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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보성 서재필 기념공원

언제부터인가 이곳이 서재필박사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알고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들려보지 못했는데 오늘 부근에 지날 일이 있어 이곳을 찾아왔더니 기념공원과

기념관도 있고 옆에는 조각공원도 조성을 해놨다. 이곳을 둘러보고 생가를 다녀와

조각공원도 들려보려고 한다 (11/30)

위 단풍나무는 주암호를끼고 서재필선생 기념공원으로 가는데 

햇볕에 반사되어 어찌나 곱던지 가다 되돌아와 담고 출발을 했다

보성강이 주암호를 들어가는 들머리의 문덕교를 지나면 순천과 보성으로 나뉘는 삼거리이다

여기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길 8에 독립문이 우뚝 서 있으니바로 서재필기념공원이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으며 1994년 미국에 모셔진 유해는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1991년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하여 2003년 준공하였다.

서재필 기념공원은 선생의 생전의 위업을 기리고자 1992년 사업을 시작하여 사당건립, 송재로 개설,

독립문 건립을 통해 유적지로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각공원과 유물전시관, 그리고 생가 등이 복원되면서

명실상부한 기념공원이 되었다. 특히 유물전시관에는 서재필 선생 생전의 유품을 800여 점 전시하고

있으며 기녀뫈에서는 선생의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공원 건너편에는 보성군독립유공자 춤모탑이 서 있다

송재 서재필선생 동상

독립문

봄맞이 입춘 아침대문에 써 붙이던 입춘문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봄을 맞아 집안의 길함과

황제의 나라에 큰 경사가 두루 있기를 바라는 세시풍속이다.

 

고종이 1896년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황제가 되어 연호를 건양이라 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쓰던 조선 개국 5백 년에 처음 맞는 당당함이지만, 이미 나라는 기울어지는 달이었다.

 이듬해인 1897년 나라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황제즉위식까지 가졌지만, 이 역시 이름뿐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백성들은 첫 황제 연호 건양을 기려 새봄맞이에 자랑스레 대문에 붙인다.

그리고 이 건양다경의 다른 이름이 바로 독립문이다.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에 있는 독립문은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발의하고, 고종 황제가

동의하여 3,825원을 모금 그해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했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보성의 독립문은 2008년에 서울의 독립문과 똑같은 규모, 같은 방향으로 세워졌다.

 독립문이 세워진 의의와 뜻이 같고, 서재필을 기리는 의미가 더해진 기념비이다. 윤당님 글에서 

 

 

​서재필연보 

본관은 대구(大丘)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다.

아버지는 서광언(徐光彦)이며, 외가는 성주이 씨로 17세기 초 이조참판 이성(李珹)이 보성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1864년(고종 1) 1월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서 출생했으며 보성은

그의 외갓댁이 있는 곳이었다. 5세 경 본가가 있는 충청남도 논산 은진면(恩津面)에서 성장하다가,

둘째 아들로서 7촌 당숙 서광하(徐光夏)의 집으로 양자 입적되었다. 그러나 서재필의 총명함이 나타나자,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인 양어머니의 주선으로 7세 경에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判書

)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성장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1882년 3월 19세 때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하였고,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명문가에서 성장하여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하였다.

귀국 뒤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하였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았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

(3일 천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였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다.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며 현지에 적응하였다.

그 후 독지가 홀렌백(John Wells Hollenbeck)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1889. 6). 다시 워싱턴시(

Washington D.C.)로 이주하여 1889년 칼럼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Columbian Medical

College)에 입학하여 낮에는 일하고 야간부에 다녔다.

가족도 모두 잃고 역적으로 몰려 귀국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1890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모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유색인 차별의 분위기 때문에 사직하고 병원을 개원하였다.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혁이 단행되었고 갑신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도 벗겨졌다. 관직에 진출한 박영효(朴泳孝)가 1895년 미국에 들러 권유하여 그해 12월에

귀국하였으며, 이듬해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미국 시민으로 행동하며

이름도 미국명인 '필립 제이손'이나 한국명으로 표기한 '피재손'을 사용하였다.

 

1896년 4월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한편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하여

계몽활동도 병행하였다.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고(1896. 7), 이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도 개최되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에는 서재필은 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러시아 일본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으며, 당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여 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문구사업(Philip Jaisohn & Company)을 하다가, 3·1 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isure》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고,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여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한국통신부 활동을 종료하고 국내 신문 및 잡지에 기고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의학공부를 1년 더 한 후,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고,

1936년에는 개인 의원을 개업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미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광복을 맞은 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John R. Hodge)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

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1948. 9)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고, 1994년 4월 8일 미국에서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유해와 함께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8년 5월 6일 미국 워싱턴시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워싱턴시에서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하였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그가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을 열었다.

서재필 연보
출생 1864.1.7~ 사망 1951.1.5
1864
1월 7일 전남 보성에서 출생.
1870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 김성근 밑에서 성장.
1884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일본으로 망명.
1885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
1889
콜롬비아대학교(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 입학.
1896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
1898
미국으로 출국 후 육군 군의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 참전.
1947
귀국하여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시국 혼란으로 미국으로 돌아감.
1951
1월 5일 미국에서 사망.
1977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정문에서 들어서서 2번째 나오는 개화문이다. 외삼문에 해당한다

개화문은 구한말 개혁을 앞장서서 외치다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1864~1951)의 개화사상을 알리는 의미에서 여초 김응현

(1927~2007) 서예가가 쓴 글이다.

내삼문(자강문)

송재 서재필 사당

서재필영정

유리에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독립신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급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다.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하였다.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5일 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행하였다.

"독립신문"의 한글 전용은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 "독립신문"은 신문의 중요성을 일반에 널리 인식시켜 그 후에 여러 민간 신문이 창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신문은 여러 가지로 한국 신문사살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양관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외 대한민국장 서훈자 5인

좌로부터 손문. 송미령. 장개석. 진과부. 진기미

국내 대한만국장 서훈 25인

강우규. 김구. 김규식. 김좌진. 김창숙 민영환. 서재필. 손병희

신익희. 안중근. 안창호. 오동진. 윤봉길. 이강년

이승만. 이승훈. 이시영. 이준

임병직. 조만식. 조병세. 조소앙

최익현. 한용운. 허위

공원광장 좌측으로는 기념관이 있어 기념관으로 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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