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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12월 30일 부부 함께 경주 구경하고 대왕암 쪽에서 숙박을 하며 1월 1일 해맞이를 하자고 의기투합

숙소까지 예약을 마쳤는데 밤에 서울의 지인의 부음이 전해진다 

어찌하랴 꼭 참석을 해야할 분이기에 모든 것 취소를 하고 31일 오전 8시 5분 차로 서울행 

부산역에 도착을 하니 아직도 크리스마스 조형물이 있어 둘이서 사진한장 남기고 출발 

장의예식장과 딸네집이 바로 옆이어서 점심 같이 하고 기차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풍납토성에 잠시

 들렸보기로 한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지어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토성(土城). 정식 명칭은

서울 풍납동 토성이며, 사적 제11호이다.

예전의 이름은 광주 풍납리 토성(廣州風納里土城)인데, 2011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단순한 방어성이라는 의견이 서로 엇갈리면서

중요성과 보호에 머뭇거리는 점이 있었다. 현재는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라는 것이 정설. 발굴조사

성과를 보면 단순 방어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머어마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위치는 몽촌토성의 북쪽에 있다. 고이왕 시기와 근초고왕 시기에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 사이에 타원형으로 위치해 있으며, 전체 넓이는 35만 3589.1 ㎡이다.

본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토성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리고,

이후 서울이 개발되는 와중에도 특별한 보호 없이 방치되는 등 잡다한 사유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2.7 km가량만이 남아 있다


한강변에 인접한 서쪽 성벽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으며 최근 2017년 조사에서 성벽 흔적과

문이 있었던 자리가 확인되었다.

서벽이 유실되면서 중국제 초두(鐎斗)를 비롯한 백제 유물이 확인되어 풍납토성의 존재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대형 수혈(구덩이)로 다량의 토기 편과 동물뼈가 확인되었다.

특히 소와 말 머리뼈가 10 개체 이상 확인되었으며 대부(大夫)가 새겨진 직구단경호(곧은 입항아리) 등이

확인되어 제사를 지낸 후 사용한 토기 및 희생된 동물을 폐기한 유구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소와 말의 머리뼈가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몸통에 해당하는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의적 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소와 말은 운송수단이자 농경에 활용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이런 동물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제사의 가능성을 배제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풍납토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고적조사이다.

유적이 있다는 정도만 파악한 간단한 조사였다. 이 유적의 구체적인 성격은 1925년 7월의 을축년 대홍수

인해 밝혀졌다.

 

7월에 300mm 이상의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며 한강이 넘치고 민가 273채가 유실되는 피해가 있었다.

이때 범람한 한강에 의해 토성의 서벽 인근이 쓸려나갔다. 한 달 뒤인 8월 세키노 다다시에 의한 조사 결과

청도제 자루솥, 금제 귀걸이와 허리띠, 백동거울, 유리구슬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조사의 성과를

바탕으로 1934년에는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백제 초기 도읍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고적 27호로 지정했다.

1939년 이병도는 이 성을 왕성이 아닌 군사적 목적의 사성(蛇城)으로 보았다.위키리백과에서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963년 성벽만이 사적 11호로 지정되었고, 성의 내부는 사유지로 남아있다.

196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시행한 시굴조사에서 삼국 시대 건국초기의 철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때 발굴을 주도한 김원룡 교수는 1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1975년에 김원룡은 이병도의 견해를

받아들여 "반민반군(半民半軍)의 읍성"이라 보았다.

이후 강남이 개발될 때에도 성벽만 유적으로 인정된 데다 성의 기능 역시 주목할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조사 없이 개발이 이루어졌다.

풍납토성의 기능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1996년에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388번지에서

실시한 구제발굴조사에서 유물층이 확인되었다.

연달아 1997년 1월에는 이형구 교수의 조사에서 백제토기가 발견되었다.

이에 풍납지구 긴급발굴조사단이 구성되어 주거지 19기와 3중 환호를 확인했다.

 

1999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동성벽 단면 절개조사를 실시했고,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경당지구를 발굴했다.

경당지구에서는 백제의 각 지역에서 올라온 토기들과, 중국에서 만들어진 토기들이 다량 발굴되어 해당 유적의

특별한 지위가 확인되었다. 제사유적과 제사 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구덩이 유구, 기와와 건물바닥에

까는 전, 토기, 유리구슬 조각, 제물로 보이는 12마리의 말머리 등이 나왔다. 경당지구의 제사유적 주건물은

길이 13.5m, 폭 7, 길이 3m의 궁자형 가옥이었다. 위키리백과에서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기원전(B.C) 2세기때 축조한 토성 유적으로 풍납동 토성이라는

명칭은 과거 풍남리일대의 토성이라는 뜻에서 온 것이며, 정확히 조선시대 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고산성

(古山城)"이라고 나와있다. 풍납토성이 정식적으로 1900년대 학계에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의 대홍수 때이며,

지난 1997년 아파트 공사를 계기로 다량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위키리백과에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일부만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희망의 속삭임 Whispering Hope / Anne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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