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을 여러 번 다녔지만 부석사는 한 번도 못 가다가 몇 년 전 여행 중에 부석사 이정표를 보고
무조건적으로 들렸던 것이 부석사인데 어디든 한 번 가게 되면 연속으로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기라도 하 듯 몇 년 만에 또다시 부석사에 오게 되었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대왕 16년(676년)에 의상이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종 사찰로서,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다.
부석사는 특히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의상을 "부석 존 자"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1372년(공민왕 21)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많은
건물들이 다시 세워졌다. 몇 안 되는 고려 시대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
무량수전 외에도 부석사에 많은 문화재들이 존재한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부석사가 왜 태백산에 있는가 했는데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는데 태백산에 가까워
태백산 부석사라 했다고 한다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있는 큰 바위가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합니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의 하나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 5점, 보물 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과 함께 아름다운
석물들이 많습니다.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
(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도유형문화재 제127호), 북지리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으며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부석사에 오르다 보면 좌측에 사과밭이 있는데 부부가 사과도 팔고 있다
사고 싶어도 가지고 내려가기가 쉽지 않아 사지 않았다
부석사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 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돌계단을 올라가야 하기에 여성들은 옆길로 가고 남자들만 이길로 오른다
옥잠화
법고로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인 범종루는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건물로 사방이 트여있고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팔작지붕을 한쪽이 정면[남쪽]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비상하듯이 앉아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 보임에 따라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놓고 뒤쪽을
맞배지붕으로 하여 건물이 날아오르는 느낌을 주도록 처리하였습니다.
법고루에는 북과 윤판 목어가 있다
홍고라고도 한다. 주지의 상당·소참·보열·입실 등의 법요 의식에 쓰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침·저녁 예불 때와 법식을 거행할 때 이 북을 친다.
이때 북을 치는 이유는 축생의 부류를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서탑(西塔)과 불사리탑이 건비(佛舍利塔 移建碑)
서탑 앞에 있는 불사리탑이건비(佛舍利塔 移建碑)에 의하면 "부석사 동방 신라 절터에서 석상과
파탑(破塔; 파괴된 석탑)이 2기가 있었는데 부석사 범종각 남동(南東) 쪽에 이건 하였고,
서탑에는 전북 익산군 왕궁면 오 층 석탑(五層石塔)으로부터 석존사리(釋尊舍利) 5 립(五粒)을
나누어 봉안하였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노랑상사화
안양루(安養樓)
안양루(安養樓)는 조선 후기의 목조 건물로 범종루를 지나 누각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하는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건물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
석등(石燈)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앞마당 중앙에 세워져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 등(光明燈)이라고도 합니다.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배례석(拜禮石)이 있습니다. 석등은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집니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합니다.
배례석(拜禮石)
석등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습니다. 배례석의 정확한 용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행사에 사용되는
일종의 판석으로 본래 향로를 올려놓는 봉로대(奉爐臺)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외에서의 예불 때 향(香) 공양을 하던 곳으로 추정합니다. 배례석 상면(上面) 중앙의 연꽃무늬는
이중의 원으로 둘러싼 자방(子房: 씨주머니)을 두고 주변에 8 엽의 잎을 돌렸는데 사이에는 간엽(間葉)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재의 재질이나 형식 등이 석등과 동일한 시기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이후의 일반형에
속하는 배례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단석(基壇石)과 지대석(地臺石)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부재(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 다른 하나는 취현암(醉玄庵) 앞의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이 있습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하였으며 1969년에는 번와(翻瓦: 기와 덮는 일) 보수하였습니다.
배흘림기둥
높은기둥의 아래위 굵기가 같으면 눈의 착시현상으로 위쪽이 더 굵게 보이며 기둥이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배흘림기둥은 이러한 착시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의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합니다
무량수전의 공포(栱包)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였습니다.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안양루(安養樓)
안양루(安養樓)는 조선 후기의 목조 건물로 범종루를 지나 누각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하는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건물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무량수전의 본존으로 다른 불전 불상과는 다르게 측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서방 정토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를 향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융국사(圓融國師) 비문(碑文)에 따르면 의상대사(義湘大師)는 아미타불의
존엄을 높이려고 협시보살도 세우지 않고 불전 앞에 탑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석
신라 문무대왕 1년(661년) 의상 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 대사를 연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 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중난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 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 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렸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선묘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래 이 절터에는 사교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무리들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선묘가 띄웠던 바위이며 아직도 떠 있다고 한다.
부석사는 법고와 범종이 따로 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梵鐘閣)은 범종루 서쪽에 있는 건물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습니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에는 원형 주자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은 벌써 단풍이 물들고 있다
대석단(大石壇)의 석축(石築)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쌓아 만든 것입니다.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 배관(三品三輩觀)의
9품 만다라(九品曼茶羅)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다다르는
마지막 세 계단이 상품단입니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극락세계에 이를 수 있는
열여섯 가지방법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 세 방법은 삼품삼배관(三品三輩觀)으로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중품중생(中品中生)을 거쳐 하품하생(下品下生)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행실과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품만다라(九品滿茶邏)입니다. 케인스 님의 글에서 인용
한계령/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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