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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의령 솥바위와 정암정

주위에 부자들이 많이 배출된다는 솥바위에 왔다(10/16)

정암 바로 앞 나루가 있던 자리에 꼭 나루같이 생긴 전망대가 있다.

커다랗게 세워놓은 'RICH'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조선 후기에 어느 도인이 솥바위에 앉아 놀면서 '앞으로 솥바위 반경 20리 안에서 나라의 부자 세 명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솥바위 반경 20리 이내에서 삼성의 호암 이병철,

금성(LG)의 연암 구인회, 효성의 만우 조홍제가 태어났다. 그래서 의령군은 솥바위를 '대한민국 부(富)의

원점'으로 홍보한다.

의령군은 ‘주변 20리(8㎞)에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고 실제 삼성·LG·효성의 창업주가 탄생해

전설이 현실이 된 솥바위를 '대한민국 부의 원점'이자 존재 의미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신묘한

대상'으로 아끼고 있다.

경상남도 의령에 있는 솥바위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유명한 명승지이다.

여기에서는 기암괴석들이 모여 있는데,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마치 큰 솥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다. 이곳은 주변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사진 찍기에도 좋은 장소다.

주변에는 조용한 산책로와 휴식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솥바위와 정암철교

현재는 차량통행은 할 수 없고 인도교로 사용을 하고 있다 

솥바위 부근에는 이병철 구인회 조홍재 등 부자들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의령읍 정암리는 남강(南江) 변의 마을이다.

강 저편은 함안의 군북면 월촌리다. 남강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정암에서는 정강(鼎江) 혹은

정호(鼎湖)라 부른다.

정호는 옛날 홍수가 나면 일대의 마을 모두가 강이나 습지로 변해 호수처럼 넓어져서 생긴 이름이다.

정호 가운데 작은 바위섬이 있다. 솥뚜껑을 닮았다 하여 바위는 정암(鼎巖) 즉 '솥바위'다.

정(鼎)은 세발 달린 솥을 뜻하는데 정암도 물속에 세 개의 기둥이 있다고 한다. 정암 앞쪽은 높은 벼랑이다.

의령읍 남쪽에 솟아있는 안산을 남산이라 부른다.

옛 지도에는 구룡산(龜龍山) 혹은 구룡산(九龍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거북과 용'의 산 혹은 '아홉 마리 용'의 산이라는 뜻이다.

남산에서 흘러나온 맥이 용처럼 구불구불 달려 강으로 뛰어드는 자리가 벼랑이다.

벼랑 아래에는 너럭바위처럼 단단하고 평평한 노두가 드러나 있는데 그 옆으로 정암 둑방길이 이어진다.

둑방 아래에는 옛날 정암나루가 있었다.

그러니까 저 솥뚜껑 닮은 바위 하나가 마을의 이름을 만들고 강의 이름을 만들고 나루의 이름을 만들었다.

둑방길 안쪽은 '의령 역사문화 테마파크', 공원 산책로는 '부잣길'이다.

둑방길에 진분홍 가우라 꽃이 현란하다. 이곳 등지에서 '의령 리치리치 페스티벌'이 열린다.

10월 6일부터 9일까지다

예부터 정(鼎)자는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단어에 많이 쓰였다.

정보(鼎輔)는 삼정승을 뜻하고, 정갑(鼎甲)은 과거시험에 최우등으로 급제한 세 사람이며, 정식(鼎食)은

진수성찬, 정내는 재상의 자리, 정조(鼎祚)는 임금의 자리를 뜻한다.

풍수에서도 '정'은 재물을 상징하고, 주역의 정괘 역시 발전을 뜻한다고 한다.

정암 역시 길한 운이 풍성한 곳이라 하여 부와 건강과 사업성공 등을 기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한단다,유혜숙님의 글에서

정암 주위에서 태어난 부자들 

정암루 

정암철교와 정암루

정암나루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정암철교가 가설되면서 사라졌다. 원래 이름은 정암교였다.

길이 259.6m에 폭이 6m인 근대 트러스 구조의 다리다. 트러스는 정암 쪽 두 개의 경간에만 설치되어 있다.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른 곳이라 교각의 흔들림을 막기 위한 것이다.

 

정암교는 6·25전쟁으로 파괴되었고 이후 1958년에 남아있던 기둥을 살려 복원했다.

그리고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정암교는 중동부 경남, 서북부 경남, 그리고 전라도 지역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1988년 말 바로 옆에 새로운 다리를 놓으면서 정암교는 이름도 넘기고 임무도 넘겼다.

한동안 1t 이하의 차량만 통행이 허용되다가 2007년부터는 차량 통행이 정말 금지되었고 보행자와 자전거만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 이후 2014년에 '정암철교'라는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639호가 되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구 정암교 또는 옛 정암교라고 부른다.

정암철교 초입에 준공 당시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다리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낙과 중절모를 쓴 사내들의 얼굴도 보인다. 트러스를 올릴 때부터 다리는 엄청난 구경거리였다고 전해진다.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님 오시는데 길마중 갈거나

너이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

까시밭이 천리라도 맨발로 갈거나

간다 못 간다 얼마나 울었던지

정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아이고 되어구 뚜댕구 뚜댕구 성화가 났네

정암 뱃사공 노래다.

홍의장군곽재우

남강은 의령의 동남쪽 70리를 흐른다. 강을 따라 크고 작은 나루가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 정암나루는

가장 큰 나루이자 호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요지였다.

옛날에는 구포에서 어물과 소금을 실은 배가 낙동강과 남강을 타고 올라왔고 그 배가 의령의 토산품인 땔감,

옹기, 곡물, 한지, 피륙 등을 싣고 내려갔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5월 중순, 경남 함안을 점령한 왜장 안코쿠지가 병사 2천여 명을 이끌고 의령 정암진으로

향했다. 전라도의 곡창지대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선인 포로를 동원해 도하 지점을 정하고 진창이 없는 곳에 나무 팻말을 꽂아 두었다.

첩보를 입수한 곽재우는 밤사이 팻말을 늪지대로 돌려놓고 정암진 일대에서 매복했다.

날이 밝자 왜군은 도하를 시작했지만 곧 늪에 빠졌고 그때 의병들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것이 정암진 전투다.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였다.

 

정암과 정암정을 둘러보고 이곳 합강정에 왔다 

합강정

조임도(趙任道)는 장현광(張顯光)의 제자로 학문에 전념하여 인조반정 후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어

한때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고 인조·효종 때에는 대군의 사부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이곳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이 정자는 1633(인조 11)에 건립한 기와집인데, 1941년에 중수하였으며

 198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화경 조재규사적기념비  

 정사로 오르는 계단 옆에 “징사간송조선생유허비(徵士澗松趙先生遺許碑)”와 화경조재규사적기념비

(華耕趙再奎事蹟記念碑)가 나란히 서있고, 합강정사를 지키고 있는 선생이 심은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나무 둘레 4.6m, 높이 약 35m, 가지 폭 약 25m)가 천수(天壽)의 위풍으로 선생의 학업을 엿보게 한다.

화경조재규사적기념비(華耕趙再奎事蹟記念碑)에서" 낙문건립 봉정이축 치석원장(洛門建立 鳳亭移築 治石垣墻)"이라

했으니 낙원문은 이때 세우고 담장도 만들고 내내 에 있던 상봉정터에는 "상봉정 유허비"를 세우고 합강정을

중수하는 등 제반 비용을 趙再奎가 많이 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사 간송선 유허비 

간송 선생은 본관은 함안, 자는 치원(致遠), 후에 덕남(德男)으로 바꾸었다.

호는 간송(澗松)으로 남명조식(南冥曺植) 선생이 서거한 33년 후인 선조 18년(1585. 7. 17. 乙酉)에

함안 검암(儉巖 지금의 가야읍 검암리)에서 사도사 첨정(司?寺 僉正) 입암(立巖) 식(埴)의 아들로

출생하여 선조. 광해. 인조. 효종. 현종까지 5 왕조를 거치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탐구와

저술활동을 하신 당 시대의 큰 학자로, 반구정(伴鷗亭) 주인인 두암(斗巖) 조방(趙垹)은 선생의

계부(季父 아버지의 막내 아우) 이시다.

간송 선생은 함안조 씨 간송파 파조(派祖)로 창녕의 입향조(入鄕祖)이시다.
간송 선생은 함안조씨 시조 정(鼎) 후 12대손 어계(漁溪) 조여(趙旅. 생육신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의

6 세손(시조 후 17대)으로, 남명의 제자인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는 선생의 삼종형(三從兄)이다.

 

합강정은 1633년 간송 조임도 선생이 세웠으며 지금은 임도가 있어서 차량의 통행이 가능하지만

강과 산으로 막혀서 오지 중의 오지이다.

마당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남지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학문에 열중하시던 선비의 삶이 깃든 곳이다. 

 

선생은 퇴계문인들에게 수학하였으나 혼례는 23세에 이흘(李屹 남명의 제자인 내암 정인홍의 문인)의 따님과

혼례 하여 당대의 영남의 두 학파인 강우파( 江右派 南冥 曺植)와 강좌파(江左派 退溪 李滉)의 양 학파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용화산(龍華山기슭의 강변에 있는 정면 4측면 2칸의 정자이다

조임도(趙任道)가 은거수학한 곳으로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으나 여기가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므로 합강정(合江亭)이라는 이름의 편액을 정자에 걸게 되었다 한다.

상봉정 

징사(徵士) 간송(澗松) 조임도(趙壬道) 선생은, 8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합천·

경북 청송·영주·봉화·의성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때 선생은 퇴계 학맥을 이은 여러 선비들로부터 공부를 배웠으며, 19세 때 비로소 고향인 검암에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서 ‘간송(澗松)’이라고 스스로 호를 붙였다.

그리고 시한 수를 지어 좌우명으로 삼고자 했다.


‘爲愛澗邊松 天寒不改容(위애간변송 천한불개용)’
‘시냇가의 소나무를 사랑하니 날씨가 추워도 그 모습 변치 않기 때문이라네’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아 올곧은 선비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상봉정중수기  

망모암 

선생은 용화산 동편 끝에 살면서 용화산 서편 끝 동박골에 부친의 묘소를 모셔 놓고 바라볼 수가 없어

안타까워 애를 태우다  49세 되던 1633(인조 11년. 계유)년 봄에 홀 어머님을 모시고 함안군 칠서면

내내 마을 상봉정(翔鳳亭)에서, 부친의 묘소를 바라볼 수 있는 창녕군 남지읍 기강(용산리)으로

이사를 와서 망모암(望慕庵)을 지어 거주하며 가을에 낙동강 건너 용화산 아호(鵝湖)에 합강정사를

지었다고 간송집에 전하고 있다. 기강(岐江)은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으로, 용산마을은

퇴계학파인 강좌(江左) 지역이고, 합강정은 남명학파인 강우(江右) 지역으로 기강은 두 지역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사월로  

합강정 사는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 선생이 은거하며 수학하던 곳으로, 49세(인조 11년. 1633 계유) 봄에

내내(奈內)에서 기강(岐江 : 지금의 용산리)으로 옮겨와 살 때, 용산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강 건너 용화산 기슭

함안군 장암리 장포 산 60-1의 현 위치에 왼쪽에 사월로(沙月樓) 오른쪽에 연어대(鳶漁臺) 등 소정삼간(小亭三間)을

지어 합강정사(合江精舍)라 현판하고 은거(隱居)하였다고 모암기(望慕巖記)에 전한다.

 강재 12 영〔江齋十二詠〕

 

망모암(望慕庵)
바라보고 그리워한들 무슨 수로 볼 수 있을까 / 望慕何由見 망모하유견
소나무 숲에 묵은 풀도 우거졌는데 / 松間宿草荒 송간숙초황
부질없이 풍수지탄을 품고 / 空懷風樹恨 공회풍 수한
비장하게 료아장을 읊어보네 / 莊誦蓼莪章 장송료아장

 

연어대(鳶魚臺)
천 길 물속에서 고기가 뛰고 / 魚躍千尋水 어약천심수
만 길 하늘에 솔개가 나네 / 鳶飛萬仞天 연비만인천
천기는 저절로 움직일 수 있으니 / 天機能自動 천기능자동
지극한 이치는 여기서 밝게 드러난다네 / 至理此昭然 지리차소연

 

석천 와(石泉窩)
돌구멍에 신령스러운 샘이 솟으니 / 石竇靈泉逬 석두령천병
깊고 맑아 거울 같은 웅덩이가 되었네 / 泓澄一鑑窪 홍징일감 와
스님이 와서 초가를 짓더니 / 僧來結茅舍 승래결모사
양치질하고 산수간에 누웠네 / 漱玉臥煙霞 수옥 와 연하

 

사월로(沙月樓)
휘영청 달빛이 대낮처럼 밝으니 / 皓月明如晝 호월명여주
넓은 모래밭이 은보다 더 하얗네 / 平沙白勝銀 평사백승은
정신이 맑아 잠이 오지 않는데 / 神淸無夢寐 신청무몽매
눈앞엔 가는 티끌 한 점도 없네 / 眼界絶纖塵 안계절섬진

 

와운 헌(臥雲軒)
밤이면 처마 끝에 머무는 것이 좋고 / 夜愛簷端宿 야애첨단숙
아침이면 언덕 위를 나는 것이 예쁘지 / 朝憐隴上飛 조련롱상비
이불과 베개가 차가워 꿈을 깨니 / 夢驚衾枕泠 몽경금침령
창문과 벽이 안개로 가득 찼네 / 窓壁滿霏微 창벽만 비미

 

농월담(弄月潭)
장마 지나고 연못이 맑아진 뒤 / 潦盡潭澄後 료진담징후
하늘 위에 달이 뜬 때 / 天空月上時 천공월상시
조각배가 물에 비친 그림자에 올라타 있으니 / 片舟凌倒影 편주릉도영
이 즐거움이야 말로 누가 알리오 / 此樂也誰知 차락야수지

 

병풍바위〔石屛〕
격려가 바위를 뒤덮었는데 / 薜荔縈巖石 벽려영암석
높고 낮게 끊어졌다 또 이어지네 / 高低斷復連 고저단복련
푸른 병풍이 살아 있는 그림을 펼쳐내니 / 蒼屛開活畫 창병개활화
그림자가 물속 하늘에 거꾸로 비치네 / 影倒水中天 영 도수 중천

 

노암(鱸巖)
장한이 지녔던 삼오의 흥취 / 張翰三吳興 장한삼오흥
엄광이 즐겼던 칠리탄의 바람 / 嚴陵七里風 엄릉칠리 풍
낚싯대 하나로 세상사를 잊었으니 / 一竿忘世事 일간망세사
누가 이 한가한 늙은이와 비슷할까 / 誰似此閒翁 수사차한 옹

 

소나무 비파〔松琴〕
솔바람 소리 바람 따라 흩어지니 / 松籟隨風散 송뢰수풍산
시원한 태고의 소리로다 / 泠然太古音 령연태고음
듣기만 해도 가슴속이 시원해지는데 / 聽來襟韻爽 청래금운상
칠현금이 무슨 소용 있으랴 / 何用七絃琴 하용칠현금

 

장사배〔商帆〕
돛단배 황급히 어디서 오는가 / 帆急來何所 범급래하소
동남쪽 장사꾼의 배로다 / 東南賈客船 동남고객선
저녁노을 가을 포구 너머로 비치는데 / 殘霞秋浦外 잔하추포외
가랑비는 저무는 강변에 내리네 / 細雨暮江邊 세우모강변

 

먼 하늘 기러기〔雲鴻〕
아득히 구름 노니는 하늘 끝 / 萬里雲霄外 만리운소외
가물가물 보이는 한 마리 기러기여 / 冥冥一箇鴻 명명일개홍
배가 부르지 않다고 근심하지 말고 / 莫愁腸未飽 막수장미포
더욱 힘차게 날아 센 활을 피하라 / 增擊避彊弓 증격피강궁

 

물결 속 갈매기〔波鷗〕
드넓고 푸른 물결 위 / 浩蕩滄波上 호탕창파상
짝지어 노니는 하얀 갈매기 / 雙飛雪點鷗 쌍비설점 구
내 머리도 너와 같이 희니 / 吾頭同爾白 오두동이 백
이 빈 배 곁으로 오려무나 / 來傍此虛舟 내방차허주

와운 헌 

합강정은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쪽에 위치한 정자

남지 쪽 백사장에서 강을 건너 바라다보면 350년 넘는 수령의 은행나무가 보인다 

남지수변공원과 남지철교가 보인다  

나오면서 바라본 합강정 

최성수 - 해후&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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