭에 터를 잡은

소쇄원의 바로 앞에는 증암천이 동서방향으로 흘러 광주호에 들어가고 있다.

 

정원의 평면적인 모습은 계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이며, 흙으로 새 메움을 한

기와지붕의 직선적인 흙돌담이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계곡의 굴곡진

경사면들을 계단상으로 처리한 노단식 정원의 일종이지만, 구성면에서는 비대칭적인

산수원림(山水園林)이다.

오곡문

소쇄원은 계류가 암반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의 자연을 다듬어 만든 전통적인 계원(溪園)의

모습을 잘

특히 담장으로 계곡을 가로막아 정원의 구획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교각을 세워

가르는 담장에는‘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

(瀟灑處士梁公之廬)’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광주호의 상류에 창암촌이 있는데, 이 마을이 양산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그는 15세가 되던 해에 상경하여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519년 17세에 현량과에

합격했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창암촌 옆의 산간 계곡을 택하여 조성한 별서가 바로 소쇄원이다

자주달개

오곡문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밑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류와 그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m, 너비 1.8m와 1.5m의 크기를 가지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낭만적인 멋은 계류공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소쇄원은 기능과 공간의 특색에 따라 애양단구역(愛陽壇區域)·오곡문구역(五曲門區域)·제월당구역

(霽月堂區域)·광풍각구역(光風閣區域)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곡문의 ‘오곡’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之자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암반은 반반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서 즐기기에 넉넉한데,

「소쇄원도」에는 한편에서는 바둑을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제월당구역은 오곡문에서 남서방향으로 놓여 있는 직선도로의 위쪽 부분을 말하는데, 주인을 위한

사적(私的) 공간이다. 제월당 앞의 마당은 보통의 농가처럼 비워져 있으며, 오곡문과의 사이에 만들어진

매대(梅臺)에는 여러 가지 꽃과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한편,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 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 있다. 오른쪽 목판이 48 영시다

고경명선생의 글 

석천 임억령의 글

김후의 글 

광풍각과 제월당을 잇는 협문

소쇄원의 조경식물로는 소나무·단풍나무·버드나무·참등나무·대나무·매화나무·복사나무·살구나무

·벽오동나무·배롱나무·회화나무·치자나무·사계화나무·국화·파초·연꽃·철쭉·동백·난·측백나무 등을 심었다.

 

이들 가운데 소나무·매화나무·대나무는 국화와 함께 사절우(四節友)라 하여 선비들이 즐겨 심었던 것이며,

측백나무는 주나라 때 왕자의 기념식수로, 회화나무는 고관들의 기념식수로 쓰이던 나무들로, 그 풍습에

따라 자손이 성공하기를 비는 뜻으로 심었다. 현재는 당시에 심은 나무들 가운데 소나무·측백나무·배롱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산까치? 맞나요?

예나 님께서 물까치라고 알려주시네요

살구 

그의 부인은 광산김 씨로 정랑 김후의 따님이며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의 누이였다.
결혼을 한 해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지만 19세에 첫아들을 낳고 21세에 차남인 자질이

태어나고 25세에 셋째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 해에 부인이 죽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제월당의 ‘제월’과 광풍각의 ‘광풍’은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이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사람됨을

평하여 “흉회쇄락여광풍 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양산보는 선비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선비와 교류하고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원림을 조성하며 바른 삶을 살아간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쇄공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보면 “본래 덕성이 높은 데다 또한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학식을

함양 했으니 알차고 참된 인격자로서 호남에서 위대한 선비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소쇄원은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의 언덕에 복사나무·배롱나무 등을 심어 철 따라 꽃을 피우게 하였으며,

광풍각 앞을 흘러내리는 계류와 자연폭포, 그리고 물레방아에서 쏟아지는 인공폭포 등 자연과 인공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속세를 벗어난 신선의 경지를 방불하게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시인·묵객·문사들의

방문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었으며, 그들이 남긴 시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소쇄원은 보길도의 부용동원림과 양의 서석지와 더불어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서(別墅: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정원이다.

위의 내용들은 우리 명승기행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바위취 

광풍각은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뒤편에 짝을 이루는 제월당이 있다.

광풍각의 한가운데에는 방이 있는데 호남 지방에 많이 지어진 정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광풍각구역은 제월당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이러한 조경방법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광풍각의 뒤쪽에 있는 동산을 복사동산이라 하여 도잠(陶潛)의

무릉도원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김인후의 소쇄원 48 영시에서

광풍각에 누워 머리맡으로 계곡 물소리(枕溪文房)를 듣는다. 대숲에서 울리는 바람소리(千竿風響)를

들으며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본다(廣石臥月). 걸상 바위에 조용히 앉아(榻巖靜坐) 바둑을 두고

(床巖對棋) 도는 물살에 술잔을 띄운다(洑流傳盃).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危巖展流) 계곡에는

대나무 다리가 위태롭다(透竹危橋).

안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언제든지 부모 곁에 있으면서 환한 얼굴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조석으로 인사드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사람에 있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하였으며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못하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수백 마디로 된 효부(孝賦)를 지어 효에 대한 근본정신과 사상을 밝혔다.
더욱이 한문에 밝지 않은 일반인들의 이해를 위해 한글을 세 기어 적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퍽 감동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라고 후학인 이민서는 소쇄공을 얘기하고 있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이선희 -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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