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아침에 일어나 처음 찾은 곳이 삼학도다
예전에 한번 와봤지만 이난영의 목포에 눈물의 삼학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육지가 돼서 섬이라는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삼학도는 매립을 하여 섬이 아니라 이러한 수로 3개로 분리되었을 뿐 육지화되었다
네비를 찍고 한 바퀴 돌아보려 하는데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이다
공원에 있는 고목나무
기증자:박종필. 원산지:인도네시아. 나무수령:150년.
트리토마
백합과 니포피아 속 식물의 통칭. 아프리카 원산으로 불타는 횃불을 닮은 독특한 색과 모양의 꽃으로 유명하다.
다양한 원예 품종이 있다.
삼학도
목포의 역사와 전설이 있는 섬, 삼학도 지금은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으나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
사람들의 꿈이었고 미래였다. 망망대해로 낭군을 떠나보낸 아낙들의 외로움이 녹아있고, 고깃배를
기다리는 상인들의 희망이 달려있으며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건너는 망자들의 한이 녹아있는 곳이다.
이렇듯 삼학도는 목포사람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산 시민의 서러움이 엉켜있는 곳이다.
무안동 남동쪽에 위치하며 면적은 1.12㎢이었고, 해안선 길이는 4.3㎞이었다.
연륙(連陸) 및 간척공사(1968∼1973)의 완공으로 현재는 내륙과 이어져 영해동의 일부가 되었다.
대삼학도·중삼학도·소삼학도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연결되었다.
섬의 모습이 학처럼 보여 삼학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에는 무사와 그를 사랑했던 세 처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 처녀가 그를 기다리다 학이 되었으나, 이를 알지 못한 무사가 쏜 화살을 맞아 모두 죽게 되었고,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아나 삼학도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물이 잔잔해 반영도 아름다
현재 삼학도 자리에는 항만청·해양경찰대·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등의 정부기관과 한국냉동·
호남제분 등의 기업들이 있으며 1,5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삼학도의 끝 자락에는 목포외항이 건설되었으며, 삼학도에서부터 전남도청 일대까지는 1999년에
조성된 하당 신시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난영
본명 이옥례(李玉禮). 전라남도 목포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 이봉룡(李鳳龍)과 함께 불우하게 자랐다.
16세 무렵 태양극단의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나섰다.
단체가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에게 발탁되어, 1933년에 염석정 작곡의 「향수」를
취입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이 이난영의 데뷔곡이다.
1935년 가사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의 새별로 등장하였다. 1936년 20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뒤이어 이봉룡 작곡의「목포는 항구다」, 김해송 작곡의「다방의 푸른 꿈」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가 되었다.
광복 후에도 무대가수로 활약하였는데, 6·25 동란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손수 운영하였다.
자식들도 미국에서 김시스터즈·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하였고, 1963년 한때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별세하였다.
목포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중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집주인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추천하여 순회공연 중이던 삼천가극단의 막간가수로 서게 되었다.
그 후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극단을 따라나섰다가 1932년 목포에서 태양극단에 입단,
단역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이난영이라는 예명은 이 무렵 얻게 되었다.
이난영의 노래비와 묘
목포의 눈물(노래 이난영)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색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 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바람도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는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는 항구다(노래이난영)
영산강 안갯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여주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
비 젖은 선창머리 돛대를 달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고향
삼학도에서 바라본 유달산
삼학도를 돌아보고 친구가 가보지 않았다고 해서 이곳 갓바위로 왔다
갓바위
유헌의 시
영산강하구언
영산강 하구둑(榮山江河口둑, 영어: Yeongsan River Estuary Bank)은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읍 나불리 사이의 영산강 하구를 가로막아 만든 하구둑이다.
길이는 4,351m이며, 평균 높이는 20m이고, 너비 30m, 높이 13.6m, 두께 3.6m, 무게 480t의 철제
배수갑문이 8개 설치되어 있다.
갓바위에는 중바위가 있고 삿갓바위가 있는데 보통 삿갓 바위를 보고 중바위 또는 삿갓바위라고들 한다.
바다 쪽에 있는 바위가 마치 스님 두 분이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갓바위라고 부르며 중바위는 훌륭한
도사스님이 기거하였다 하여 중바위라 전해지고 있다
갓바위전설
아주 먼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아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 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닷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과 아라한(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자) 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어 이를 중바위(스님 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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