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라 계단식 피라미드를 보고 이곳 멤피스의 야외 박물관에 왔다
멤피스와 사카라
시내에는 이렇게 우마차와 자동차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멤피스(위 설명문 해설)
멤피스를 언급하지 않고는 이집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로마를 언급하지 않고
이탈리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은 이집트의 첫 수도였으며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한
메니왕이 세웠다
멤피스는 원래 인부해지(흰벽)라고 불렀다
엠피스는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유명한 푸타신전의 라틴어 이름은 이집트라는 이름자체가 유래한 기원입니다
나일삼각주의 상류에 있는 이 도시의 전략적 위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동했다
결국 삼각주의 상류는 더북쪽으로 이동하여 현대 카이로의 조상인 이집트의 새로운
이슬람 수도인 푸스타트가 건설되었다
현대 카이로와 마찬가지로 멤피스는 한 때 사원 정착지 궁전이 있는 세계적인 도시였으며
그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념물 중 많은 것을 오늘날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일부를 책임진 다작한 건축가인 람세스 2세에게 빚졌다 우리의 ruseum에 들어와서 살펴보세요
멤피스
카이로 남쪽 20km 떨어진, 헬완 부근 나일 강 서안에 있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수도이다.
고왕국 시대가 기원전 32~22세기이므로, 지금으로부터 약 반만 년 전에 수도 역할을 한 곳이다.
멤피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식 명칭으로 고대에는 이네브 헤지(Ineb Hedj)라고 불렸다.
현대 이집트에서는 미트 라히나(ميت رهينة)라고 부른다.
《성경》에서는 멤피스를 놉이라고 부르며 통일 이집트 최초의 수도로서 제6왕조 시대까지 번영했다.
세계 최초로 댐이 건설되었고, 도시 전체를 감싸는 성벽 역시 홍수를 막아주는 보 역할을 수행했다.
중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부 상이집트의 테베로 수도가 옮겨진 이후로도 인근의 헬리오폴리스
등과 함께 북부 하이집트의 주요 도시로서 기능하다가 신왕국 시대인 제19왕조 때 다시 수도로
지정되면서 크게 번영하게 되었다. 이때의 이름은 멘 네 페르(Men nefer)로 '오래가면서도
아름다운'이라는 뜻이었으며, 이 단어가 '멤피스'라는 그리스어의 기원이 되었다.
기원전 13세기경 19 왕조시대의 신상
3명이 등장하는 이런 신상을 트라이어드라고 한다
가운데는 프타신 왼쪽은 프타신의 부인 세코메드여신
(머리 위 동그란 것이 태양의 상징) 오른쪽은 람세스 2세라고 한다
파괴된 각종 석상들의 상형문자
파괴된 이 석상도 카르투슈가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왕으로 보인다
카르투슈 왕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를 직사각형 안에 새겼다
람세스 2세석상은 27세 때 모습이며 세워져 있을 때 높이는 15m 현재의 높이는 12m라고하며
람세스2세 석상은 1821년 나일강이 범람한 강가에 엎어진 채로 노출된 채로 발견 덕분에 앞부분은
온전한 편이고 바깥으로 드러난 뒷부분은 많이 손상된 모습으로 이탈리아 고고학자
지오바니 가비글리아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거상을 박물관으로 옮기다
람세스 2세의 거대한 동상이 어떻게 여기로 옮겨졌을까요?
여러 사람이 거산을 꺼내서 뒤집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다
하지만 1887년 이 되어서야 영국군 엔지니어인 A.H베그놀드가
거상을 들어 올려 현재 위치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이를 위해 그는 풀리와 레버스스템을 사용했다
람세스 2세의 어깨에는 고대이집트인들이 사용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카르투슈라고 한다
카르투슈는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상용문자 기호 중에 하나로 파라오의 이름을 둘러싸는 곡선이라 한다
그런데 람세스 2세 석상에 새겨진 파라오 이름이 람세스 2세가 아니라 람세스 3세라고 한다
이는 람세스 3세가 일종의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람세스 2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치기를 했다고 한다
카르투슈는 왕의 이름을 새긴 표시다
타원형의 테두리 안에 왕의 이름을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곳에 전시된 람세스 2세 석상에는 10개의 카르투슈사 새겨져 있다
그의 벨트. 팔찌. 오른손 어깨와 손에 쥐고 있는 용기 (중 하나는 거의 파괴됨)
에 모두 10개의 카르투슈가 있다
람세스대왕(BC1279~1213) 제19왕조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약 66년의 놀라운 통치 기간 동안 그 많은 것을 성취하였다
90명의 자녀를 두었을 뿐만이 아니라 여러 전쟁에서 싸웠고 심지어
세계 역사상 가장 이른 평화조약 중 하나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도시 사원 기념물을 광범위하게 건설했는데 그중에는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행정수도인 피라메세스 누비아에 있는 아부심벨 사원
멤피스에 있는 프타 사원 등이 있다
람세스 2세의 동상은 다른 어떤 파라오 보다 더 많이 남아 있으며 여러분이 보는
걸작도 그렇다 이 거대한 동상은 석회암으로 조각되었고 높이 10m가 넘는다
람세스 2세 [Ramses II]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1279~BC 1213). 팔레스타인과의 오랜 싸움으로 화약을
맺고 시리아를 포기하였다.
대표적인 오리엔트적 전제군주로, 자신의 조상(彫像)을 각지에 남기고 신전 ·장례 전(葬禮殿) ·
신문(神門) 등을 세웠다. 라메세세스(Ramesses) 2세라고도 한다.
아버지 세티 1세 이후의 팔레스타인 정복을 계속하였으며, 치세 5년경에는 카데시에서
히타이트왕 무와타리시와 크게 싸웠으나 결전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후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승자도패자도 없는 싸움으로 시달리다가 BC 1258년
두 나라 사이에 화약이 성립되어 이집트는 시리아를 포기하고 말았다.
평온을 유지하는 가운데 BC 1245년에는 히타이트의 왕녀가 왕에게 시집왔다.
그 무렵 서(西) 델타에서 리비아인과도 싸웠다. 왕은 여생을 각지의 신전 건조에 바치고,
델타 북동부에 왕도 페르라메스를 만들었으며, 아비도스 ·테베 ·누비아의 아부심벨 등에
신전 ·장례 전(葬禮殿) ·신문(神門) 등을 세웠다.
왕의 시대에 이집트왕조의 융성기는 끝나고, 제20 왕조의 왕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왕은 대표적인 오리엔트적 전제군주로, 자신의 조상(彫像)을 각지에 남겨 자신을 과시하였다.
적어도 아들 52명을 포함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5호 고분은 이 왕의 가족묘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된 여러 건축물들의 부조 해석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궁금증만 더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여신 히토르는 사랑 모성 음악을 상징한다
여기서 그녀는 소의 귀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되었다
소는 음식 우유 농업에 대한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물체는 한 때 비슷한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기둥 위에 잇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독립된 기념물이었고 사람들이 그것에 제물을
바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조각상도 분명 큰 의미가 있을 텐데 알 길이 없다
람세스 2세 입상
이석상은 람세스 2세가 35세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수조
야외 박물관에는 많은 유물들이 보인다
스핑크스상
이 스핑크스상은 높이가 2m 길이가 4m로 현재까지 발견된 스핑크스 중에 그 규모가 가자 피라미드지구
스핑크스에 이어 두 번째 크기라 한다 가자 스핑크스에 비하면 초라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훨씬
선명하고 균형적이라 한다
F. 페트리에 의해 1912년 발굴된 것으로 이집트 제18왕조 아멘호테프 2세의 것이라고 한다
. 신전의 남쪽 입구를 수호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loop>Sweet People - River Blues(추억의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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