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디오션 리조트에서 아침일찍 출발해 선암사로왔다
8시도 안되어 매표소는 굳게 닫혀있고 차량진입도 막아 놓았다
할 수 없이 걸어서 1km 이상을 전진해야 한다
선암사
전남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사적 507호)이다.
선암사는 백제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통일신라 때 풍수지리설로 잘 알려진 도선(道詵)이
실질적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중기 의천이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하였기 때문에 천태종을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선암사에는 도선 진영(보물 1506호)와 의천 진영(보물1044호)가 전해오고 있다.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으며 이후 여러차례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에 많은 건물이 불타고
현재는 20여동의건물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는 선암사는 교종 계열인 천태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선종 중심사찰인 송광사와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현대 불교에서도 양대 종단인 조계종과 태고종의 중심 사찰 역할을 하고 있다.
선암사는 한국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어 65동이나 있던 전각이 20여동으로 줄기는 했지만
현재의 규모로도 상당히 큰 사찰이다.석가여래를 모신 대웅전(보물 1311호)를 주불전으로
삼고 있으며 마당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한 2기의 삼층석탑(보물 395호)가
우뚝 서 있으며, 앞쪽에는 강당인 만세루, 양쪽에는 요사채가 배치된 전형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대웅전 뒷편으로는원통전, 각황전, 웅진전, 팔상전 등 많은 불전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으로 사창각을 비롯한 많은 요사채들이 들어서 있다
숲속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 승선교(홍교)와 강선루
보물 제400호. 높이 7m, 길이 14m, 너비 3.5m. 길다란 화강암으로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연결하여 반원형의 홍예(虹蜺)를 쌓았는데, 결구 솜씨가 정교하여 홍예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의 계곡 기슭까지의 사이에는 둥글둥글한 냇돌을 사용하여 석벽을
쌓아 막았다. 다리 좌우의 측면석축도난석(亂石)쌓기로 자연미를 그대로 살렸으며
원형을 잘 지니고 있다.
기단부에는 아무런 가설도 없이 자연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다.
홍예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다리는 임진왜란 이후 선암사를 중건할 때 가설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즉, 1698년(숙종 24) 호암대사(護巖大師)가 관음보살의 시현을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圓通殿)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순천 선암사 초입에 있는 보물 제 400호 '승선교' 아치다리는 속과 선을 나누는 경계이다.
조선조 숙종 때에 축조된 300년이 된 다리인데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고 아주 튼튼하다.
저 멀리 '강선루' 누각이 아스런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선과 선녀가 하늘로 올라 갔다가 인간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다시 내려온다는 강선루가 승선교와 함께 명승을 자아내고 있다.
선암사가는 길목에서 만난 선경이다
강선루
이 누각의 규모는 중층의 누각으로 1층은 정면, 측면 모두 1간으로 구성하고 2층은
가늘고 낮은 기둥을 사용하여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구성했다.
상부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기둥머리에 소로와 첨차로 외1출목을 결구하여
공포를 구성하였으며 살미쪽은 익공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주심포와 익공의
혼합된 모습이 나타난다.
기둥사이는 창방으로 연결하였고, 창방과 장혀 받침굴도리 사이에는 코끼리 1구씩을
두어 장식하였다.대들보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세우고 중보를 얹었으며
그 위에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쳐 5량가를 꾸몄다.
합각지붕의 가구를 위해 충량과 선자서까래를 설치하였는데 충량은 용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대부분의 사찰은 누문이 일주문 안쪽에 위치하는데, 선암사는 사찰
경역의
입구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처음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39년 이월영(李月泳) 주지스님이 여러 지역
유지들의
모금으로 지어1953년, 1972년, 1983년에 보수했다는 기록과 그때 썼던 누(樓) 앞뒤로
각각 걸려진 현판의 글씨 주인공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강선루 굵은 글씨체는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던 인물로 근세 명필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 ~ 1936) 글씨와
다른 한쪽의 현판은 동시대에 예.이조판서를 지내다
서예가로 활동했던 석방(石邦) 윤용구(尹用求 1853~1936)의 글씨이다.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사적에 의하면 이 연못은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2년(862)에도선국사(道詵國師)가 축조한 것이라 전한다.
'삼인(三印)'이란 말을 쓴 못이 우리나라에는 이것 외에 없는데,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三法印)을뜻한 것으로 불교(佛敎) 사상(思想)을나타낸 것이며,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선암사에는 명품이 많다 무지개다리 승선교 냄새 없는 뒤깐
또 삼성각 앞마당 길게 누운 소나무 그러나 진짜 명품은 따로 있다
절 입구 작은 연못 삼인당 도선국사는 연못이름을 삼인당이라 하였다
일주문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2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 중간에서 보조 기둥을 잘랐다.
이는 기둥 양 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 하며, 다른 일주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배치되는 공간포를 앞면에 3구, 옆면에 1구씩 두어 공포로 꽉 차 있는 듯하다.
기둥 위에는 용 머리를 조각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앞면 중앙에 ‘조계산 선암사(曺鷄山 仙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암사 일주문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전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조선시대 일주문의 양식을잘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의 범종각에 있는 종을 주조한 기록이다. 종은 숙종 16년(1700년)에
주조한 8백근의 큰 종이다.
제작에 관련된 인원을 먼저 나열하고 시주질은 거의 일반인으로 이루어진 대종시주와 승속이 섞인
전대명시주로 나누어 수십명을 열거하였다.
이어 본사의 승려들을 차례로 열거하고 공덕주 도감 공양주 등의 연화질을 끝에 들었다.
마지막에 왕과 왕비와 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구절로 마무리지었다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고 사천왕상이 없다. 조계산 주봉인 장군봉의 기운이 강해 굳이
사천왕상을 세울 필요를느끼지 않아 사천왕문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법고는 법을 널리 알리는 ‘북’이라는 의미로 북소리가 널리 퍼져 번뇌를 물리치고 모든 중생을
깨우치는 의미가 있다. 목어는 수중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의구이다.
목어를 휴대용으로 변형시킨 것이 목탁이다.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제도하는 의구이다. 운판은 해와 달, 티베트 범자, 보살 등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범종루로 들어서면 만세루가 자리하고 있다. 처마 밑에는 “육조고사(육조고사)하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의 글씨인데,
육조고사의 육조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선종을 처음 전한 ‘달마’로부터
여섯 번째, 그 선종을 이어온 혜능을 일컫는데, 그는 중국 조계에서 그 선법을 널리 선양했다.
육조고사란 혜능의 옛 절이란 뜻이다
만세루는 수많은 학승들이 여기서 강학을 하였던 건물로 1824년 해붕, 눌암스님이
중창한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서 초기 가람배치
형식에서 대웅전 뒤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강당이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대웅전과 주축 선상에 누문을 두고 누문 밑으로 진입하여
대웅전 마당에 이르게 하나 이곳 선암사에서는 누의 좌우로 돌아가서 오르게 하였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우고 굴도리를 얹어
가구를 짰다.
두 기의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1147년에 기록된 <조계산 선암사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원래 미륵전으로 2층중층건물이었다.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후 현종
원년(1660) 경잠, 경준, 문정의 3 대사가 주축이 되어 중수하였는데
1759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1760년에 상월, 서악 등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1823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1824년에또다시 중건한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넓은 계단과 좌우에 좁은 계단을 두었으며, 낮은 기단 위에 주좌가 뚜렷한
원형 초석을 놓고 배흘림 원형기둥을세웠다. 이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다포식의
팔작지붕으로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배치하고 그 위로 공포를 짜 올렸으며 출목수는 외삼출목,
내사출목으로 매우 화려함을 주고 있다.
전면 3칸, 측면 3칸의 내4출목 건물로, 천정은 층층이 들여쌓아 밀어 올린, 3개 층의 층급
우물천정이다. 중앙부 내진영역의 천정을 가장 높이 경영한 형태다.
천정에는 학(鶴) 문양과 기하적인 배열로 도식화된 8엽연화문을 가득 채웠다.
학 문양은 우물반자 세 칸 폭으로 사방면에 조성한 하층천정의 가장자리 한 줄에만 배열하였고.
사방 가장자리 우물반자에는마치 범자로 결계를 치듯 학 문양으로 신성한 사각 틀을
이룬 후, 그 내부에 8엽연화문으로 배치하였다.
대웅전의 현판은 조선시대 신권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초를 열었던
선조의 장인인 김조준의 글씨이다.
대웅전 앞에는 2기의 삼층석탑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규모와 수법이 같은 석탑으로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층기단은 넓은 지대석 위에 놓여 있는데 4ㄱ의 장대석으로 구성되었다.
기간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각각의 기단의 윗면에는 굴곡을 이룬 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하층갑석의 윗면은 약간 경사가 져 있으며 중앙에는 3단 굄이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도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으며 상층갑석은 하층갑석과 같이 밑에는 부연이
있으며, 비스듬하게 경사가져 있는 윗면 중앙에는 3단 굄이 모각되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고, 몸돌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지붕돌 밑에는 수평이고 4단의층급받침을 두었다.
지붕돌 위에는 2층의 굴곡을 이룬 굄이 있어 특이한 형태이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원형의 작은 석재를 올렸는데 원래 석탑의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1986년 8월에 탑을 해체 복원할 때 동탑의 몸돌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사리장엄구로 청자항아리, 백자 항아리 각 1점과 사리 장치로
금동사리탑과 수정 용기, 사리 1과 등이 출토되었다.
두 기의 석탑 사이에는 석등이 있어야 하지만 선암사에는 석등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선암사는 풍수에 의하면 화재에 취약하기때문에 불을 상징하는 석등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 대신 건물에 水, 海, ☰, ☵의 문양으로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심검당과 마주 보는 설선당은 1825년에 심검당과 함께 중건했음을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만일염불을 했던 염불원이있었던 건물로서, 지금은 행자들의 교육과 생활을 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덤벙 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우고 초익공 형식을 갖춘
단출한 건물이다.
심검당과 같이 맞배지붕이 이어져 口자를 이루고 중앙에 자그마한 마당이 있어 개방적인 느낌을
받으나 외부는 문이 별로 없어폐쇄적인 느낌을 받는다. 심검당 같이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어 1층은 스님들이 기거하고 2층은 수장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전 앞 좌측에 있는 심검당은 1825년에 중건하여 처음에 하성원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스님들의 강원으로 사용하고있는 건물이다.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고 2층은 수장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 뜰에서 보면 일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지붕 밑 대공이 있는 공간까지 하면 3층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곳 공간은 외부인이 들어다 볼 수 없고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한국NGO신문에서
지장전에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명부의 십대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선암사 팔상전. 석가모니의 일생 중 주요 장면을 그린 팔상도를 모신 불전이다.
조선 숙종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대웅전 뒤뜰
각황전 본래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다. 부처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말한다.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인 장육존상을 봉안했을 것이고 그러한 장육존상의 예는 신라 황룡사
금당 장육존상터에서 알 수 있다.
선암사 각황전은 신라 경문왕 원년(861)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후 현종 원년(1660)에
경잠, 경준, 문정 3대사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 상월(相月), 서악(西岳)
2대사가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 각황전은 선암사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과 여러 전각들을
지나 북쪽 끝 지점에 무우전이 있는데 이곳의 안쪽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가
작은 소형 전각이 바로 각황전이다. 각황전의 좌향은 남향으로 대지보다 5계단
정도의 축대를 쌓아 지반을 형성했다. 내부에는 건물 창건 당시 주조하였던 철불을
1900년 경에 석고로 도색을 하여 현위치에봉안하고 있다.
순천 선암사 선암매, 천연기념물 488호 선암사 선암매는 원통전.각황전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에 50주 정도가 위치한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와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와가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되었다.
문헌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 수령은 정확히알 수 없으나, 사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하고 있어선암사의 역사와 함께 긴 세월을 지내 왔음을 알 수 있다.
매화 꽃이 필때면 매화를 보기 위해 선암사를 찾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 중
생육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이 원통전은 규모는 작지만 입구 어간문이 있는 쪽에 기둥을 이어 지붕을 얹은 ‘정(丁)’자형의
이 원통전의 아름다운 문양은 어간문이 닫혀 있을 때 절정에 달한다.
불교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토끼가 사찰장식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토끼와 관련된 불교설화를 만나보자. “여우와 원숭이, 그리고 토끼가 불심(佛心)을 터득한 것을 자랑하고
응진당(應眞堂)
응진당(應眞堂)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유마경] [증일아함경] 등에 나오는
제자를 모셔야 하나조선시대에는 십육나한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나한전 영산전이라고 불렀다.
선암사의 경역내에서는 가장 뒤쪽에 있는 조그마한 승원이며 이 영역의 주불전이다.
졍면3칸 측면3칸의 목조맞배기와집이며 깬돌을 경사지게 쌓아 높은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덤벙주초와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심포와 익공 형식이 섞여 있고 어간에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였으며 좌우측의 퇴간에는
와형(소용돌이) 문양이 장식된 널빤을 천장으로 설치하였다. 북쪽면은 외1출목의 주심포 형식을 하고 있다.
달마전(達摩殿)은 중심축을 향하여 응진당 왼쪽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응진당 경역의 요사와 선방 형식을 하고 있다.
지붕의 형식은 응진당 쪽은 맞배지붕 반대쪽은 팔작지붕이다.
기단에 묻힌 초석 위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주두를 얹은
민도리 형식이다.
맨 위쪽의 칸은 부엌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방으로 쓰고 있다. 가칠단청에
머리초만을 칠한 수수한 건물이다.
진영당(眞影堂)
응진당 우측에 중심축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는 건물로 선암사 큰스님들의 진영을 모셔다 놓은 곳이다.
조촐하고 조그마한 건물이다. 두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기단속에 주초가 묻혀 있고 원형기둥이 그 위에 서있다. 양측면 평보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동자기둥이 2개 세워져 중보를 받치고 있으며 위에 마루대공을 세운 다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선암매중에 가장 큰나무 같다
위아래 모두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다
전남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선암사 해우소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一 자형 건물의 북측 중앙에 출입용 입구를 맞배지붕을 붙여 전체의 구조가 T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목재를 이용하여 지은 건물로 불편해 보이지만 내부의 구조가 매우 편리하게 할용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지면에서 높아 악취가 풍기지 않고, 통풍이 잘 되도록 전후에 살창을 두었고, 바닥은 틈 없이
잘 짜여있으며 남녀로 구분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용무를 볼 수 있도록
2열로 배치한 것이 이채롭다, 또한 해우소에서 나온 분비물은
모두 퇴비로 사용하여 자연친화적인 화장실로 꼽히고 있다.
이 건물이 정유재란에도 타지 않고 그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해우소이다.
이렇게 선암사를 둘러보고 낙안읍성으로왔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매표소 건너편 장승들
이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대한민국 3대 읍성 중 하나이다.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간 12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로 현재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및 CNN선정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16위로 선정되어 있다.
동편제의 거장 국창 송만갑 선생과 가야금 병창 중시조 오태석 명인이 자란 곳이며, 전통 유무형의
문화가 숨쉬는 곳이다.
후예들이 펼치는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 국악, 농악놀이, 수문장교대의식, 서당, 짚물,
대장간 등의 볼거리와 새끼 꼬기, 가을초가 이엉잇기 등 16여개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낙안읍성민속마을 전경
성 안에는 108가구,300여명의 주민들이 전통적 생활모습을유지한 채 살고있다.
난방이나 전기,전화 등 필수적인 시설 몇 가지만 빼고는 대부분 우리의 옛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은 산만한 듯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옛 고을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집집마다 주민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을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타지역
민속마을과의 차이점이다.
낙안읍성 면적은 6만 7000여평.조선 태조 6년 왜구 침략이 극성을 부리자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은 것을 얼마 후 석성으로 넓혀 쌓았고,
1626년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증축했다고 한다.
지금은 낙안면 동내리,서내리,남내리가 공식 행정구역 명칭이다.
마을 남쪽에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였다. 돌담을 끼고 고샅을 따라 거닐며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을 비롯해 각종 체험 공간,연못, 물레방아, 옥사, 빨래터 등을 볼 수 있다.
민박에서 하룻밤 묵어도 좋다. 초가집인 겉모양과 달리 내부에 욕실,
화장실 등을 갖춰 편하다. 저잣거리 터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음식점이 들어섰다.
국밥, 백반, 비빔밥, 칼국수, 파전, 빈대떡, 도토리묵, 두부김치,
동동주 등 다양한 메뉴를 선보인다.
오태석 명찬생가와 낙안읍성 가야금병창 계보도
안숙선 .장월중선.박귀희.오수관 오태석 명창들의 안내판
명월관에서 아침겸 점심 비빔밥으로 간단히 식사를 했다
이른 오전이라서 인지 양품점에는 손님이 없는 것 같다
타당탕 타당탕, 탕탕탕” 대장장이가 달궈진 쇠를 모루에 놓고 망치로 두들겨 호미, 낫, 괭이, 쇠스랑 등
각종 농기구나문고리, 칼 등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 소리이다. 풀무질, 농기구 손잡이
제작, 각종 생활도구 성양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은 두 가지 방법으로 둘러보면 좋다. 동문으로 들어가 관아 지역을 구경한 뒤 민가를
둘러보며 각종 체험을하는 방법, 동문 바로 위 낙풍루로 올라가서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방법이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느긋하게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서문과 남문의 중간 지점인 읍성 전망대에서 둥글둥글 초가지붕이 어깨를 맞댄
소담스러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엔 민가들과 함께 중앙정부가 파견한 관리들이 묵던 낙안객사,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동헌(東軒),관리들의 거처였던 내아(內衙) 등 관아와 낙풍루·낙민루 등
누각이 자리잡고 있어 전통 건축미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읍성은 동서로 긴 직사각형이다. 길이가 1410m이고, 동·서·남쪽에 각각 성문이 있다.
동문에서 서문을 향해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도로가 있고, 도로 북쪽에 관아,
남쪽에 민가가 모였다. 이런 배치는 낙안읍성이 한양도성을
본떠 만든 계획도시임을 알려주는 형태라 한다.
조선 시대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인 동헌은 행정과 송사 등의 업무가 진행된 공간이다.
당시 죄인을 다스리던 모습을 재현한 동헌 앞마당이 기념 촬영 장소로 인기다.
관아 건물을 둘러보고 나서 낙민관자료전시관에 들러 낙안읍성 관련 영상도 감상하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1397년(조선 태조 6) 절제사(節制使) 김빈길이 토성을 쌓았으나 1424년
석성으로 개축하여, 1450년경 완성 당시에는 둘레 5,157m, 높이 17.1m였으며 동·남·서문
3개, 적대(敵臺) 4개가 세워졌고, 우물과 연못을 각각 2곳씩 만들었다.
그후 수차례의 붕괴가 있었고, 병자호란 때(인조 4) 낙안군수 임경업 장군이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 성벽과동·서·남의 문지(門址) 및 옹성(甕城) 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데, 아래쪽부터 큰 돌을 쌓아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박음하여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가 작아지는 조선 초기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돌과 돌 사이에 틈이 나 있지만 끊긴 데가 없이 견고하여, 현재까지 완전히 보존된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하나이다. 가옥은 토벽집의 기법으로 된 □자 형태로 안채·행랑채를 지닌 전통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마을은 1977년 중요 민속자료제92~100호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임경업 장군을 기리며 세운 선정비와 봄·가을에 제사 지내는 충민사·대성전·
명륜사 등의 향교건물이 남아 있으며, 이밖에 1984년에 복원된 남민루 정자와 1,407m의
성곽 등이 있다. 현재 민속전시관·놀이마당을비롯한 낙안읍성 민속보존마을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관광지로의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주위에 조계산도립공원·선암사
등이 있으며 순천 시내의 호텔 등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순천에서 낙안까지
버스가 운행되며, 857번 도로의 기착지이다.
익살스런 목조각들을 뒤로하고 또 다시 순천 국가정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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